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33화 (433/558)

제433화

“갑자기 이러시면…….”

“나 없어도 잘 돌아가잖나.”

“그럴 리가요. 마공장님 안 계시면 얼탈 애들 한둘이 아닙니다. 후배들 생각해서라도 현장에 조금 더 남으시죠.”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맙네. 근데 자네도 알지 않은가. 내가 일선에서 물러서도 별문제 없다는 걸. 지난 반년간 내 부재로 인해 제조소가 멈춘 적 있던가?”

소장이 이마를 긁적였다.

“휴가를 달라고 하셨을 때 짐작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년이면 이른 건 아니지.”

웍센은 소장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손은 떼지만 아예 등을 돌리는 건 아니야. 자네가 날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도우러 와주겠네.”

“그러실 거면 계속 있어주시죠. 관리 감독직 하나 만들어놓을 테니.”

“됐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해서 결정한 거니까 번복은 없어.”

웍센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소장도 따라서 사무실을 나섰다.

“뭐 하러 따라와.”

“하나만 더 여쭈려고요.”

“뭔가?”

“그때 공장에 와서 공방을 잠시 빌렸던 젊은 친구, 가하란이었던가요? 은퇴하시는 이유가 그 친구와 연관이 있습니까?”

“자네는 예전부터 셈이 빠르고 눈치가 좋았지. 브룬드 제조소는 앞으로도 잘될 거야.”

“그 친구가 대체 뭐라고 했기에 그만두시는 겁니까.”

“말해준 건 없어. 보여준 건 많지만.”

웍센은 눈웃음을 지었다.

“길드 쪽 놈들한테는 자네가 대신 말해주게. 그쪽 놈들하고는 얼굴도 맞대기 싫으니.”

“마공장님 붙잡으려고 별짓을 다 하겠죠.”

“그게 싫다는 거야. 그러니 자네가 처리 좀 해줘. 퇴직 선물은 그걸로 대신할 테니까.”

“알아먹게 설명은 해보겠지만, 아마 알아먹지 못하고 마공장님을 찾아갈 겁니다. 이 도시의 제조 시설은 모두 길드 산하니까요.”

“그만두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하는 더러운 곳이야. 생떼 쓰면 들어는 줘야지. 정 안되면 나한테 넘겨. 마찰 일으키지 말고.”

“최대한 막아 보겠습니다.”

소장의 배웅을 받으며 제조소를 나왔다.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곳.

“버렸으니 새로 쌓아야지.”

은퇴했다.

하지만 포기한 건 아니다. 안 될 거라는 걸 알지만, 여생을 바쳐볼 것이다. 마법 공학 자체를 여흥으로 즐기다 인생을 마감하는 것도 썩 나쁘진 않으리라.

허리를 톡톡 치면서 걸음을 뗐다.

얀스의 공방은 오늘도 시끌벅적했다. 르완의 용병들이 여기저기 모여 떠들고 있었고, 공터 안쪽에서는 거병들을 분해하느라 쨍한 소음이 일었다.

지난 반년간 이곳에 살다시피 해서 아는 얼굴이 많아졌다. 건방진 놈들이 대다수지만, 눈이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해준다.

“영감님, 좀 쉬지 또 나오셨네.”

“그러다 훅 갑니다.”

웍센은 히죽 웃는 용병들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세웠다. 모욕적인 제스처지만 용병들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르완의 용병들은 자유분방했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모습을 웍센은 알고 있다.

자유 밑에 흐르는 엄중한 질서. 이들은 용병의 껍데기를 쓴 군인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을 지휘하는 건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니까.

웍센은 저 멀리 농사 모자를 쓴 채 휘적휘적 걸어가는 필렌을 바라봤다.

농번기의 농부보다 더 밭에 몰두하는 저 여인을 보며 몇이나 아른고개의 푸른 기사를 떠올릴까.

웍센도 처음 필렌을 봤을 땐 믿지 못했다. 저 여자가 제국의 악마라고?

