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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41화 (441/558)

제441화

균열 끝자락에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비앙크의 몸이 날아올랐다.

뒤따라오던 마수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균열 아래로 추락했다. 두 녀석은 이빨을 드러낸 채 계속 추적해 왔다.

“여기서 정리하고 가죠.”

엔엔이 말함과 동시에 나무를 박차며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밀레나도 조종간을 붙잡아 당겼다. 비앙크의 발이 지면을 긁으며 정지했다.

우우웅, 응집된 마나가 소리를 냈다.

“카트시, 앞으로 몇 분이나 움직일 수 있어?”

-11분 30초. 방금 29초.

“여유롭네.”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양쪽 손목을 두 번, 툭툭 털었다. 비앙크의 양팔이 스멀스멀 녹으면서 기다란 꼬챙이로 변했다.

-그 형태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베어내는 것보다 이게 낫거든.”

다시 조종간을 붙잡았다. 전방 시야에 카트시가 제공한 정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쪽 지면은 조심해요. 착지 때 보니까 지반이 약해요. 비앙크가 가볍다고 해도 잘못 디디면 움푹 꺼질 거예요.

붉게 표시된 영역을 기억해 두며 거병을 움직였다. 비앙크의 발이 경쾌하게 나아갔다.

경계하던 마수 두 마리가 동시에 뛰어들었다.

훤히 드러난 하복부를 향해 팔을 찔러 넣었다. 마수가 공중에서 몸을 틀었다.

숨겨둔 재주였지만, 밀레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조종간에 올린 손바닥을 힘껏 펼친다.

사아아아!

기병창의 모습을 갖췄던 팔이 갈라졌다. 풍차의 날개처럼 펴진 팔로 공중에 있는 마수를 긁어버렸다.

촤악, 잘게 분해된 마수가 측면으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다.

공격을 피한 다른 한 마리가 머리를 틀며 도망치려 했다.

“엔엔 님, 맡길게요!”

공중에서 떨어진 엔엔이 마수의 등을 찍었다. 칼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뭉툭한 날이 마수의 몸을 으깨버렸다.

“…….”

엔엔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유야 뻔했다. 곱게 손질한 털에 피가 튀었으니 속이 상했을 것이다.

-이제 안전해요. 적어도 제 탐색 범위 내에는 마수가 없어요.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젖은 숲의 향이 먼저 다가왔고, 뒤이어 비릿한 냄새가 코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것 좀 치울게요.”

마수 시체를 들어 근처 균열에 버렸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수를 확인한 다음 엔엔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엔엔은 개울에 앉아 털을 닦아내고 있었다. 킁킁거리며 팔 쪽 냄새를 맡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욕을 매일 못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운데.”

“어쩔 수 없죠.”

밀레나는 거병에서 뛰어내렸다.

잠시 후, 형태를 유지하던 순백의 팔과 다리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팔다리를 휘감았던 외장갑이 질서정연하게 맞물리며 어깨와 골반 쪽에 붙었다.

몇 달째 보고 있는 거지만 여전히 작동 원리를 알 수 없었다. 마법으로 이뤄진 비앙크의 팔. 거기에 반응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외장갑.

칼랑의 기술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죠.”

삽으로 지면을 얕게 파는 동안 엔엔은 마른 잎을 모아 왔다. 얕은 구덩이에 잎을 채워 넣고 사이사이에 발열제를 던져 넣었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 잎과 반응한 발열제가 뭉근한 열기를 뿜어낼 것이다.

천으로 덮고 위에 천막을 세웠다.

“카트시. 이쪽 마나 상태는 어때?”

-마나 포집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어요. 내일 오전 11시쯤이면 기동에 필요한 마나를 확보할 수 있어요.

“알겠어.”

기지개를 켠 후 천막으로 들어갔다. 엔엔이 반쯤 누운 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일지 쓰세요?”

“안전 루트가 될지도 모르니 꾸준히 적어놔야죠.”

“대마수 근처에 도달했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요. 조금만 이동해도 온갖 이상한 것들이 뛰쳐나오고. 강 건너 국경 지대까지 두 달 거쳐 돌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동 속도를 올리고 싶지만, 위험 부담이 커지니 어쩔 수 없죠. 사실 대마수에 접근한 것만으로도 목숨을 반쯤 내놓은 거고요.”

