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신이 떠나간다.
쇼엘은 숲으로 몸을 숨기는 신을 바라봤다. 어떠한 요구도, 대가도 없었다. 그저 모두의 아픔을 가져갔을 뿐.
“여러분.”
엔비에 정주교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에 이유는 없습니다. 공동체니까, 의무니까, 도덕이니까. 그런 것 이전에 그냥 돕는 겁니다.”
정주교가 멀어져 가는 신을 응시했다.
“신께선 무엇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아픔을 가엽게 여길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듯, 신께서도 우릴 도왔을 뿐입니다.”
쇼엘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적을 체험한 동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옹기종기 모인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중년의 남자였다. 정주교가 손끝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말씀하세요.”
“귀를 심하게 다친 친구가 있습니다. 신을 믿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는 없으나, 저는 그 친구를 구해주고 싶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족을, 친구를, 연인을 이 자리에 데려오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
“그래야죠. 네, 응당 그래야죠. 하지만 우리는 사악합니다.”
정주교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신의 기적을 독점하려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겁니다. 신은 한없이 자애로운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한 욕심을 부리면 신은 곧 우리 곁을 떠날 테죠.”
“그러면 어찌해야 하죠?”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만 이곳으로 데려올 것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소문내서는 안 됩니다. 탐욕에 눈먼 자들이 기적을 갈취하려고 달려들 테니까요. 우린 신을 잃어선 안 됩니다.”
옳은 소리였다. 위정자들의 독점욕은 세상이 바뀌어도 그대로였다.
신의 능력을 알게 되면 그들은 모두에게 허락된 기적을 빼앗아 한정된 자원처럼 사용해 버릴 것이다.
“그래선 안 될 일이죠!”
“욕심을 부렸다가 신께서 우릴 떠나면 큰일입니다.”
“맞아요. 우린 조심해서 움직여야 해요.”
어느 순간부터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린 신의 부름을 받은 첫 번째 사람들입니다.”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말이었다. 부름을 받은 사람. 일면식조차 없던 사람들이건만 놀라울 정도로 친근감과 믿음이 생겼다.
“강력한 결속력이야말로 우리의 힘이고, 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동생이 소리쳤다. 시력을 잃고 난 후로 계속 침울해 있던 동생이 끓어오르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력과 함께 생기를 되찾았다.
신이 보살펴 준 덕분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우린 기적을 숨겨야 합니다.”
“언제까지 숨겨야 할까요?”
“길지 않을 것입니다. 신을 맞이할 준비를 제가 해놓을 것입니다.”
정주교가 힘주어 말했다.
그때였다.
“다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나서며 말했다.
“이해는 합니다. 악용당할 소지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네, 그래야죠. 근데 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너무 맥락이 없지 않나요?”
맥락.
듣고 보니 그랬다. 정주교는 이곳에 모인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간을 은연중에 악이라 상정했다.
조심해야 하는 건 맞지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게 아닐까?
“그리고 신이란 걸 맹신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마수, 그게 본질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여러분도 마수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맹했던 머리를 단숨에 일깨우는 감촉이었다.
신에게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고마웠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그간 겪어온 악몽을 잊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난 왜 그토록 쉽게 신을 마음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인 거지?
“악이다!”
동생이 벌떡 일어서더니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쳐들었다.
“저 사람을 죽여야 해요! 악입니다.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있어요!”
“맞아요! 해선 안 될 말이에요.”
쇼엘은 동생을 올려다봤다. 빛을 되찾은 검은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치료를 받기 전보다 더 탁해 보였다.
“……호이른.”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신을 의심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 어?”
“난, 그게.”
“형! 형도 악이야? 아니잖아.”
쇼엘은 떨리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자신처럼 경직된 사람은 몇 없었다. 대부분 동생과 같이 흥분하여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신을 지켜야 해!”
악,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왼쪽을 바라봤다. 바로 옆 여자가 주먹만 한 돌을 들고 어떤 남자의 머리를 내려찍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얼굴로 튀었다. 쇼엘은 손을 들어 얼굴에 튄 액체를 닦아냈다. 피였다.
정신이 멍했다.
신과 만나기 전, 저 둘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 둘은 부부였다. 아내는 신에게 치료를 받았고, 남편은 기뻐하며 껴안았다.
분명 다정한 부부였다.
그런데 왜?
“신을! 의심하는 자! 존재해서는 안 돼!”
헉헉거리며 돌을 떨어트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비명이 시작됐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쇼엘도 누워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죽은 듯 누워 있는 다섯 사람이었다. 신의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들. 동반자로서 참여한 사람들.
“형.”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목 상태가 이상했다.
말라비틀어진 개구리처럼 온몸이 바닥에 눌어붙었다.
“왜 신을 믿지 않은 거야.”
“……호이른.”
“슬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가까이 다가온 동생이 양손을 들었다. 손에는 커다란 돌이 들려 있었다.
쇼엘은 마지막 순간, 엔비에 정주교를 바라봤다.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 * *
“기적 같은 건 없었다라.”
드로이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기대한 적도 없으니 실망도 없다. 애초에 마수한테 뭘 바랄 수 있을까.
그것들은 장사에 쓰일 재료지 기적의 대상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우리가 진화의 사도임을 입증한 거니까요.”
엔비에 정주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주교님.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만, 내부에서는 잡음이 나오고 있어요.”
“그렇군요.”
“해서 잠시만 자리에서 물러나 계셨으면 합니다. 소란이 잦아들면 제가 다시 맞이할 테니 염려 마시고요.”
