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37화 (437/558)

제437화

“접목이란 게 쉽지 않네.”

필렌은 축 늘어진 가지를 보며 말했다.

“미스터 리 말대로라면 전분을 가득 품은 피나도 만들어낼 수 있겠죠?”

“그뿐인가. 감자 씨알도 커지고 고구마도 토질을 가리지 않고 자랄 수 있게 해준다잖아. 아, 오렌지에서 씨도 제거할 수 있고. 품종 개량이야 이전부터 신경 쓰던 거지만, 접목 말고도 다른 방법도 있다고 하니.”

“성공하면 편해지겠네요.”

필렌은 상한 가지를 이리저리 훑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짝 붙어 있는 에단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보고할 거 있어?”

“아니요. 며칠 전에 말씀드린 마수 빼면 별거 없어요.”

“마을 한복판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는 그거?”

“네. 조사해 봤는데 방책을 뛰어넘어 들어온 놈 같아요. 이제는 마을이라 부르기 뭐할 정도로 면적이 커졌으니 감시에 공백이 생긴 거죠.”

“사망자 한 명. 드로이트 위원장도 재수가 없었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요. 그쪽 위원회, 길드의 지원을 받아 마수 포용론을 떠벌리고 다녔잖아요. 그렇게 찬양하던 마수한테 당한 거니 위원장도 억울하진 않겠죠.”

필렌은 떨어진 가지를 든 다음 에단의 이마를 콕 찍었다.

“도마뱀 씨하고 붙어 다니더니 혀가 까칠해졌어. 예전에는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전 어릴 때부터 이랬어요.”

필렌은 한 번 웃은 후 자리를 이동했다.

“도마뱀 씨는 이번에도 안 돌아오고 거기 있는 거야?”

“네. 아저씨는 대화로 풀어낼 수 있다고 믿는 거 같아요.”

“힘을 숭상하고 전투를 사랑하는 양반인데, 의외야.”

“거대한 의지의 격돌은 되도록 없어야 한대요.”

“거대한 의지. 종 자체를 말하는 걸까?”

“모르겠어요. 대장님 말대로 종 자체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뜬구름 잡는 양반은 아니니 뭔가 있긴 하겠네.”

“그 뭔가가 뭔지 제대로 말해주면 좋겠는데, 아저씨는 쓸데없는 말만 많고 중요한 말은 아껴요.”

“그게 타챠니까. 우리가 뭐라 할 부분은 아니지.”

“뭐라도 알고 대비할 수 있으면 좋잖아요.”

“대비라는 것도 선이 있는 거야. 지나치면 낭비지. 그러니 너도 적당히 해.”

각자의 이상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자투리 시간에만 협조한다. 그게 협회의 모토였다.

언젠가 찾아올, 아니, 찾아오는지 확신조차 안 드는 일에 인생 전부를 바치라고 하면 몇이나 움직일까.

인간의 목숨은 짧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데, 머나먼 미래까지 챙기면서 살랴?

어림도 없는 소리다.

각자가, 각자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적당히 준비한다.

강압성이 없기에 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군에 있었을 때처럼 위에서 툴툴거렸다면 진즉에 때려치웠을 터였다.

“저는 남들보다 멀리 봐야 한다고요. 위협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해야 하는 게 랍파의 일이니까요.”

“너무 먼 곳을 보며 살다가는 발치에 있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제가 그 정도로 어수룩하진 않아요.”

“사람은 다 어수룩해. 실수는 필연적이야. 그걸 잘 수습하는 게 능력인 거고.”

필렌은 모자를 들어 올리며 길가를 바라봤다.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이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그 수가 백은 넘어 보였다.

“저거, 대마수에 다녀온 사람들인가?”

“네. 이번에는 아주 대규모로 움직였어요.”

“근데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필렌은 대마수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저쪽은 요즘 어때?”

“여전해요. 국경을 넘어보려고 빈 곳을 찾고 있는데, 보이질 않아요.”

“9개월 정도 됐나? 국경이 봉쇄된 게.”

“네. 마치 성을 짓는 듯한 느낌이에요. 처음 대마수가 나타났을 때는 그냥 수천 마리가 떼 지어 있는 것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견고한 벽이 됐어요.”