밀레나는 침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몸이 나른했다. 비앙크에서 내리고 나면 지독한 무기력증이 뒤따랐다.

뒤척이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다.

“점차 나아지고 있네요. 연습 기간에는 내리자마자 쓰러졌으니.”

엔엔이 말했다.

“반년간 고생한 덕분이죠. 지금 생각해도 거기서 반년이나 보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비앙크가 아닌 다른 거병이었다면 진즉에 떠났을 텐데.”

“유일무이한 마나 형상화 거병. 비앙크였기에 여기까지 온 거니 반년이 긴 시간은 아니에요.”

엔엔이 천막 밖을 보며 말했다. 밀레나도 시선을 옮겼다. 우두커니 지면에 박혀 있는 비앙크의 몸체가 보였다.

“상황이 예상했던 것보다 안 좋았죠. 국경이 이 지경이 됐을 줄은…….”

“밀레나가 용병을 구해 움직였으면 분명 죽었을 거예요.”

“포기하고 도망쳤으면 살 수도 있겠지만, 제 성격상 그러지 않았겠죠. 엔엔 님 말대로 무리해서 돌파하려다가 허무하게 끝났을지도 몰라요.”

두 달간 경험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일반 거병으로는 변화한 대마수를 뚫어낼 수 없다.

전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잦았다. 일반적인 거병이었다면 각 모듈이 망가지고 교체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해 결국 폐기했을 것이다.

반면 비앙크는 구동계가 마나로 구현되기에 마나만 보급해 주면 반영구적으로 기동할 수 있었다.

변환 장치인 레거시, 비앙크가 담긴 몸체만 지켜내면 거병의 고질적인 문제인 내구성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물론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마전기를 포함한 마나를 끔찍할 정도로 소모한다는 점이다.

카트시의 마나 포집으로도 한계가 있어 반나절을 움직이고 나면, 반나절은 쉬어야 했다.

국경 돌파가 더뎌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밀레나! 밖으로 나와봐요. 별이 예뻐요.

“어제도 봤어!”

-어제의 별과 오늘의 별은 달라요.

“같을걸?”

-그렇게 안에서 대답만 하지 말고 얼른 나와요. 엔엔도 같이 오고요.

밀레나는 픽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소중한 파트너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른한 몸을 이끌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어둑해진 하늘에 총총 별이 박혀 있었다.

“어제랑 같네.”

-조금은 달라요.

“매일 보는데도 그렇게 좋아?”

-그럼요.

몸이 으스스했다. 카트시가 체임버를 열어줬다. 안으로 들어가니 온기가 몸을 감쌌다. 마전기로 생성해 낸 열이었다.

“포집에 방해되는 거 아니야?”

-이 정도 열량 변화는 괜찮아요. 근데 많이 추워요?

“알잖아. 비앙크를 다루고 나면 몸이 늘어진다는 걸. 신체 리듬이 바닥을 기는 느낌이야.”

-계속 적응하면 언젠가는 부작용 없이 타게 될 거예요. 비앙크, 위험한 물건이지만 제대로 다루면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

밀레나는 작게 웃었다.

-왜요?

“아니, 그때가 기억나서. 칼랑족 부지에서 떠나기 전 비앙크에 제어 장치를 달려고 했잖아.”

-그랬었죠. 그 어떤 유사 정령으로도 비앙크의 마나 흐름을 통제할 수 없으니, 그 조잡한 장치를 꼭 달아야 한다고 난리였죠.

“그러다 엔엔 님이 널 가져와서 단번에 제어하는 걸 보여줬잖아. 그때 그분들 얼굴이 말이 아니었어.”

-저도 기억나요. 절 뜯어보기 위해 털북숭이들이 슬금슬금 다가왔죠. 지금 생각하면 오싹하는데, 그게 웃겨요?

“난 웃겼어. 그 뒤에 그분들이 엔엔 님을 붙잡고 늘어졌잖아. 일족을 위해 제작 기법을 밝혀야 하느니, 어쩌고저쩌고.”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길게 뽑혀 나와 천막을 향했다.

-엔엔이 막아설 땐 조금 감동이었어요.

“감동까지 했어?”

-그럼요. 털북숭이들은 예전부터 기술에 미쳐 있어서 물불을 안 가렸어요. 문제도 자주 일으키고. 그런 털북숭이가 절 감싸다니.

