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땅에 발을 딛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웍센은 허리를 툭툭 치며 거병을 올려다봤다.
체임버에 몸을 실은 가하란이 상체만 내밀고 있었다.
“걷기 힘드시면 제가 조심히 들어서…….”
“끔찍한 소리 마라. 거기에 올라타면 위아래로 몇십 cm는 흔들리니까.”
손을 내저은 후 허리를 폈다. 확실히 나이를 먹긴 먹었다. 내일모레 일흔이면 오래 살긴 했지.
“그래도 죽기 전에 이만한 걸 보고 죽어서 다행이야.”
넋두리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기술적 격차가 심하니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시기나 질투, 허탈감 같은 게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다음에 벌어질 일도 보고 싶었다. 프로토타입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을까?
“무슨 말씀 하셨나요?”
가하란이 고개를 빼며 물었다.
“별말 안 했다. 그보다 테스트나 해봐. 난 외부 기능 점검해 볼 테니.”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천천히 해. 이곳에 와서 만든 첫 작품인데 정성을 들여야지. 기계는 정직해. 들인 공만큼 보답해 준다.”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체임버 덮개를 닫았다. 거병의 머리가 웍센 쪽을 향했다.
-할아버지, 괜찮아요? 저 때문에 다친 거예요?
“넌 잘해주고 있어. 그러니 마음껏 날뛰어 봐라.”
-알겠어요! 제 내부 회로가 과열돼 다 녹아내릴 정도로 날뛰어 볼게요.
“그렇게까진 하지 말고.”
뒤로 물러서서 거병을 살폈다.
돌출된 무릎 관절과 외장갑에 크랙이 발생했는지, 각 대관절 사이에 유격이 생겼는지부터 확인했다.
육안에 잡힐 정도면 심각한 문제인데, 다행히 눈에 띄는 손상은 없었다.
거병이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다리 관절도 한 번씩 움직였다.
인지 통합을 끝내고 간단히 살펴보는 중이리라.
-선배님.
가하란의 음성이 확성 장치를 통해 흘러나왔다.
“왜?”
-조금만 더 뒤로 물러나 계세요.
웍센은 군말 없이 뒷걸음쳤다. 거리를 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잠시 후 거병 발목에 덧댄 외장갑이 좌우로 비틀렸다.
웍센은 눈 사이를 좁혔다.
하부 모듈 제작 당시에는 확인할 수 없었던 장치였다.
비틀린 외장갑 사이로 육각형 노즐이 보였다. 왼쪽으로 천천히 걸으며 거병의 발을 살폈다. 전후좌우, 모두 노즐이 노출돼 있었다.
저게 뭐지?
거병이 움직였다. 천천히 한 걸음, 이내 큰 원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다.
원심력 테스트라도 하는 걸까.
그때였다.
몸을 훑고 가는 기운이 있었다. 마나 파장이었다. 마전기로 대체된 이후에는 외부 손실이 거의 없었을 텐데?
문제가 생긴 걸까?
연질 파이프 쪽이 신경 쓰였다. 에너지 누수가 심하지 않은 지금 작동을 멈추고 점검해야 했다.
손을 들어 올려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거병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지면을 타고 진동이 전해졌다.
웨이브 겔이 신체를 보호한다고 해도 원심력이 강해지면 신체가 버텨내질 못할 것이다.
“가하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는 거병을 향해 뛰어갈 때였다.
“…….”
웍센은 고개를 들었다.
속을 뒤흔드는 마나 파장과 함께 거병이 뛰어올랐다. 노출된 노즐에서 가시화된 마나가 보였다.
“미친놈.”
15m, 아니, 그보다 높이 뛰어오른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의족에 박아놓은 장치를 거병으로 옮긴 것이다.
정신 나간 짓이었다.
질량을 들어 올리려면 힘이 필요하고, 힘은 결국 효율과 맞닿아 있다.
물리적인 힘으로 도움닫기를 했다고 해도 저만한 질량을 15m 상공으로 띄우려면 마전기의 힘이 필수 불가결이다.
도약 한번 할 때마다 얼마만큼의 마전기가 소모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체공을 끝낸 거병이 낙하를 시작했다. 아니, 낙하란 표현은 고상하다. 저건 추락이라 봐야 했다.
비대한 질량과 15m 상공.
높이, 중량, 속도. 너무나도 뻔한 공식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도출되는 답은 하나였다.
