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시선을 조금 더 멀리 던졌다.
허술한 방책이 먼저 보이고, 그 뒤로 2차 방벽. 방벽 안쪽에 도시가 있었다.
“이건…….”
눈을 얇게 뜨며 전방을 확인할 때였다.
쿠으으으, 잔떨림과 함께 먹먹한 소리가 전해져 왔다. 강렬한 빛줄기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터져 나왔다.
-국소 지역의 마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했어요. 3829 엘론. 가시화 영역에 진입한 마나 폭발이에요.
“거병이 폭발한 걸까?”
-그럴 가능성이 커요.
폭발이 일어난 곳을 유심히 바라봤다. 흙먼지가 뿌옇게 솟구친 곳에서 거병 한 대가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동료를 잃은 걸까?
“밀레나!”
엔엔의 외침에 밀레나는 고개를 틀었다. 30m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대한 마수가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길게 돋아난 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재빨리 진로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한 방향으로 우직하게 걸어갈 뿐.
“무리 전체가 도심으로 향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이탈하는 쪽이 많아요.”
“게웰의 지도력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 단위가 넘어가는 마수가 일시에 도시로 뛰어갔다면 저항조차 못 했을 것이다.
카트시의 도움을 받아 7km 전방을 확인했다. 방책을 이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병들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든 마수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사냥용 거대 작살이 마수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며 마수의 진로를 방해했다.
눈에 익은 장비였다.
밀레나는 뒤쪽에 서 있는 거병을 살폈다.
“삼촌들이야.”
르완의 표시가 보인다.
엄마가 저곳에 있다!
시야를 살짝 옮기니 반가운 얼굴이 또 보였다.
창대를 매섭게 휘두르며 마수 사이를 휘젓는 타챠가 있었다.
그야말로 전신이었다.
창대가 닿는 범위 내로 그 어떤 마수도 접근하지 못했다. 창이 그어지면 어김없이 시체가 생겨났다.
압도적인 무력.
하지만 전장의 형태가 인간들에게 불리했다. 하늘조차 가를 것 같은 무력이라 한들 닿지 않으면 소용없으니까.
마수들이 산개했다. 개활지로 퍼져나가는 모습이 마치 불어난 강물 같았다.
타챠를 지나쳐 마수들이 뛰어간다.
막을 수 없다.
이윽고 방책을 넘어 도시 외곽으로 진입하는 마수가 생겨났다.
왜 용병들밖에 없지?
도시라면 응당 방위군이 있어야 한다. 연합 도시의 방위 체계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수비군의 존재는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밀레나!”
엔엔의 외침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온몸을 활짝 펴며 달려드는 마수가 있었다. 몸 안쪽에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어 붙잡히면 귀찮아질 것이다.
비앙크를 뒤로 물리며 양손을 휘저었다. 빛의 팔이 마수를 갈라냈다.
“마수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어요.”
대마수의 규모가 10이라면 현재 대열을 갖춰 서부로 진격하는 마수가 3, 방향성 없이 흩어지는 마수가 7이었다
밀레나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수를 쳐냈다. 조직성을 잃은 마수들이라 대처하기 쉬웠다.
엔엔과 등을 맞대는 것으로 사각지대를 없애고, 주변을 정리했다.
정신없이 조종하다가 문득 미간 쪽으로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내렸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코피가 멎을 생각을 안 했다.
-밀레나.
“괜찮아. 피곤해서 그런 거야.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아니요.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과부하가 찾아왔어요.
“예정보다 빠르잖아.”
-무리했으니까요.
비앙크.
이전 사용자가 길리우드라 추정되는 물건.
인류의 끝을 수없이 목격한 인간이 곁에 두고 사용한 레거시인 만큼 성능이야 증명되고도 남았다.
-밀레나의 몸은 중계기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마나를 물체화 하는 과정에서 밀레나의 심상 세계가 소모되고요. 인간의 심상 세계는 영구하지 않아요. 무리를 가하면 망가지고 말죠.
“그걸 제어해 주는 게 너잖아. 난 널 믿어.”
-물론 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제 유능함을 마음껏 발휘해서 밀레나를 돕고 있고요. 하지만 한계는 명확해요.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저기까지 가야 해.”
