제444화
공생.
기억이란 게 처음 시작됐을 때부터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던 단어였다. 생존과 맞닿아 있는 단어에 정신이 이끌리고, 신체는 정신에 맞춰 강함을 추구해 나갔다.
인식한 순간부터 깨달은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건 동등한 힘을 지녔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걸.
“싹 다 밀어 버려야지. 아주 말끔하게 말이야.”
게웰은 유단을 바라봤다.
문득 유단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고민됐다. 친구, 동료, 공동체 일원, 아니면 기생자.
“마을에서 변한 놈들은 역시 제어할 수가 없네. 길리우드는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유단과 시선이 맞았다.
“왜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어.”
-유단.
“왜?”
-넌 무얼 바라지?
“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유단은 불길이 치솟는 도시를 보며 말했다.
“머리 꼭대기에 서는 거. 이 육체, 이 힘. 이거라면 가능해. 저놈들은 우릴 모르지만, 우린 인간을 잘 알아. 약점을 하나하나 공략해 나가면 결국 쓰러트릴 수 있어.”
-인간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너도 봤잖아? 기적에 취해서 이성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는 놈들을. 몰아치면 반드시 나오게 돼 있어. 동족을 배신하고 우리 쪽에 붙는 인간들이.”
목소리에 자신감이 붙었다.
“우린 인간을 사육하게 될 거야. 멍청한 마수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예들이 우리 밑으로 오는 거라고.”
-그다음은?
“먹고 즐기는 거지. 인생은 결국 그거 아니야?”
-변함이 없군.
“그러는 너야말로 아직도 그 공생을 생각하고 있어?”
-이번 공습 역시 어디까지나 경고일 뿐. 깨달은 인간이 제안서를 내밀면 난 그 손을 잡을 거다.
“태어났으면 욕망을 가져야지. 다 집어삼킬 수 있는데 이 좁은 땅에 같이 살겠다고?”
-대륙은 좁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우린 국경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렇다.
별문제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먹이는 지성이 없고 번식력만 높은 마수를 사용했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마나가 주 에너지원이기에 섭취라는 자잘한 욕구만 풀어주면 마수는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다.
지성을 갖춘 동지들은 스스로 오락거리를 만들어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인간이란 종이 영생하지 않을 것이며, 종의 교체가 이뤄지는 날이 올 거라고 했다.
게웰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그날이 오면 분쟁 없이도 터전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태고로부터 인간을 사냥해 온 자들.
그들은 지상의 강한 종을 사냥하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충동을 억제하고 버텨보라 했지만 한계에 달했고, 이번 공습이 결정됐다.
게웰은 도시를 향해 뛰어가는 마수를 바라봤다. 인간들이 말하는 심상 세계를 통해 동지를 제외한, 지성 없는 마수를 컨트롤해 보려 했으나 숫자에 한계가 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숫자가 이탈했다.
길리우드 두개골에 남아 있던 잔여 의식이 증발한 탓이었다.
기적의 산물 같았던 두개골.
길리우드의 잔여 의식을 통해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발견했었다.
마나조차 닿지 않는 기이한 공간.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종은 그곳에 들어선 순간 시험을 받았다.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았다.
시험을 이겨내거나 혹은 빗겨나간 자들만이 온전한 이성을 유지한 채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건 동지 중에서도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신이 붕괴되고 육체마저 녹아내렸다.
인식할 수 없는 그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유단뿐이었다.
게웰이 통솔이라는 특수한 힘을 얻었듯, 유단 역시 통행이라는 힘을 얻은 것이다.
유단은 그곳에서 인간에게 기적을 내렸고 기적을 붙잡은 인간은 유단에게 매료됐다.
강력한 의식 제어였다.
죽으라면 죽고, 죽이라면 죽이는 마법.
사고가 단순해져 복잡한 일은 시킬 수 없으나, 오늘처럼 동시에 폭발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난 널 존중해. 돼지우리처럼 뭉쳐서 사는 동안 내가 별다른 말도 안 했잖아.”
-돼지우리라.
