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38화 (438/558)

제438화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안쪽 공방은 목조 건물이라지만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이상했다.

“기계로부터 해방을! 자유를!”

목 놓아 외치던 사람들이 장비를 챙겨 도주했다.

가하란은 치솟는 불길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기름이 아니었다. 끈적한 점액질에 옮겨붙은 불은 발로 비벼도 꺼지지 않았다.

“가하란!”

뒤따라온 웍센이 얼굴을 가리며 외쳤다. 열기가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뒤로 물러서 계세요!”

“어쩌려고!”

“외벽 전체를 뜯어내야겠어요.”

가하란은 크게 해피를 불렀다. 공터에 앉아 있던 거병이 쿵쿵 소리 내며 다가왔다.

-불놀이예요?

“아니!”

-예쁜데.

화르륵!

불길이 거세졌다. 가하란은 우측 벽면을 떼어내라고 지시했다.

-조심해요!

콰드득, 격자로 엮은 측면부가 뜯겨 나오며 공방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건물 뼈대가 안쪽으로 들어온 형태라 측면부를 치워내도 살짝 기울 뿐 주저앉지는 않았다.

“외곽 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어요! 다른 정비소도 당했어요!”

본관 옥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이 주변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미친놈들. 결국에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구만.”

웍센이 불타는 외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마법공학. 그쪽 사람들이겠죠?”

“확실해. 매번 외치는 지긋지긋한 구호까지 남기고, 아주 작정한 듯하구나.”

“이 정도로 거칠게 나온 적이 있었나요?”

“전혀! 정도라는 걸 아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콰아아앙!

멀리서 폭음과 함께 불꽃이 치솟았다. 도심지에서도 일이 터진 듯했다.

에단이 움직였다. 단짝인 매가 따라붙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향하는 듯했다.

-이거 봐요! 안 꺼져요.

해피가 양손을 흔들었다. 옮겨붙은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내열성이 뛰어난 외장갑이니 문제 될 건 없지만.

“움직일 준비 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다.”

필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병들이 무장하고 각자의 기체에 올라타고 있었다.

-꺼졌다.

해피가 땅속에 박아 넣었던 손을 뽑아냈다. 흙 속에서 지글지글 끓던 불꽃이 점차 사그라졌다.

“이게 사람 몸에 뿌려졌으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한 걸까?

“저쪽도 얼추 정리된 모양이다.”

치솟던 연기가 사라졌다. 건너편 정비소도 불길을 잡은 모양이다.

“정비소 쪽은 아까 그놈들이 불만 지른 것 같은데.”

“문제는 중심지네요. 아무래도 제조소 같은데.”

꽤 큰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붉은빛이 마을 중심지를 덮었고, 연기가 그 위로 춤을 췄다.

구호만 외치며 자기 사상을 입으로만 전하던 이들이 왜 갑자기 과격 단체가 된 걸까.

가하란은 용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주변에서 얼쩡대는 놈들 붙잡아. 저항하면 손목 하나 날려주고. 방위군에서 협조 요청 오기 전까지 도심은 신경 꺼.”

“비상 상황인데 대충 무시하고 거병으로 밀고 들어가죠?”

“괜히 오해받을 짓 하지 마. 우릴 고깝지 않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많으니까.”

필렌의 지시가 떨어지자 용병들이 정비소를 떠났다.

지금이야 마수 사냥을 주로 하고 있지만, 저들의 본업은 전쟁 지원이었다. 주변 일대는 금방 정리될 것이다.

“무너질 염려는 없겠지?”

필렌이 안쪽 공방을 보며 물었다.

“네. 문제없어요.”

“네 물건들은?”

“툴 몇 개랑 작업대에 둔 패널이 탔어요.”

“얼굴 보니 중요한 건 아닌 듯하네.”

필렌이 도심 쪽을 바라봤다.

“저쪽 정치 구도를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핵심 시설에 타격을 줄 정도로 내몰린 쪽은 없을 텐데.”

“수비 요충지니 더더욱 건들면 안 되고요.”

“내 말이. 길드가 뒤를 봐주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쇼. 제조소를 압박해 돈을 뜯어내는 게 목적일 텐데…….”