탑승자의 안전이야 마나 씰과 웨이브 겔이 보장한다고 해도, 기체 전체에 가해질 충격은 상쇄할 수 없을 것이다.
첫 기동이 마지막 기동이 될지도 모른다.
모듈 연결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때 랑데부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지금, 거병은 지면과 랑데부를 앞두고 있었다.
“야 이놈아!”
반년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고철 덩어리로 변한다고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
뭉개지는 하부 모듈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파아아아!
강렬한 마나 파장과 함께 얼굴을 할퀴는 강풍이 불어왔다. 흙먼지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웍센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거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저건…….”
지면과 격돌했어야 할 거병이 반듯하게 서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물에 빠진 것처럼 팔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웍센은 거병의 발아래를 주목했다.
지면과 거병의 발 사이, 가시화된 마나가 층을 이룬 채 끼어 있었다.
“떠 있어?”
가시화된 마나가 사라지면서 쿵, 거병이 땅에 내려앉았다. 웍센은 입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거병에 다가갔다.
열기가 훅 끼쳐왔다. 붉게 달아오른 발목 쪽 외장갑이 보였다.
-성공했어요!
해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계산했던 것보다는 안전성이 살짝 떨어졌지만, 실사용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가하란이 거병에서 내리며 한 말이었다. 웍센은 가하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니, 잘 알고 있겠지. 알고 있으니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고도 괜찮겠지.”
“조금 위험해 보였죠?”
“이게 조금이면 많이 위험한 건 대체 뭐냐?”
진이 빠져서 실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가하란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웍센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됐어. 네 입에서 나온 말을 들었다가는 내가 내 명에 못 죽을 거 같다.”
웍센은 거병을 올려다봤다.
“해피! 네가 계산한 거냐?”
-물론이죠. 공중에서의 자세 제어는 제 전문 분야예요. 물론, 대부분 아빠한테서 배운 거지만요.
아빠, 가하란을 지칭하는 것이다.
웍센은 식지 않는 거병의 다리로 다가갔다. 노출된 노즐 끝이 샛노랗게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착지 직전에 무게 중심이 쏠렸는데, 이게 문제였어요.”
가하란이 내열 장갑을 끼고 다가와 노즐을 잡아당겼다. 녹아내린 노즐이 뚝 부러져 나왔다.
“마전기가 가시화돼 거병 발밑에 있었다. 단순히 에너지를 방출하는 게 아니었어.”
시선을 내려 가하란의 의족을 바라봤다.
“네 다리에 부착된 그거. 방금 거병이 보여준 시스템하고 같은 거라면, 단순히 추진력을 얻기 위한 장치는 아닌 듯하구나.”
“속도를 내는 것 외에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어요.”
가하란이 의족 뒤꿈치를 지면에 툭툭 치더니 힘껏 도약했다. 3m 정도 떠오른 가하란이 공중에서 재차 뛰어올랐다.
“그래, 그런 거였어.”
웍센은 가하란이 밟고 뛴 마나의 잔여물을 바라봤다. 가시화된 마나를 발판 삼은 것이다.
땅으로 내려온 가하란이 체임버를 가리켰다.
“웨이브 겔 역시 마나가 형태화하며 부피를 지니게 되잖아요. 공간을 점유하게 된 순간, 그걸 이용할 수도 있게 되죠.”
“웨이브 겔은 베이스 아키텍처에 들어 있는 장치다. 회로를 해석해서 따로 빼내는 건 불가능…….”
웍센은 말을 삼켰다.
불가능이란 말은 의미가 퇴색됐다. 가하란의 작업물이 불가능에 대한 반증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마주할 때 언제나 발악했지. 이해하려고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웍센은 손을 움켜쥐었다. 육십이 넘었지만 자신과 가까운 말은 도전이지 포기가 아니었다.
“회로를 보여줄 수 있겠냐? 달라고는 하지 않으마. 이 자리에서 실체를 보고 싶다.”
무엇이든 조건 없이 내어주던 가하란도 이것만큼은 어렵지 않을까?
패러다임 시프트를 불러오고도 남을 지식이었다.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었다.
역시나 가하란도 머뭇거렸다.
“늙으면 방정맞게 변한다더니, 내가 무리한 부탁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보여줄 수 있는 거냐?”
“보여드릴 수는 있어요. 식별 가능한 형태로 바꿔야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아요.”