에단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단의 단짝인 커다란 매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다오로 보면 듬성듬성 길이 보이긴 해요. 하지만 접근하는 순간 그쪽으로 마수가 움직여요. 사방에 보초 탑을 세워둔 것처럼 대응이 빨라요.”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저 머물고만 있다라.”

“아저씨는 저곳을 마수의 영토로 인정하고 접근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 하네요. 애초에 마수…… 게웰이 바랐던 건 공생이지 공멸이 아니라면서.”

“공생.”

필렌은 묘목들 사이를 오가는 다람쥐를 바라봤다.

과육을 먹고 씨를 삼켜 다른 곳으로 이동해 배설, 토지로 돌아간 씨앗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난다.

공생은 그런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거.

“가능할까? 말이 좋아 공생이지, 사실 한쪽이 허가해 주는 거니까.”

압도적인 종의 차이가 발생하면 공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인간과 다람쥐처럼.

하지만 인간과 마수는?

여력을 갖춘 두 종이 대립하게 되면 결과가 뻔하지 않나?

“사람은 징그러운 걸 내버려 두지 못해. 근데 징그러운 데다가 위험하기까지 해?”

필렌은 접목에 필요한 도구를 챙겼다. 에단이 뒤따라왔다.

“예전에 미스터 리가 이런 속담을 말해줬어.”

“무슨 속담이요?”

“빈대 잡으려다가 집을 다 태워먹는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가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 이런 뜻이죠?”

“그런 뜻이긴 해. 근데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아?”

필렌은 마수 포용자들을 보며 말했다.

“빈대가 얼마나 끔찍하면 집을 태울 생각을 했을까?”

“그러게요.”

“너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지 마. 이성적으로 굴러가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

필렌은 붉은 깃발을 바라보며 걸음을 뗐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마을 초입에서 해산했다. 조용히 흩어지는 걸 보면 이번에도 별문제 없는 듯했다.

공방에 돌아온 필렌은 도구를 정리한 후 얀스를 바라봤다.

“걔는 또 어딜 간 거야?”

“걔요?”

“공학하고 연애하는 애.”

“가하란이라면 남편하고 잠깐 나갔어요.”

“비일도 고생이네.”

“처음에는 신나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가, 요즘에는 죽을상이에요.”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서 쓰는 놈한테 붙들렸으니 고역이겠지.”

앉아서 신문을 보려고 하는데 에단이 음식을 잔뜩 들고 와 옆에 앉았다.

“그거 다 먹게?”

“네.”

“그것도 타챠 닮아가니?”

“……제가 그렇게 무식하게 먹지는 않아요.”

그러면서 슬그머니 빵 몇 개를 옆으로 밀어낸다. 필렌은 빵 하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칼리고한테서 연락 없지?”

“이주 전에 인편으로 온 것 외에는 소식 없어요.”

“서부 대륙 전체를 헤집고 다녀야 속이 후련하려나.”

“칼리고 아저씨는 걱정이 안 되지만, 구치 아저씨는 심히 걱정되네요.”

“안 늙는 몸뚱이를 얻었다고 해도 지치는 건 마찬가지니까.”

땅바닥이 살짝 진동했다. 묵직한 발소리와 기계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왔나 보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얼굴에 땅거미가 내려앉은 비일이 길게 하품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툭 밀면 쓰러질 것 같았다.

“저 왔습니다.”

뒤이어 가하란이 들어왔다. 피곤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나 활기가 남아 있었다.

“얘, 적당히 하렴. 비일 저러다 골병 나겠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왔어요. 정비해야 할 게 몇 개 있고 해서.”

필렌은 시계를 슬쩍 봤다. 오후 2시. 새벽녘에 나갔으니까…….

“지금까지 계속 거병을 움직인 거냐?”

“예. 배터리 수급할 겸 남쪽 숲으로 사냥도 다녀왔어요.”

“네가 쓰는 마수 뼈가 어마무시하긴 하지.”

얘기하는 사이 에단이 파이 한 조각을 가하란에게 던졌다. 재주도 좋게 입으로 받는 가하란이었다.

“돌아왔네.”

“왔지.”

“타챠 아저씨는?”

“남아 있어. 며칠 뒤에 올 거야.”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가하란이 아쉽다는 듯 옅게 미소 지었다.

“정리할 게 있어서 다시 가볼게요.”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필렌은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쟤만큼 바쁘게 살았으면 황제 자리도 노려볼 만했을 텐데.”