언젠가 사적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했었다. 어깨에 작은 뿔이 돋아난 거병을 기억하냐고.

필렌은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성능이 꽤 좋아 박살내는 데 애를 먹었다고 덧붙였다.

웍센은 그 말을 듣고 흡족했다. 내가 설계한 거병이 잠깐이나마 악마의 발목을 붙잡은 거니까.

“세상일 알다가도 모르는 거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제국과 연합 왕국의 15년 전쟁이 끝나더니 세상을 뒤엎은 재앙이 찾아왔다.

나아가 제국의 악마라 불리던 여자가 적국의 땅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고 있다.

이런 세상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무엇보다…….”

웍센은 낡은 문을 열었다. 가하란의 작업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에 놓인 긴 작업대 위를 자그마한 기계인형들이 오가고 있었다. 네 다리로 뛰는 녀석, 여섯 개의 팔로 물건을 정리 중인 녀석, 하염없이 제자리에서 뛰고 있는 녀석.

이제는 익숙해져서 놀랍지도 않다. 외투를 벗자 벽면을 따라 기던 자그마한 기계인형이 다가왔다.

인형에 달린 고리에 외투를 걸었다.

“고맙다, F3.”

F3이 벽면을 기어 구석에 자리 잡았다.

웍센은 작업대에 펼쳐져 있는 신문을 들었다. 이번 달 신문이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멈춰버린 신문나무가 되살아났는지, 신문을 재발간하는 곳이 많아졌다.

집결 도시의 소식을 눈으로 훑을 때였다.

“그래, 그래.”

작은 원숭이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첫 대면 때는 이를 세우며 사납게 울어댔는데, 이제는 눈이 마주쳤다 하면 안겨들었다.

“루루야. 내가 그리 좋으면 이 할애비랑 살래?”

루루가 고개를 홱 들더니 도리질을 쳤다. 가끔 보면 원숭이가 아니라 인간 아이 같았다. 말도 알아듣는 것 같고.

“싫으면 어쩔 수 없고.”

원숭이를 떼어낸 후 작업대를 살폈다.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도면들. 봐도 상관없다는 듯이 널려 있었다.

웍센은 도면을 들었다.

“여전히 알아먹을 수가 없어.”

일주일 전, 웍센은 깨달았다. 가하란의 두 눈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걸.

패러다임 시프트.

이전의 지식은 가치를 잃게 될 것이다. 가하란이 제작한 유사 정령이 시중에 도는 순간, 공학도들은 절망을 맛보게 될 터였다.

한걸음 먼저 신세계를 경험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착실하게 준비할 수 있으니까.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이 나이에 다 새로 배워야 한다니. 쯧.”

배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전해야 한다.

평생 쇠를 주무르고, 회로를 만지작거리며 살아온 남자에게 다른 길은 존재할 수 없었다.

도면을 정리하고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릎 높이의 선반 위에 유사 정령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마전기가 도입된 후 거병은 소형화를 이뤄냈고, 오토마타의 부피가 획기적으로 줄어듦에 따라 유사 정령 역시 작아졌다.

가하란은 그 작아진 유사 정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름 25cm의 반구형 본체.

압축의 예술.

무게도 30kg 전후였다. 값비싼 금적철의 함유량을 극단적으로 줄이고, 유철과 청철을 배합해 제작했다고 들었다.

-안녕.

손에 들린 유사 정령이 입을 열었다.

“오늘도 말이 짧구나.”

-싫어?

“버릇없어 보이긴 하지.”

-이게 편해.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자고 싶은데, 놔줄래?

“그래. 슬리피, 넌 자면서 많은 걸 생각한다고 했었지.”

본체를 내려놨다. 선반에 올리자마자 커넥터가 분리됐다. 감각 장치까지 떼어낸 걸 보면 아주 오랫동안 잘 모양이다.

기계가 잠을 잔다.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의 조합이었다.

기계와 잠. 하지만 가하란이 만들어낸 기계들은 정말로 잠을 자고, 꿈이란 걸 꾸는 듯했다.