필렌이 담배를 하나 물었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뭐지? 지도부에 정신병자가 하나 끼어 있어서 통제가 안 된 건가?”

“내부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이가 없긴 해요. 아까 공방에 불 지른 사람 중 한 명은 의족을 달고 있었거든요.”

“반마법공학. 기계는 없어져야 하지만, 내 편의를 위한 장치는 눈감아야 한다는 건가. 미친 새끼들.”

필렌이 입에 문 담배를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평화가 길긴 길었지. 좀 쑤셔서 나대고 싶어 하는 놈들이 나타날 때도 됐어.”

붉은빛이 한층 더 짙어지고 있었다.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애들 데리고 다녀올게요.”

“애들? 꼬맹이 거병?”

“네.”

“그거 외부에 공개하기에는 이르지 않아?”

“구조 작업에 유용할 거예요. 일반 거병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곳도 갈 수 있으니.”

“그 고생을 하고도 착해빠진 건 변하질 않는구나. 뭐, 덕분에 내 딸이 목숨을 구했지만.”

살며시 웃던 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하란도 뒤쪽을 바라봤다.

남자아이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불안해 보였다.

필렌이 먼저 움직였다.

“꼬마야. 정신 차려 봐.”

뺨을 툭툭 쳐도 반응이 없었다. 앞을 막아서도 계속 발을 떼며 앞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가하란은 몸을 숙여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보였다.

“상태가 안 좋아 보여요.”

“이쪽엔 의술사가 없어. 중심지로 가야 있는데…… 지금 가는 건 위험해.”

쿠우웅, 묵직한 소리가 땅을 타고 퍼졌다. 소란이 잦아들긴커녕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방위군은 뭐 하는 건데?”

필렌이 탐탁잖은 목소리를 냈다. 가하란은 고개를 돌려 도심지를 바라볼 때였다.

어깨를 붙들린 아이가 움찔했다.

“정신이 들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눈동자가 빛을 되찾았다.

“많이 놀랐나 보네. 이제 괜찮아.”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붙였다.

“혼자 있는 거야? 가족은?”

“형이 있었어요.”

“형? 지금 어디에 있는데?”

되묻고 나서야 과거형이라는 걸 깨달았다. 있었다? 설마 불길에 휘말린 걸 봐버린 걸까? 넋을 잃고 걷기만 한 게 이해가 됐다.

“죽였어요.”

“……뭐?”

‘죽었어요’가 아닌 ‘죽였어요’.

위기감이 느껴졌다. 아이 얼굴에 고정된 시선이 밑으로 내려갔다. 아이의 손에 기포가 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부가 말끔했었다. 화상으로 인한 수포는 아닐 텐데.

“가하란.”

“네?”

“떨어져.”

필렌이 말했다.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가하란도 느끼고 있었다.

물러서며 착안을 열었다. 정보의 선들이 요동치는 중이었다.

마나가 날뛰고 있다.

대기 중에 뿌려진 마나가 아닌 아이 몸 안쪽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선들이 뿜어져 나온다.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보통 인간은 몇 가닥의 선으로 요약되는데, 저 아이는 수백 가닥의 선이 엉키고 있었다.

“꼬맹아. 뭘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있어주면 안 될까? 이 아줌마가 널 베지 않도록 말이야.”

아이는 말이 없었다. 손등에서 피어난 기포가 팔을 덮고 이내 목을 타고 얼굴로 퍼졌다.

기포가 점점 부풀어 올랐다. 기괴한 몰골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필렌 님, 대체…….”

“가시화 단계 직전의 농밀한 마나. 조금만 더 지나면 너도 알아챌 수 있을 테지. 그것들과 아주 비슷한 냄새가 나니까.”

비슷한 냄새.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느끼고 말았다. 필렌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사이 아이가 두 팔로 땅을 짚었다. 온몸에 돋아난 기포가 부글부글 끓더니, 이내 툭툭 터지기 시작했다.

뿌연 액체가 지면에 닿았다.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잡초가 검게 타들어 가는 게 보였다.

“꼬마야,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거다. 내 목소리가 들리니?”