밀레나는 산 아래쪽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지긋지긋하게 봐왔던 전쟁터.
그곳으로 뛰어들어 반대편에 있는 르완 용병단과 합류해야 했다.
쿵!
체임버 덮개로 엔엔이 올라탔다.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기도 전에 덮개가 열렸다.
“……밀레나.”
엔엔이 눈을 얇게 뜨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아니요. 안 괜찮아요. 카트시 말이 옳아요.”
“이틀은 더 움직일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직 멀쩡해요! 그러니…….”
말하는 도중에 시야가 흔들렸다.
인지 통합이 풀리는 순간 몸 상태가 엉망이 됐다.
-밀레나. 제 서포트 없이는 지금 몸조차 못 가누는 상태예요.
힘겹게 손을 들어 코를 닦아냈다.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엔엔이 다가와 천을 코 밑에 대주었다.
“숙이고 있어요. 금방 멎을 테니까.”
“저쪽으로 가야 해요.”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잠깐 쉬어요.”
밀레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움직이는 마수는 없었다. 멀리서 가끔 소리만 들려올 뿐.
“이 방향으로 오는 마수는 없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그러면 잠깐만 쉴게요.”
벨트를 풀자마자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몸을 지탱할 힘조차 없었다.
엔엔이 다가와 부축해 줬다.
“일단 밖으로 나와요.”
거병에서 내렸다. 굳건히 서 있던 비앙크가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엔엔과 함께 절벽으로 걸어갔다.
전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르완 용병단은 훌륭하게 방어해 내고 있으나, 좌우로 넓게 퍼진 마수들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신체술을 사용해 도시 쪽 상황도 보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나를 끌어당기려고 하니 몸이 비명을 질렀다. 육안으로는 저 멀리 있는 것들을 확인할 수 없었다.
“엔엔 님, 도심 쪽은 어떻죠?”
“불길이 계속 솟고 있어요. 상황이 조금 이상해요. 마수가 침투하긴 했으나 아직은 외곽이에요. 그런데 불길은 도시 중심지에서 계속 퍼져나가고 있어요.”
“그렇다는 건…….”
“내부에서도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방위군이 안 보이는 이유.
외곽에서 밀려드는 마수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대마수.
중심지에서 시작된 불길.
절대 우연일 리 없었다.
“게웰의 계획일까요?”
“밀레나는 직접 접촉했으니 나보다 더 잘 알겠죠. 게웰은 뚜렷한 언어를 구사하고, 타 생명체에게 거래를 제안할 정도로 문화권을 이해했어요.”
“거기에 성장까지 했겠죠.”
“대마수가 국경을 영토 삼아 멈춰 있던 게 근 3년이에요. 아니, 그보다 오래됐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인식하기 전부터 이곳에 모여 있었을지도 모르니.”
엔엔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그곳에는 높이 40m의 거대 마수가 있었다.
달려드는 작은 마수들을 지켜보는 듯한 모습.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직감이 들었다.
저게 게웰이라고.
“그 시간 동안 게웰이 무엇을 준비했는지, 우린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기에 당한 거겠죠.”
“연합 도시도 방비는 했을 거예요.”
“했겠죠. 단지 게웰이 한 수 더 내다본 걸지도 몰라요. 그 결과가 지금 우리 눈앞에 있고요.”
도심지를 공략했다.
마수를 사용했을 리 없다. 마수가 보였다면 즉각 반응해 대처했을 것이다.
대처도 못 하고 심장부를 내줬다는 건…….
“성도 테러 때와 동일해요.”
“성도 테러? 아,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있었던 사건 말이군요.”
“네. 그때도 성도 내부에서 괴물이 나타났어요. 마수도 아닌, 인간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것들.”
“그렇다면…….”
밀레나는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당시에 경험한 것들은 머리가 아닌 몸에 각인돼 있었다. 비명, 무너진 건물, 부상자들, 널브러진 시체, 그리고 폭사해 주변을 날려버린 괴물들.
“자세한 건 듣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계’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밀레나가 몸담고 있는 협회 쪽 이야긴가요?”
“네. 만약 그런 거라면 대비할 수 없었을 거예요. 멀쩡한 인간이 괴물로 변했을 테니.”