“근데 못 하시잖아요. 대장님은 쓸데없이 움직이는 거 싫어하시니까.”

에단이 한마디를 했다. 2층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옷을 갈아입은 비일이 내려왔다.

“악마는 떠났나요?”

“뭐 정리할 게 있다고 갔어.”

비일이 맞은편에 앉았다.

“어때?”

“뭐가요?”

“뭐겠어?”

잔에 담긴 물을 단숨에 마신 비일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기본기는 완벽했어요. 근데 이상한 버릇이 있어서 그거 다잡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버릇?”

“거병전 하다가 자꾸 자기가 체임버 열고 뛰쳐나오려고 해요. 틈새에서 수년을 그런 식으로 사냥해 온 탓인지, 거병과 따로 움직이는 게 편하다고 하네요.”

“독립형 거병은 그래서 만든 건가.”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서, 재능은 보여?”

비일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잘 다루긴 해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센스도 좋고요. 하지만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경계를 넘었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내몰려 죽지 않을 정도는 된다?”

“네. 마수 사냥이라면 위험한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대인전이라면?”

“좀 더 봐야겠어요. 그 녀석, 너무 정직하거든요.”

“훌륭한 마수 사냥꾼이지만, 전쟁 용병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쁘지 않은 평가네.”

“직접 봐주시게요?”

“네가 말해봐. 내가 가르칠 만한 가치가 있어?”

비일이 팔짱을 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은 없어요.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긴 해요.”

“뭔데?”

“자세 제어할 때 모션이 매번 조금씩 달라요. 같은 매뉴얼을 사용 중일 텐데 거병의 버릇이 매번 달라져요.”

“그래?”

“처음에는 조작 실수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유는 물어봤고?”

“네. 근데 대답을 안 해주네요. 그냥 웃기만 해요.”

필렌은 눈을 씰룩였다.

“널 붙잡고 늘어지는 이유, 알 것 같네.”

“예?”

“써전이잖아. 오랫동안 그쪽 일을 안 해서 잊었나 본데, 지금 가하란이 뭘 하고 있는지 떠오르지 않아?”

“써전이라.”

비일이 크게 웃었다.

“동작 간에 모핑. 절 자료 삼아서 무브먼트를 짜내고 있는 거네요.”

“가하란이 만든 유사 정령들, 이제 막 걸음마 뗀 아이들이잖아. 그럼 필요한 게 뭐겠어? 보고 배울 훌륭한 동작이지.”

“모핑은 수고비가 센데. 그놈 공짜로 해먹고 있었네요?”

“그러니까 웃지. 싱글벙글.”

때마침 문이 열렸다. 작업복을 잔뜩 든 가하란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하란.”

비일이 불렀다.

“네?”

“나 몸값 비싸다.”

가하란이 슬그머니 눈을 돌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가하란 양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철심이 들려 있었다.

“그건 또 뭐야?”

에단이 질문했다.

“역분사 장치에 들어갈 부품.”

“역분사? 그건 또 뭔데.”

“완성되면 보여줄게. 거의 다 끝나가니까.”

문밖으로 나가는 가하란을 보며 필렌은 한마디 했다.

“또 이상한 거 만드나 보네.”

* * *

총천연색으로 변한 대기를 바라보다가 장치를 껐다. 첫 가동치고는 성공적이었다.

흐물흐물해진 분사체를 뽑아냈다. 재사용은 불가능해 보였다.

“보고도 모르겠구나. 이건 대체 뭐에 쓰려고 만든 거냐?”

웍센이 역분사 장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실효성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가하란은 입을 다물었다.

200m 정도 떨어진 다른 정비소에서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사고일까요?”

“그런 것 같구나.”

장비를 내려두고 몸을 돌렸다.

“뭐 하려고?”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요. 선배님은 여기 계세요.”

“그럴 거면 같이 가자. 저기에는 아는 얼굴이 몇 있으니까.”

웍센과 함께 움직이려 할 때였다.

공방 뒤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장비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방문객은 아닌 듯했다.

다가서서 말을 붙이려 할 때였다.

“기계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앞에 선 사내가 건물 벽에 무언가를 뿌렸다. 곧이어 뒤에 선 여자가 발갛게 달아오른 착화탄을 던졌다.

“저런 미친!”

웍센이 욕을 내뱉는 사이, 가하란은 그들을 향해 뛰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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