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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43화 (443/558)

제443화

몇몇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인지 통합에서 벗어난 거병은 움직일 수 없다.

몇 안 되는 특수 상황조차 기동력을 대부분 잃어 달리기는커녕 걷는 것조차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상식이었다.

기나긴 거병의 역사 속에서 기사 없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거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보고 있는 저건 대체 뭐지?

“안에 한 명 더 있나 보네요.”

엔엔이 말했다.

밀레나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폭발이 있었다. 카트시는 거병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했었고.

“기체는 못 구했지만, 사람은 구했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말하고 나니 이상했다.

“그렇다면 왜 후퇴 안 하고 전진하는 거죠? 저 사람은 왜 내리고요?”

엔엔도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요. 움직이는 거병에만 신경 쓰다 보니 상황이 맞아떨어지질 않네요.”

마수가 득실거리는 전장 한복판에서 거병을 버리고 뛰어내린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르완 용병단의 표식이 있나요? 거병 쪽에는 안 보이는데.”

신체술을 써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엔엔이라면 이 거리에서도 옷차림을 확인할 수 있을 터.

“저 스타일은…… 옛 제국의 작업복 같네요.”

“작업복이요?”

“네. 르완 용병의 표시는 안 보여요. 근데 저 인간 남자…….”

엔엔이 눈을 좁혔다.

“다급해 보이지가 않아요. 표정이 여유로워요.”

“얼굴도 보여요?”

“대충 확인할 수 있어요. 다쳤는지 얼굴에 흉터도 보이네요. 아니, 오래된 상처인가?”

오, 하며 엔엔이 감탄했다.

“능숙해요. 한 마리를 처리했어요. 손도끼 끝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는데,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겠네요. 마전기를 이용한 거라면 비효율적인 거 같은데.”

뭐 하는 인간일까.

밀레나는 거병 쪽을 바라봤다. 뛰어내린 기사 옆을 따라다니더니 이내 대열을 이탈했다.

3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다른 마수와 마주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 어디 문제 있는 거 같은데요?”

거병이 삐거덕거렸다.

기본적인 움직임은 괜찮았으나 공격에 들어갈 때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버벅거렸다.

대검이 허공을 갈랐다. 너무나도 쉬운 공격 루트였는데 실패해 버렸다.

달려든 마수가 거병의 옆구리를 물었다. 외장갑은 튼튼한지 뜯겨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공격당하다 보면 기체에 무리가 올 것이다. 안쪽으로 전해진 충격에 액상 근육이 뒤틀리거나, 연질 파이프가 파열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놀랍네요.”

엔엔이 말했다.

“뭐가요?”

“저 인간이요. 타고난 사냥꾼 같아요. 왜 거병에서 뛰어내렸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잠깐 놓친 사이에 마수를 세 마리나 처리했다.

초소형 마수도 아니었다. 한 마리는 중형이었다. 훈련받은 군인 넷이 진형을 갖춰 체계적으로 사냥해야 할 괴물을 혼자서 처리한 것이다.

그것도 마수가 날뛰는 전장 한복판에서.

보고 싶었다. 한 명의 무인으로서 알고 싶었다.

다시금 마나를 두드렸다. 뿌리를 타고 몸으로 전해진 마나에 신체가 반응했다.

뒤통수가 얼얼해졌으나 신체술을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튼튼한 몸을 물려준 부모님께 감사를.

안력을 높였다.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손도끼를 든 남자가 돌진했다.

정면에 있는 건 들소 크기의 마수였다. 무슨 공격을 할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인데, 남자는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공격해 올 경로가 어느 정도 예상된다는 듯이.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건 노련한 사냥꾼들뿐이다.

밀레나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생각을 잠시 미루고 몸부터 던지곤 했다. 그렇게 해도 예측해서 반응할 수 있으니까.

마수의 몸이 두 쪽으로 나뉘었다. 본래부터 하나가 아니었다는 듯, 양쪽으로 나뉜 두 마수가 남자를 향해 짓쳐 들었다.

위험하다.

한쪽을 처리한다고 해도 다른 한쪽에서 날아든 공격에 당할 것이다.

이미 공격 범위 안.