“너와 온순한 동지들은 말했지. 경각심, 혹은 깨우친 인간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거라고. 근데 결과는 어땠지? 저들은 변하지 않아. 우릴 그냥 배터리의 재료로 보고 있다고.”
유단의 얼굴 형태가 무너져 내렸다. 흥분할 때마다 인간성을 잃는 유단이었다.
“네가 말했잖아. 공생은 대등한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근데 우리가 더 우수하잖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우리가 더 뛰어나. 우리야말로 지상을 지배해야 할 종이란 거지.”
-지배는 복잡하다. 무엇보다 위험이 남아 있다.
게웰은 동쪽을 바라봤다.
타리움이 아닌 연합 도시를 공격한 이유.
길리우드의 잔여 의식 속에서 거대한 무엇을 보았다. 절대 마주쳐서는 안 될 무엇이라는 것만 짐작할 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생명체인지 아니면 어떤 장치인지조차도.
때문에 동부를 밀어 버리자는 유단을 설득해 서부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네 직감은 꽤 잘 맞았지. 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게 된 거고. 하지만 말이야, 그 직감이란 것도 완벽한 건 아니잖아. 틀릴 때도 있었고. 게다가 우리도 변했어. 진화했지.”
유단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몸에서 돋아난 검은 촉수가 하늘을 가릴 것처럼 뻗어나갔다.
“미지의 위험? 그런 건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와 내가 함께라면 간단하게 치워낼 수 있을 테니까.”
-길리우드도 제거당했다. 그의 두개골에 남은 잔여 의식만으로 난 다양한 마수를 몇 년간 통제할 수 있었다. 너 역시 인식하지 못한 공간 속에서 힘을 얻었고.
“길리우드 역시 인간이었잖아. 그놈은 분수에 맞지 않은 힘을 얻어서 그냥 죽은 거야. 그라운드 제로 때 그놈이 모든 힘을 제대로 이용했다면 해골만 남긴 채 갔겠어?”
-하늘을 가르던 거대한 검. 길리우드를 끝낸 미지의 무엇. 종의 사활을 건 전쟁에 들어가면 우린 그것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웰. 기적이 매번 등장한다면 그걸 기적이라 부르겠어? 무엇보다 길리우드를 쳐낼 정도의 힘을 가진 놈이 있다면, 우릴 왜 내버려 두는 건데?”
-공생을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릴 내버려 두는 거고.
푸하하, 유단이 크게 웃으며 도시를 가리켰다.
“게웰, 안 보여? 우린 공격 중이야! 인간의 비명이 안 들려서 아쉽긴 하지만 이미 몇백은 죽었을 거라고. 네가 걱정하는, 그 공생을 이해했다는 놈은 대체 어디 있지?”
-유단. 산은 느리게 움직인다는 속담이 있다.
“아니야, 게웰. 산은 못 움직여.”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유단이 싱글벙글 웃으며 외쳤다.
“가서 고기를 뜯어! 짓밟고 부셔! 지상의 주인이 누구인지, 장난감으로 우릴 막으려는 인간들에게 똑똑히 알려주라고!”
유단과 마음이 맞는 동지들이 작게 웃으며 뛰쳐나갔다.
본능.
인간도 그렇고 마수도 그렇고, 결국 빼앗아야 속이 풀리는 종이었다.
다를 바 없는 걸까.
아니면 너무나도 달라서 비슷해 보이는 걸까.
-유단. 너와 나는 어떤 관계지?
“친구지. 영혼을 나눈 친구. 시작이야 아주 개같았지만 널 원망하지 않아. 덕분에 인간을 벗어났으니까. 아, 말이 나온 김에 똑똑한 네가 지어야 할 게 있어.”
-뭐지?
“이름. 마수라고 부르는 거, 이거 멸칭이잖아?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짜증이 나네. 인간이 붙인 이름을 왜 굳이 쓰고 있었지?”
-너와 함께하는 동안 편의상 썼으니까. 우린 우리를 지칭하는 다른 용어가 없다. 동지니까.
“인간이란 종의 명칭이 있듯, 우리도 그럴싸한 걸 만들자. 아니지! 좋은 생각이 났어.”
