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훈련조차 안 받은 꼬마가 이런 살상력을 지녔어. 자기한테 어떤 힘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텐데 말이야.”
-맞아요. 내포된 마나를 분출조차 못 시켰어요.
해피가 맞장구쳤다.
“만약 이렇게 변한 사람이 군인이라면…….”
“도심이 왜 아직도 저 지경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네.”
필렌이 검을 세게 털었다. 잔여물이 후드득 떨어져 나가며 말끔한 검신을 되찾았다.
“애들 모아서 가야겠다. 협조문을 띄워야 하는 놈들이 죽은 것 같으니.”
“저도 갈게요.”
잠든 아이들을 깨워 준비시키려 할 때였다.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보였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아저씨.”
힘차게 도약한 타챠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가 풀풀 솟아났다.
“왜 그렇게…….”
가하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나 여유로운 타챠의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필렌.”
“무슨 일 있구나.”
“오고 있다.”
뭐가 오고 있는지,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타챠는 대마수를 관찰하고 있었으니까.
가하란은 고개를 빼 대마수가 있는 국경을 바라봤다. 아직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몇이나 움직인 거죠?”
“내 시야에 들어온 것만 수백이었다.”
수백 마리의 마수.
가하란은 겹침 세계에서 겪은 일을 떠올렸다.
하늘석이 추락하고, 추락 지점으로 몰려들던 마수들.
수백 마리의 마수들 사이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건 견고한 격납고 덕분이었다. 그 어떤 마수도 합금철로 된 벽을 뚫어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여긴 평야에 세워진 도시였다. 지리적 이점은 없으며 지켜내야 할 인적, 물적 자원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수백, 어쩌면 수천의 마수가 일시에 마을로 들이닥친다면?
“게웰. 준비를 아주 잘했네.”
필렌이 씨근덕거리며 본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손에는 확성기가 들려 있었다.
“집합!”
사방으로 퍼져 있던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여들었다. 제압된 반마법공학 쪽 사람들이 필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릴 놓아주지 않으면!”
필렌이 손가락으로 입을 연 여자를 가리켰다. 곁에 있던 용병이 발로 여자의 머리를 후려 찼다. 여자가 꼬꾸라지자마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필렌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말단일 테니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물어볼게. 오늘 이 일을 기획한 건 누구지?”
“우, 우린 이곳의 시민이야. 동부의 개들이 우릴 건들면…….”
입을 열었던 남자의 턱이 들렸다. 필렌은 왼발을 툭툭 털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너희들 아는 거 없지? 그냥 위에서 하라니까 한 거지?”
“네, 네. 저희는 그냥 오늘 여기서 불만 지르면 된다고 해서 했어요.”
“그럴 거야. 자기들이 뭔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일단 저질렀겠지.”
테러와 동시에 대마수가 움직였다. 거병의 집결지나 다름없는 정비소와 제조소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인근 정비소는 큰 타격이 없는 것 같으나, 초반에 불길을 못 잡은 곳은 전소했을 것이다.
마수를 상대해야 할 거병이 몇 대나 줄었을까.
가하란은 안쪽 공방으로 갔다.
서둘러야 했다.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트레일러로 가 덮개를 열었다.
마나 포집을 가동하고 비상용 배터리를 장착시켰다. 사흘간은 별도의 에너지 공급 없이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일?
슬리피였다. 만사 귀찮아하는 아이지만, 눈치는 가장 빨랐다.
“너희들이 필요해.”
-어떤 쪽?
“전투.”
-어느 정도의 수준?
“너희가 배운 걸 전부 다 써야 할지도 몰라.”
-디졸브 필드도?
“어.”
-시뮬레이션 계속 해놨어. 장치에 문제가 없다면 생성 가능할 거야.
“미세 조정은 너한테 맡길게.”
-아빠는 날 믿어?
“믿게 해줘.”
-어쩔 수 없지. 할게.
트레일러에서 뛰어내린 소형 거병이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완전 기동까지 시간이 걸려. 미니 비트 내에서 의식 점검 중인 애들도 있고.
“최대한 빨리 깨워줘.”
-알겠어. 대신 오늘 일한 만큼 푹 잘 거야.