재미난 일이었다.

실용주의의 극단에서 탄생한 기계가 잠과 꿈이라니.

슬리피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웍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벽면에 연결된 시각 장치가 움찔하며 돌아가는 게 보였다.

“배쉬플.”

-……오셨어요?

“가하란이 언제쯤 돌아올지 알고 있니?”

-……몰라요. 저기, 다른 곳 좀 봐주실래요? 부끄러워서 회로 온도가 올라가는 거 같아요.

“그래.”

잠자는 기계와 부끄럼 타는 기계.

정말 재미난 놈들이었다.

다른 유사 정령들도 개성이라 부를 만한 것을 획득한 상태였다.

가하란이 주입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 얻어낸 건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유사 정령에 관해서는 가하란도 입을 다물었기에.

“선배님.”

문이 열리며 가하란이 들어왔다. 쌀쌀한 날씨인데 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오지. 얘들하고 네 욕을 좀 하려고 했는데.”

“나갔다가 올까요?”

“됐다. 그보다 뭘 했기에 땀범벅이 된 거냐?”

“마침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선배님께 보고하려고 했거든요.”

“보고?”

가하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북적거리던 공방이 한산해졌다. 용병들이 사냥에 나선 것 같았다.

“이쪽이에요.”

발길이 멈춘 곳은 격납고 옆 커다란 창고였다.

“여긴 왜?”

안에서 잠깐 기다리라는 말에 일단 창고로 들어왔다. 가하란은 가져올 게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웍센은 눈을 찌푸렸다. 눈이 침침해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나등 스위치가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벽면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렸다. 천장에서 빛이 뿌려졌다.

온갖 기재가 쌓여 있는 창고 구석에 못 보던 천이 있었다. 얼기설기 덮어놓은 흔적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저 안에 보고할 물건이 들어 있는 듯했다.

“대체 뭐길래…….”

얌전히 기다리는 성격은 아니기에 천을 붙잡고 홱 젖혔다.

웍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1m 남짓의 거병.

아니, 이걸 거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고 기계인형은 아니었다.

크기가 작아졌다고는 하나 탈로스와 연질 파이프, 거기에 각 모듈까지.

소형화된 거병을 또다시 축소했다.

“이래서는 사람이…….”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거병 제작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리나,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일.

제어할 수 없는 수많은 위험 요소 때문에 계획 구상 단계에서 포기하게 되는 작업.

웍센은 소형 거병의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조종석 대신 길게 뽑혀 나온 커넥터들이 안쪽을 채우고 있었다.

가운데에 폭 30cm 정도의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 놓일 게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멋지게 소개하려고 가려둔 건데.”

가하란이 유사 정령을 들고 나타났다.

“너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는 거냐?”

“아마 맞을 겁니다.”

“완전 독립 거병이라니. 제어는?”

“일단은 이 애한테 맡길 거예요.”

“맡긴다고?”

웍센은 가하란의 손을 붙들었다.

“네가 제작한 유사 정령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기계는 완벽하지 않아. 오류를 범하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선배님 말씀이 옳아요. 하지만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죠.”

“사람과 기계는 다르다. 인간은…….”

웍센은 말을 삼켰다. 가하란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너와 대화할 때면 종종 온도 차를 느끼곤 했다. 무엇에 대한 차이인지 알 수 없었기에 넘겼는데, 오늘에서야 알겠구나.”

가하란이 거병 안쪽으로 유사 정령을 밀어 넣었다.

“인간과 기계.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엇이 인간의 기준이고, 무엇이 기계의 기준인지. 회로를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와 인간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요.”

“그건…….”

“걱정하지는 마세요. 같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분명 다르죠. 다르기에, 전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기계를?”

웍센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말랑말랑한 피부의 질감. 그리고 핏줄.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증거들.

근본적인 영역에서 반발감이 들었다. 기계는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그게 옳은 건가?

웍센은 한참이나 생각한 끝에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적어도 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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