유단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늘부터 우리가 인간이다! 저 가짜들을 치우고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이름을 되찾아 오자!”
유단의 외침에 호응하는 마수는 없었다. 지성을 갖춘 마수들도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럼에도 유단은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이런 거 나만 신경 쓰잖아? 그러니 내가 만족하면 되는 거지?”
-그렇긴 하지.
“좋아. 오늘부터 우리가 인간이다.”
인간.
게웰은 시선 끝에 놓인 도시를 바라봤다. 저곳이 시작점이 될지, 마침표가 될지.
유단의 말대로 괜한 걱정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무사히 도시를 점거하고 영토를 넓혀 새로운 국경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인간이 그은 선이 아닌, 동지들이 그은 선으로.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네.”
유단이 바라보는 곳에 거병과 해더 트럭이 있었다. 게웰도 유심히 보는 중이었다.
전장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는데, 마수들이 방향을 틀며 그들을 쫓았다.
“좋은 냄새라도 나나? 왜 저렇게 따라가. 게웰, 네가 마지막에 집어넣은 명령은 끝없이 앞으로 달리는 거였잖아.”
-내게 남아 있던 통솔의 힘도 거의 다 사라졌다. 본능이 다시 눈을 뜬 거겠지.
“그런 것치고는 저쪽으로 몰리는 숫자가 많은데.”
다시금 전선을 바라봤다.
유단의 말대로 거병과 해더 트럭을 따라가는 마수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여왕벌을 따라가는 일벌처럼.
“거슬리는 건 일찍일찍 치워야지. 가보자.”
게웰도 몸을 틀었다. 비대해진 몸이 지면을 긁으며 방향을 전환했다.
* * *
편한 말년을 그린 적은 없었다.
황혼기에 접어들어도 일감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 예정이었다.
그런 다짐을 했지만, 이렇게 격렬한 노년을 바란 건 아니었다.
“이놈아!”
웍센은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몰려드는 마수와 흠집이 잔뜩 난 거병. 게다가 균열에 막혀 이동할 수도 없었다.
살아날 묘수 따윈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묫자리를 아주 지랄 맞은 곳에 잡았구나.”
흥분한 탓일까. 죽음이 가까워졌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벌었다는 안도감이 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수들이 미친 듯이 트럭을 따라왔다. 도시로 진격하던 놈들조차 눈이 획 돌아 트럭으로 달려들었다.
공세가 줄어들었으니 도시가 재정비할 시간을 번 것이다.
노인네 목숨 하나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 기술공들을 살릴 수 있다면 남는 장사 아닐까?
-선배님.
가하란의 목소리가 거병의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저놈들, 이 트럭에 환장한 것 같구나.”
-트럭보다는 슬리피한테 반응한 겁니다. 저쪽에 있을 때 몇 가지 실험해 봤거든요.
“실험? 날 미끼로 쓴 거네?”
-슬리피가 설명 안 했나요?
“뭐라 중얼거리다가 조용해졌다. 그게 그 소리였나 보군.”
상관없었다. 미끼가 되든 뭐가 되든 마수의 이목을 끌어 공격을 늦췄다는 게 중요하니까.
“근데 방법이 있는 거냐? 아니면 여기가 진짜 내 묫자리인 거냐.”
-무슨 말씀을 그렇게 무섭게 하세요. 선배님, 오래 사셔야죠.
“살 구멍이 안 보이는데?”
-곧 설치가 끝날 겁니다. 닥한테서 상황 보고를 받고 있어요.
웍센은 고개를 틀어 트레일러에 실린 박스를 바라봤다. 활짝 열린 덮개와 텅 빈 저장고.
박스 안에 나란히 타고 있어야 할 초소형 거병들은 지금 평야 곳곳에 흩어져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분사체로 기적을 이뤄낼 수 있는 걸까?
박스에 고정돼 있던 슬리피가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내려왔다.
-예상보다 면적이 줄었어. 그리고 동기화에 시간이 더 걸린대. 상황이 좋지 않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