마른기침이 나왔다. 엔엔이 등을 쓸어 내려줬다.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밀레나를 보고 있으면 그럴 수 없었어요.”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한 거니까.”
코피가 멎었다.
흐릿했던 시야도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쉬면 다시 비앙크를 조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나 포집이 가동 중일 테니, 예상 기동 시간은 4시간 정도 되려나.
피 묻은 천을 손에 쥐며 도시를 바라봤다.
연합 도시 어딘가에 가하란이 있다.
그 애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몸이 좀 망가지면 어때? 그 애는 날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게웰 안에 있던 날 끄집어내 주었다.
만나야 한다.
해야 할 말이 많았다.
여기서 멈춰 있을 시간이 없다.
후, 하고 숨을 다잡았다. 허리를 감은 엔엔의 팔을 떼어내고 몸을 곧게 폈다.
“가죠.”
“밀레나.”
“움직일 수 있어요.”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밀레나는 눈을 찡그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저거…….”
엔엔이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해더 트럭이네요. 뒤에 단 트레일러는 뭔지 모르겠지만.”
“휘청휘청하네요.”
구불구불한 지형을 불안하게 나아가던 해더 트럭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도시 쪽이 아닌 전장 외곽을 향해.
“위험해 보이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더 트럭 쪽으로 몰려가는 마수가 보였다.
숫자는 셋. 소형 마수라 달리는 해더 트럭에게 덤비지는 못했으나 멈추는 순간 위험해질 것이다.
해더 트럭의 곡예 운전이 시작됐다.
곳곳에 있는 균열을 피하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꼬리를 쫓던 마수들이 이내 지쳤는지 머리를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걸까요?”
“글쎄요. 그냥 방향을 잘못 든 것 같기도 한데.”
하긴, 도시로 진입하려다가 도시가 엉망인 걸 보고 놀랐을 것이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트럭을 살필 때였다.
“음.”
이번에는 엔엔이 손을 올렸다.
마나 폭발에 휩쓸렸던 거병 한 대.
진즉에 후퇴해 용병단과 합류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기동력을 잃은 걸까?
도와주고 싶으나 거리가 멀었다.
밀레나는 시선을 내렸다.
국경 근방에서 대기 중이던 마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장을 휩쓸었던 중소형 마수가 아닌 대형 마수들로 꾸려진 집단.
중장갑 타격대로 전선을 뒤흔들고 거병으로 전선을 밀어낸다.
인간의 전쟁 방식을 마수가 수행하고 있었다.
우어어어!
지면을 쓸고 하늘을 덮는 육중한 울림이 퍼져나갔다.
마수 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는 순간 알았다.
이건 막아낼 수 없다.
저지하려면 타리움의 오라클 부대처럼 원거리 대응이 가능한 거병이 진을 치고 있어야 하는데…….
“늦은 것 같네요.”
엔엔이 말했다. 밀레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퇴각해야 한다.
도시를 내주고 집결 수도의 지원을 기다리며 전력을 보존하는 게 현명해 보였다.
르완 용병단도 모이고 있었다. 엄마라면 전황의 변화를 눈치채고 후퇴를 명령할 것이다.
“기기 고장인 것 같아요. 아니면 이성을 잃었거나.”
엔엔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전장 한가운데 있는 거병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가 아닌 마수 떼가 진군하는 곳으로.
밀레나도 눈을 찌푸렸다. 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동료를 잃은 상태에서 밀려드는 적을 봤으니 머리로 피가 쏠렸을 것이다.
덧없는 죽음이라고 매도하기 싫었다. 전장에 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기분이니까.
그래도…….
“살아야 하는데.”
씁쓸한 느낌을 받으며 전진하는 거병을 응시할 때였다.
거병의 체임버 덮개가 활짝 열렸다.
안에서 조종자가 뛰쳐나왔다.
뭐 하는 거지?
거병을 버리다니!
기사를 잃었으니 오토마타가 정지하고, 자세 제어가 불가능한 거병은 꼬꾸라…….
“어떻게?”
밀레나는 상체를 앞으로 빼며 말했다.
넘어져야 할 거병이 완벽하게 자세를 제어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