물러설 수도 없다.

그때였다.

남자가 떠올랐다. 도약이라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나도 높았다.

8m 정도.

집중해서 신체술을 쓴다면 저 높이까지 오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공중에서는 방어가 취약해진다.

지상에 있는 마수 두 마리는 고개를 쳐들고 뾰족하게 변한 네 개의 팔을 내밀고 있었다.

당한다.

방법이 없다.

공중 회피를 선택한 건 최악의 수였다. 게다가 너무 높았다.

다음 상황이 예상되기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떠오른 남자를 중력이 붙들었고, 남자의 몸은 거부하지 못한 채 지면으로 떨어졌다.

끝났다고 여길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꺾였다.

남자의 몸이 공중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디딜 곳도 없는 허공에서 어떻게?

순식간에 왼쪽 마수 측면으로 떨어진 남자가 도끼를 휘둘렀다.

매끄러운 일격이었다. 엔엔이 말한 대로 날에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지, 마수의 가죽을 손쉽게 갈라버렸다.

전투 능력도, 판단도, 기술도 흠잡을 곳 없었다.

하지만 마수는 갈라 버린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마수 사냥의 끝은 마수의 뼈를 제거하는 것.

뼈를 내버려 두면 재생해 버리는 기괴한 놈도 있으니 반드시 적출해야 했다.

남자가 물러섰다. 뼈를 제거할 만큼 여유롭지 않았겠지.

밀레나는 쓰러진 마수를 바라봤다. 회복하고 일어난다면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설마.”

쓰러진 마수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숨을 거두기에는 공격이 얕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움직임이 없다?

가능성은 하나였다. 방금 일격에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장기를 끊어냈거나, 아니면 마나가 밀집된 뼈를 갈랐거나.

어느 쪽이든 놀라운 일이었다.

우연일까?

남자가 다시 몸을 날렸다.

혼자가 된 마수는 발악조차 못 하고 옆구리를 내줬다. 달아오른 날이 가죽을 갈랐다.

휘청거리며 쓰러진 마수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일격으로 또다시 목숨을 거둬갔다.

우연은 연속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처음 마주한 마수의 신체적 약점, 혹은 뼈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엔엔 님. 저 남자, 나이가 많아 보이나요?”

“아니요, 젊어요. 밀레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여요.”

“그 나이에 저런 실력이라니. 연합 도시에도 뛰어난 사냥꾼이 있군요.”

남자가 거병과 합류했다.

엉성하게 움직이는 거병 대신 남자가 마수를 정리했다.

순식간에 여섯 구의 시체가 쌓였다.

놀라운 실력이었으나,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상황이 안 좋아요. 마수들이 저쪽으로 몰려가고 있어요.”

자충수였다.

남자와 거병이 거슬렸는지 이동 중이던 마수들이 고개를 틀었다.

남자가 거병에 올라탔다.

드디어 후퇴하는 걸까?

“어디 가!”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거병은 도시 쪽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 다시 정면으로 나섰다. 마주 오는 마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더니 오른쪽으로 달려 나갔다.

긴 꼬리가 만들어졌다.

수십 마리의 마수가 거병을 낚아채기 위해 뛰어들었다.

측면에서도 마수들이 달려왔다.

개활지 전역을 덮은 마수들.

피할 곳은 없었다.

대략 오십 마리.

전후좌우를 완전히 틀어막은 중소형 마수 사이에 거병이 놓였다.

도망칠 곳도 없다.

거병은 무적이 아니다. 계속 공격당하면 기능을 상실할 테고, 이내 고철이 된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거병의 움직임.

안타까웠다.

훌륭한 실력을 지닌 남자였는데.

처절하게 분해되는 거병의 모습이 상상됐다. 끝이 도래했다고 여길 때, 이변이 일어났다.

해더 트럭이었다.

시야에서 사라졌던 해더 트럭이 마수에게 포위된 거병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

육중한 장갑을 덧댄 해더 트럭이 달려들자 마수들이 몸을 날려 피했다.

흩어진 마수를 뚫고 거병이 움직였다.

해더 트럭과 나란히 달리는 거병이었다. 위기는 모면했으나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마수들이 또다시 몰려든다.