아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몰골이었다. 피부가 녹고 안에 든 근육마저 녹아 허연 지방과 뼈가 보이고 있었다.

“허스가 말해준 적이 있지. 너와 비슷한 것들을. 형태는 좀 다르지만…….”

필렌이 검을 겨누었다.

“이젠 돌아올 수 없는 것 같구나.”

“신을! 신을!”

아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뛰어올랐다.

기포가 터지며 사방으로 체액이 튀었다. 한 방울이라도 닿으면 신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외력을 불러들였다.

촘촘한 그물 형태로 뻗어내 필렌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손을 쓰기도 전에, 검이 먼저 움직였다.

필렌의 검은 조용하게 나아가 아이의 목을 쳐냈다. 후두둑 떨어지는 체액은 반대 손에 움켜쥔 검집으로 날려 보냈다.

툭, 아이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머리를 잃은 몸이 땅에 떨어지며 하염없이 굴렀다.

가하란은 들어 올렸던 손을 내렸다.

타챠가 내지르는 주먹은 강맹해서 마주하고 있으면 온몸이 저려온다. 그야말로 태산과 같은 박력.

반면 필렌의 검에는 투지 같은 게 없었다. 슬며시 나아가 부드럽게 경로를 훑고 돌아올 뿐이었다.

그 단순함이 오싹했다. 착안으로 읽어낸 정보 역시 간결했다. 착안을 열고 상대한다면, 타챠보다 필렌이 까다롭게 느껴질 것이다.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는 거병이 없어도 강력했다.

“쉽게 가진 않네.”

필렌이 눈을 찌푸렸다. 가하란은 꼬꾸라진 아이의 몸을 바라봤다.

머리를 잃었음에도 꿈틀대며 일어섰다. 절단면이 기포로 뒤덮이더니 금세 아물었다.

“저것도 뼈를 도려내야 하나.”

검을 늘어트린 필렌이 앞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머리를 잃은 몸이 뛰어올랐다.

덤벼드는 게 아닌 도망을 택했다.

“해피!”

-가고 있어요!

쿵!

거병이 뛰어올라 오른손으로 마수를 낚아챘다. 붙잡힌 마수가 온몸을 비틀었다. 기포가 터지며 체액이 흘러나왔으나 외장갑을 녹이진 못했다.

-이건 뭐예요?

“나도 잘 모르겠어. 조금 전까지는 인간이었는데…….”

-마나 밀도가 정상이 아닌데요? 이 정도면 심도 5까지 가겠어요. 근데 그런 것치고는 활용되는 마나양이 적어요. 안쪽에 응집된 마나를 이용 못 하는 거 같아요.

발버둥 치는 마수 가까이 다가섰다.

“조심하렴.”

“방비는 해뒀어요.”

외력으로 마나를 끌어와 팔에 둘렀다. 윈테의 타격도 어느 정도는 상쇄했던 방식이니, 마수의 체액은 문제없을 것이다.

-가만히 있어.

해피가 양손으로 마수를 감쌌다. 가하란은 틈새 사이로 마수를 확인했다.

선이 뭉쳐 있는 곳.

착안이 읽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기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손을 조금씩 움직이다가 이내 움켜쥐었다.

촤악!

선의 집합체가 뜯겨 나왔다. 가하란은 착안을 닫고 현실 세계의 형태를 살폈다.

보라색 덩어리였다. 심장처럼 박동하던 살점이 이내 오그라들었다.

보라색 핏물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포화된 마나가 대기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해피가 붙들고 있던 마수도 녹아내렸다. 형태를 잃고 점액으로 변하기까지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수하고는 달라요. 사체가 이렇게나 빨리 녹아 버리다니.”

“어설프게 계를 열었다는 게 이런 건가.”

“계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단지, 선을 넘은 정신 나간 놈들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만 알고 있지.”

필렌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나저나, 너 그 손 괜찮은 거냐?”

가하란은 천으로 손을 닦아낸 뒤 내보였다. 작업복에 구멍 몇 개가 나긴 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너 틈새에서도 그런 식으로 일했니?”

“필요할 때는요.”

“화상이 왜 생겼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나. 무모해.”

“이 정도는 괜찮아요.”

필렌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