“난 엔엔 님만 봐와서 그런지 칼랑족이 모두 얌전하고 친절하고, 때론 부끄럼쟁이인 줄 알았어.”

-전혀요! 그들은 포악하고 냄새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더 큰 문제는 지독한 개인성마저 뭉개버리는 혈족 우선주의고요.

“까다롭긴 했지.”

밀레나는 팔짱을 끼며 몸을 웅크렸다. 한기가 가시면서 졸음이 찾아왔다.

-절 위해서 일족하고 등을 졌으니 이제는 인정해요. 뭐, 예전부터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깔끔하고 상냥하고.

뒤늦게 엔엔이 천막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칭찬해 주지는 마요. 콧대가 높아질 수도 있으니까.

“사이좋게 지내.”

하암, 짧게 하품이 나왔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자요.”

엔엔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지금은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자면 허리 아파요.”

“알지만 도저히…….”

밀레나는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찔한 감각이 등을 훑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기감.

느낀 건 혼자만이 아니었다. 엔엔도 낯빛을 굳힌 채 밖을 훑고 있었다.

“뭐죠?”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일어나고 있어요.”

“카트시, 탐색 된 거 있어?”

-잠깐만요.

은은한 파장이 퍼져나갔다. 카트시의 침묵이 길어졌다. 문제가 없다면 금방 입을 열었을 것이다.

-이동하고 있어요.

“뭐가?”

-아무래도, 마수들인 거 같아요.

‘들’이 몇 마리를 뜻하는지 되묻지 않았다.

날카로운 울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잠들어 있어야 할 동물들이 숲속에서 뛰쳐나와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동 방향은 동쪽.

대마수와 멀어지고 있다.

“예비용 배터리를 쓰자. 이동해야겠어.”

후면 적재함에 넣어둔 배터리를 꺼내 체임버 밑 배터리실에 넣었다. 커넥터를 연결하고 체임버에 올라탔다.

“먼저 가서 길을 확인해 볼게요.”

엔엔이 움직였다.

“카트시.”

-준비됐어요.

비앙크의 팔과 다리를 뽑아냈다. 짙게 깔린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멀리, 거대한 마수들이 보였다.

성벽을 이루듯 쌓여 있는 마수 무리.

대마수.

자잘한 움직임 없이 동산처럼 버티고 있던 놈들이 이동을 시작했다.

-서쪽으로 이동 중이에요.

“연합 도시가 목표인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요.

퀴에엑!

바닥을 뚫고 지네처럼 생긴 마수가 튀어나왔다. 비앙크의 팔로 몸체를 붙잡아 뽑아냈다.

-셋, 아니, 다섯.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균열 사이에서도 마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마수와 가까워졌다는 게 체감됐다.

사방이 마수였다.

그야말로 지옥.

전투가 이어졌다.

베고, 으깨고, 짓밟고, 터트리고.

충혈된 눈으로 주변을 훑다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해가 머리 위에 있었다. 정신없이 육탄전을 벌이다 보니 날이 샌 것이다.

-밀레나, 괜찮아요?

“버틸 만해.”

코로 숨을 쉬다가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으로 훔치니 피가 묻어났다.

-쉬게 해드리고 싶지만, 지금은 움직여야 해요.

“알고 있어.”

밀레나는 오른쪽에 있는 엔엔을 바라봤다. 보들보들한 회백색 털이 핏물에 절어 축 눌어붙어 있었다.

비앙크의 몸체도 오물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엔엔 님, 움직일 수 있죠?”

“이틀 정돈 더 움직일 수 있어요. 밀레나는요?”

“저도요.”

숨을 돌리기 무섭게 건너편에서 마수가 나타났다.

다시 시작이네, 조종간을 붙잡을 때였다. 마수들이 덤벼들지 않고 흩어졌다.

훈련된 군인처럼 조직성을 갖춰 공격하던 놈들이 겁먹은 개처럼 자취를 감췄다.

“밀레나.”

“저도 느꼈어요. 뭔가 바뀐 거 같죠?”

대열을 맞춰 이동하던 거대한 마수 중에서도 이탈하는 놈들이 생겨났다.

성벽 같던 대마수에 구멍이 생겨났다.

엔엔과 함께 전진했다.

동부를 벗어나 서부 영토에 들어섰다.

연합 도시의 땅.

산맥 아래로 너른 평야가 보였다.

그리고.

“안 돼.”

평야를 덮으며 마수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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