도시로 뛰어가던 마수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조직성을 갖춘 마수.

밀레나는 천천히 움직이는 거대 마수를 바라봤다.

게웰이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퇴로가 점점 좁아진다.

이윽고 거병과 해더 트럭이 균열을 등지고 멈춰 섰다. 폭이 7m는 넘는 크나큰 균열. 뛰어넘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데드라인이었다.

잘 싸웠다.

거병 한 기로 보일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덕분에 도시 쪽에서도 약간이나 정비할 시간을 벌었을 것이다.

한 명의 군인으로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이 살아남아 부대를 지휘했다면 더 많은 걸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더는 기적을 바랄 수 없게 됐다.

삼면을 마수가 점령했고 뒤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으니까.

“몸이 정상이었다면…….”

답답한 마음에 말을 꺼냈다. 엔엔이 밀레나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에 뛰어드는 건 자살 행위예요. 컨디션이 최고였다고 한들 죽었을 거예요.”

냉철한 판단이었다.

수천 마리의 소형 마수와 수십 마리의 거대 마수.

평지가 아닌 공성전을 치러야 할 숫자였다. 거병과 해더 트럭이 전장에 들어선 순간 결말은 정해진 것이었다.

밀레나는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집중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비앙크의 마나도 어느 정도 회복됐을 것이다.

다시 움직일 수 있다.

“지금 가야 해요.”

엔엔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형 마수도 저쪽으로 쏠리고 있어요. 덕분에 틈이 생겼고요.”

도시로 향하는 길이 뚫렸다. 몇십 마리의 마수가 줄지어 뛰고 있는 상황이지만, 저 정도는 따돌릴 수 있었다.

비앙크라면 가능하다.

밀레나는 몸에 둘렀던 모포를 벗었다. 이름 모를 연합 도시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후 몸을 틀었다.

“가요.”

비앙크에 올라탔다.

-아슬아슬하지만 움직일 수는 있겠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마나가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솟아난 비앙크의 팔과 다리를 움직여 절벽 끝자락에 섰다.

직선으로 내달릴 것이다.

엔엔과 시선을 나눈 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조종간을 꽉 쥐었다.

“갈…….”

-잠깐만요!

카트시가 제동을 걸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아. 그래도 지금 움직여야 해.”

-그게 아니에요.

왜 그러는 걸까?

카트시의 목소리가 격양되고 있었다.

-저기로 가야 해요.

비앙크의 몸이 왼쪽으로 틀어졌다. 카트시가 움직인 것이었다.

바라보는 방향 끝에는 거병과 해더 트럭이 있었다.

“구할 수 없어.”

-살짝 다르지만 공유되는 통신대역이 느껴져요. 이걸 설계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에요.

한 명뿐?

밀레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저기에 가하란이 있어요.

듣는 순간 이를 물고 조종간을 밀었다. 엔엔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지만 상관없었다.

콰앙, 쿵쿵!

절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몸체가 꼬꾸라질 듯 앞으로 쏠렸지만 괜찮았다.

두 팔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네 발로 절벽을 박차며 나아갔다.

-밀레나! 넘어지겠어요!

“안 넘어지게 해봐!”

쿵!

먼지를 휘감은 채 바닥에 내려앉았다. 둔중한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시야가 한순간 뿌옇게 변했으나 상관없었다.

곧바로 뛰었다.

“심상 세계가 반쯤 부서져도 상관없으니까, 내 모든 역량을 끌어다 써!”

-밀레나를 다치게 할 정도로 전 무능하지 않아요.

비앙크가 달려 나간다.

앞을 가로막는 마수를 낚아채 던져버렸다. 몸은 지쳤고 정신력도 바닥을 기었으나, 이상하게 힘이 솟았다.

더 빠르게!

길게 늘어난 비앙크의 팔이 지면을 찍었다. 손으로 지면을 강하게 밀어내며 도약했다.

후웅!

비앙크가 떠올랐다.

발아래 수십 마리의 마수가 놓였다.

그리고 시선 끝자락에 거병과 해드 트럭, 그리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아주 작은 거병이 보였다.

“가하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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