엔비에를 쳐내고 나면 사업을 확장할 것이다. 마수 다음에는 기적. 분위기만 잘 조성하면 눈먼 돈을 긁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드로이트 위원장님. 당신은 훌륭한 장사꾼이었어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깨닫고 난 후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죠. 당신은 진화의 사도들을 믿지 않았어요. 속으로는 마수라 폄훼하고 그들을 믿는 우릴 같잖게 봤죠.”
“정주교님. 흥분하지 마시죠. 제가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정리되면 다시 부르겠다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정리는 끝났으니까요.”
위기감이 들었다.
드로이트는 뒤쪽에 서 있는 임원들을 바라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엔비에를 쳐내는 것에 동의하던 자들인데, 지금은 무뚝뚝하게 정면만 보고 있었다.
당했군.
쓴웃음이 나왔다. 기적만 부르짖는, 마수에 단단히 빠져든 정신병자라 생각했는데.
“이거 한 방 먹었군요. 언제부터 임원들을 설득한 겁니까?”
“설득한 적 없습니다. 그저 기적을 보여줬을 뿐이죠.”
“그놈의 기적 타령은 그만두죠. 이미 볼 장 다 본 거 같으니.”
패를 다 보여줬다는 건 승패가 정해졌다는 뜻이다. 드로이트는 위원장의 상징인 연녹색 배지를 가슴에서 떼어냈다.
“자리를 보전해 주진 않을 테고, 내가 정리해서 나갈 테니 시간을 주시죠.”
돈은 벌 만큼 벌었다. 더 벌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지금 손을 떼도 여생을 편히 살 수 있었다.
“정리는 제가 합니다.”
엔비에가 다가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뭐 하자는 겁니까?”
“신의 기적을 보여드리죠.”
어, 하는 사이 엔비에의 양손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드로이트는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발버둥 쳤지만, 머리를 감싼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린 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걸 위한 청소가 이제 시작될 테죠. 당신이 그 첫걸음입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이거 놓으십쇼!”
압통이 시작됐다. 엔비에의 두 손이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드로이트는 손을 뻗어 엔비에의 목을 쥐었다. 목을 조르려 했는데, 피부가 금속처럼 단단했다.
“다, 당신…….”
“기적이 오고 있습니다.”
으직, 소리가 났다.
드로이트는 생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안구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살려…….”
“보였나요? 신의 기적이.”
* * *
엔비에는 수건으로 손을 닦아냈다.
머리가 으깨진 위원장을 천으로 감싸 구석에 치워뒀다.
“바로 출발하죠. 신께서 기다리십니다.”
집무실에 모인 정주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출발했습니다. 총합 217명입니다.”
“훌륭하군요.”
사전에 준비된 자들까지 합하면 도합 300명의 사도들이 탄생한다.
“이번 목회가 끝나면 신께서 오실 겁니다.”
“마침내 이 시간이 왔군요.”
“케핀이 활개 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들이 제조소를 타격하면 신께서 더욱 편하게 강림하실 수 있을 겁니다.”
“준비를 맞춰 뒀습니다.”
“완벽하군요.”
“신을 맞이해야 하는 자리니까요.”
신을 마을로 불러들여야 한다.
그 목적 하나만으로, 1년을 넘게 일해왔다.
“가시죠.”
사람들이 집무실을 나섰다.
엔비에도 외투를 챙겨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헛것이 보였다. 나와 닮은 남자가 맞은편에 있었다. 그자는 처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떠올려. 신은 그저 괴물이야. 왜 마수를 마을로 불러들이려 하지? 넌 그저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잖아.”
“그건…….”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 끔찍한 것에게 충성을 다했지?
혼란이 찾아들 때였다.
“엔비에 씨. 올바른 모습을 되찾았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정주교 둘이 황홀한 얼굴로 바라봤다. 엔비에는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 했다.
그런데 입을 통해 나온 음성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케에아악, 쇠 긁는 소리가 입을 통해 나왔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옷걸이 옆 거울을 보게 됐다.
이게 나라고?
거울 안에 있는 건 두 발로 걷는, 흉측한 몰골의 마수였다. 찢어진 옷들이 피부에서 흘러나온 체액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진화할 때가 아닙니다. 너무 일러요. 그러니 저희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정주교 둘이 다가왔다.
무엇을 할 것인지 훤히 보였다.
엔비에는 곧바로 창문을 향해 뛰었다. 유리창을 깨고 나가 길거리에 내려앉은 순간, 비명이 들려왔다.
마수다!
외침이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었다.
두 발로 뛰어 도망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네발로 기고 있었다.
그게 좀 더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쿵쿵, 거병의 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잡히면 죽게 될 것이다.
달리고 또 달렸다.
지치지 않는 폐가 마침내 지쳤을 때 엔비에는 대마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왜 여기로 온 걸까?
“생각보다 빨랐네.”
신 위에 어떤 인간이 올라타 있었다.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온 인간이 손을 내밀었다.
엔비에는 그 손길을 멍하니 받아들였다.
“대가 없는 거래가 어디 있어. 힘을 썼으면 값을 치러야지. 그래도 스스로 암시를 풀어내고 유혹을 이겨낸 것까지 보면, 너도 보통 인간은 아니었나 보네. 근데 어쩌겠어? 이미 선을 넘어버린걸.”
인간이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손날을, 엔비에는 그저 바라봤다.
“……죽여줘.”
인간의 목소리가 나왔다.
“알아. 그렇게 해줄게. 나 나름 자비롭거든.”
손날이 머리에 닿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