“원 없이 자게 해줄게.”
가하란은 트레일러 속 다른 거병들을 바라봤다.
줄리어스는 비트의 가닥을 이용해 연결망을 만들었다.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가하란 역시 ‘미니 비트’라는 중단거리 통신 체계를 개설했다.
지금은 대역폭이 불안전해 트레일러를 기지국 삼아야 하지만, 온전한 비트와 맞닿을 수 있게 된다면 반경을 전 대륙으로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머니페니들은 여전히 거부하고 있어?
“내부 통신 시설은 극비니까.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리가 났었어.”
-그냥 좀 보여주지. 비트에 접근할 방법은 여전히 은행뿐이야?
“지금은.”
-나야 상관없지만, 다른 애들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어 해. 가지가 아닌 뿌리를 말이야.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여느 때처럼 도도하게 떠다니는 하늘석이 보였다.
“저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준비!”
필렌의 외침이 귀를 때렸다.
가하란은 소형 배터리를 챙겨 허리 주머니에 잔뜩 꽂아 넣었다.
“애들 깨우고 분사체 준비해 줘.”
-알겠어.
소형 거병이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 작업은 애들한테 맡기면 될 것이다.
“해피!”
거병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체임버 덮개가 열리며 해피가 상체를 숙였다.
가볍게 발을 굴러 체임버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지대에 발을 올리고 좌측 가시화 패드를 바라봤다.
“마나 포집 가용량을 최대치로 올려.”
-시스템이 발각될 위험성이 있잖아요.
“지금은 괜찮아.”
-그러면 대역폭 넓힐게요! 기분 최고야!
활동 한계 시간이 늘어났다. 최대 출력으로 작전을 수행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디졸브를 사용하게 될지도 몰라.”
-그거 미니 비트에서 계속 시뮬레이션해 봤는데, 분사량이 728pm에 도달하면 애들은 멈출 거예요. 저야 아빠가 외력으로 붙들면 괜찮겠지만.
“실전은 다를지도 몰라.”
체임버 덮개를 닫았다.
시동키를 통한 인지 통합을 중단하고 하부 커넥터를 꺼냈다. 의족 측면에 커넥터를 연결하고 숨을 짧게 토해냈다.
“해피.”
-네.
“연결해.”
-초대할게요!
왼쪽 착안이 의지와 상관없이 열렸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비트의 가닥들이 느껴졌다.
유사 정령의 서포트를 받는 인지 통합이 아닌, 베이스 아키텍처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직결.
자잘한 목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슬리피, 배쉬플, 그럼피, 닥, 스니지, 도피.
그리고.
-오셨어요?
해피의 강렬한 음성이 귀를 꿰뚫었다.
-왔네.
슬리피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른 애들도 한마디씩 던지고는 자기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체임버 안에 있었으나, 앞에 보이는 건 광활하게 펼쳐진 하얀 배경이었다.
그 안에서 꼬물거리는 작은 덩어리들. 가하란이 빚어낸 유사 정령들이었다.
“이건 몇 번을 해봐도 적응이 안 돼.”
-너무 오래 있지는 마. 뇌가 녹아서 없어질 수도 있어. 아빠의 뇌가 대단하다고 해도 연산을 지속하면 위험해.
슬리피가 경고한 뒤 사라졌다.
가하란은 뺨을 툭툭 쳤다. 시점이 바뀌었다. 체임버 안쪽이 보인다. 동시에 거병이 시각 장치로 받아들인 정보가 뇌로 흘러들었다.
-신체 반응 안정화됐어요. 근데 체온이 살짝 올랐네요.
“맥박은?”
-정상. 아빠 기분은 어때요? 수치보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요.
“아주 좋아. 연결성에 문제는 없네.”
-그러면 미니 비트 유지한 채 움직여 볼게요. 감도는 이 정도면 될까요?
해피가 거병의 팔을 움직였다.
“좋아.”
-지연은 없고, 감도 좋고. 아빠도 그냥 이쪽으로 아예 이사하는 건 어때요? 육체는 불안정하잖아요.
“그건 나중에 고민해 볼게.”
가하란은 조종간에서 손을 뗐다.