가하란이 노트를 달라고 했다. 얼른 넘겨줬다.
펜이 움직인다. 한 장, 두 장, 세 장. 어찌나 글자를 빨리 쓰는지 페이지가 휙휙 넘어갔다.
그렇게 스무 장 정도를 넘겼을 때였다.
“이게 개요예요.”
“개요?”
노트를 돌려받았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태고의 기술이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첫 장을 넘겼다.
글씨는 없었다. 있는 건 기호와 선뿐이었다. 아니, 첫 줄을 제외하고는 전부 선이었다.
“이건?”
“회로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개요라고 해서 글로 된 문장일 줄 알았다. 다음 장을 넘겼다. 눈에 익은 회로가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머릿속에 든 청사진과는 다른 것이었다.
소싯적엔 마력선 도안을 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녹슬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눈감고 그릴 수 있는 회로가 백여 가지였다.
그런데.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
“이거 잘못 그린 거 아니냐? 이대로 설계한다면 꼬임이 발생할 텐데. 게다가 여긴 아예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마지막 장까지 다 보시고 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웍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한 눈으로 가하란이 적은 수식을 훑었다.
뒤로 갈수록 명백하게 틀린 회로가 그려져 있었다. 마법 공학에 막 발을 들인 학생에게 보여줘도 오류를 잡아낼 것이다.
그 정도로 조악했다.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지. 가하란은 배움을 나눌 때는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잘못된 정보가 삽입되는 걸 극도로 꺼려 무언가를 전할 때는 담백하게 말할 정도였다.
마지막 장까지 다 본 후 고개를 들었다.
“어떠세요?”
“내 지식으로 판단한다면, 이건 절대로 써서는 안 될 회로다. 애초에 작동하지도 않겠지. 결손이 너무 많다. 있음과 없음의 규칙을 죄다 무시하고 있어.”
“선배님의 눈은 정확하세요. 그래서…… 보여드리는 걸 망설인 거고요.”
“정확해서 망설였다?”
가하란이 노트를 가져갔다.
그러더니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뜯어냈다. 얇은 종이 뭉치가 손에 들렸다.
“억지로 도식화해서 평면에 그린 거예요. 본래는 이런 형태거든요.”
가하란이 네모반듯한 종이를 양손으로 힘껏 구겼다. 구겨진 종이가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구체가 됐다.
“이마저도 어설프게 형상화한 거죠. 제대로 본다면 타원형에 가까울 거예요.”
“이, 이게 회로라는 거냐? 회로는 면에 존재해야…….”
“예. 그래야 하죠.”
그래야 하죠.
그 말이 머리를 때렸다.
동시에 웍센은 웃었다.
“그래, 그런 거였군.”
종이 뭉치를 넘겨받았다. 둥글게 뭉쳐진 종이를 들어 올렸다.
넓게 퍼진 구름 뒤에 숨은 태양 옆으로 종이를 가져다 댔다.
“나는 죽어서도 이걸 이해하지 못하겠지.”
종이 뭉치를 균열 사이로 던졌다. 절벽에 툭 부딪힌 종이가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먼저 가라.”
“선배님.”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러니 먼저 가. 천천히 따라갈 테니.”
눈치가 빠른 놈답게 가하란은 되묻지 않고 거병에 올라탔다.
-할아버지, 안 가요?
“생각 좀 털어내고 가마.”
-얼른 와요.
거병이 멀어져 간다.
웍센은 옆 주머니에 꽂아둔 드라이버를 꺼냈다. 엄지와 검지로 손잡이를 잡고 손목을 튕겨 드라이버를 던졌다.
공중에서 두어 바퀴 돈 드라이버가 지면에 떨어졌다. 당연히 옆으로 누웠다.
웍센은 육십 번 정도 그 행동을 반복했다.
“예순다섯.”
손목을 튕겼다. 공중에 뜬 드라이버가 지면 틈에서 툭 박히며 똑바로 섰다.
오, 감탄하며 바라보는 사이 드라이버가 기우뚱거리며 바닥에 픽 꼬꾸라졌다.
웍센은 드라이버를 주워 들었다.
“……이 작은 것도 안 되는데.”
미련 찌꺼기가 담긴 웃음을 하나 떨어트린 후, 몸을 돌렸다.
“새 시대가 왔으면 은퇴할 때가 된 거지.”
마을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