의식하에 거병이 제어되겠지만, 예상 못 한 변수가 발생하면 해피가 개입할 것이다.
목을 가볍게 움직였다. 시야 변화가 매끄러웠다.
트레일러에서 거병용 장비를 챙겼다.
용로를 때려 박은 양날 도끼에 대형 배터리를 장착했다. 점검 삼아 가동해 봤다.
거대한 날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조심해요. 그거에 닿으면 제 부드러운 살도 잘리니까요.
장비 세팅을 마친 후 몸을 돌렸다.
르완의 거병들이 대열을 맞춘 채 서 있었다. 선두에 선 타챠가 창대를 움켜쥐며 튀어 나갔다.
거병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 양반은 혼자 날뛰게 내버려 두고, 우린 2차 방책을 기점으로 수비한다. 전방위를 막을 순 없어. 우리한테 오는 놈들만 확실하게 쳐낸다.”
“대장. 숫자가 장난이 아닌데요?”
용병의 말에 가하란도 시선을 멀리 던졌다.
타챠가 향하는 곳.
수십 마리의 마수가 떼 지어 밀려들고 있었다.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도 마수들이 보였다.
다시 50m.
마수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을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
정돈된 진군이었다.
지휘관이 있다는 소리고, 그건 아마도 게웰일 것이다.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
다른 위상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생명을 보존했던 마수가, 또다시 대군을 갖춰 오고 있었다.
일시적인 도발이 아니었다.
놈들은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
도심지에서 일어난 폭발 역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게웰에게 속은 인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래한 인간이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마수와 엮인 인간이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무리하지 마라. 지키는 건 방위군 일이니까. 우리한테 덤비는 놈들만 쳐내.”
필렌이 거병에 올라탔다.
날렵한 탈로스 위로 은빛 외장갑이 내려앉았다. 최소한의 방어구만 두른 속도 중시형 거병.
“안 그래도 통장 잔고가 아슬아슬했는데, 돈다발이 뛰어오네요.”
“저희 먼저 갑니다.”
왼쪽에 줄지어 서 있던 거병들이 움직였다. 거대 작살이 실린 트레일러도 같이 이동했다.
-가하란.
필렌의 목소리가 음성 장치를 통해 나왔다.
-합류할 거냐?
“전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실험해 볼 것도 있고요.”
-그래. 이탈 지점은 여기가 아닌 파트론 제조소다. 거기도 당했으면 마을을 버리고 산개해서 재집결한다.
“알겠습니다.”
르완의 모든 용병이 움직였다.
개활지 전투에 특화된 사냥꾼들.
가하란은 안쪽 공방으로 뛰어갔다.
“준비는?”
-끝났어. 분사체 장착도 완료했어.
슬리피가 디졸브 필드 생성기를 트레일러에 싣고 있었다.
“해더 트럭 운전은 일단 내가 할게. 해피, 인지 통합을…….”
-그건 괜찮아. 적임자가 있어.
슬리피가 손을 들어 올렸다. 차고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중형 해더 트럭이 바퀴를 굴리며 나타났다.
운전석에 타고 있는 건 웍센이었다.
“저걸로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원하는 곳까지 내가 옮겨다 주마.”
“위험해요.”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아! 그리고 여차하면 얘네들이 날 지켜줄 테니 여기가 더 안전하지.”
-정확한 판단이야.
슬리피가 박스에 올라탔다. 다른 소형 거병들도 몸을 실었다.
-이격도 계산은 내가 할게. 원하는 위치만 말해줘. 시스템 세팅까지 12분 정도 걸릴 거야. 범위가 넓어지면 더 걸릴 거고.
트레일러를 이끈 해더 트럭이 멀어져 간다. 배쉬플의 감지 능력이라면 마수를 피해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바탕하러 갈까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
“단어가 무서운데.”
-누굴 보고 배웠겠어요? 아빠가 사냥하는 모습은 더 잔인해요.
캬아악,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격돌이 일어난 것이다.
혼란이 개활지를 덮쳤다. 가하란은 주변을 살핀 후 움직였다.
“일단 저쪽부터.”
2차 방책을 넘어 정비소로 향하는 마수들이 보였다.
-갈게요!
해피가 활기차게 말하며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