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노구의 아침은 무겁다.
오늘따라 유달리 피곤하다고 느끼면서도 웍센은 몸을 일으켰다. 숨을 고르고 침대맡에 놓아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작업복을 챙겼다.
싸늘한 새벽 공기를 뚫고 향한 곳은 얀스의 공방이었다. 브룬드 제조소 대신 얀스의 공방으로 출근 도장을 찍은 지도 두 달 정도 됐다.
“오셨어요?”
어김없이 가하란이 반겨주었다. 김이 오르는 머그잔을 받았다. 안에 담긴 죽을 한술 떠먹었다. 오늘은 옥수수군.
“가시죠.”
“그래.”
뒷짐을 진 채 가하란을 따라갔다. 불이 환하게 켜진 격납고가 반겨주었다.
손때 묻은 장갑을 끼며 격납고 중앙에 놓인 거병을 바라봤다.
전고 4.2m의 거병.
외장갑을 모두 떼어낸 상태라 탈로스와 연질 파이프, 각 모듈 연결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구석구석 살폈다. 하루 만에 또 달라져 있었다.
“여기저기 손봤구나.”
“가동성을 조금 더 높여봤어요.”
“내부 충격량은?”
“체임버 하부 33에서 38까지 이음부에 사용된 고정쇠를 바꿔봤어요.”
가하란이 다가와 교체한 부품을 가리켰다. 웍센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다음 노트에 적었다.
“기동은 해봤고?”
“의견 듣고 해보려고요.”
“계산은 이미 끝났을 텐데 내 의견이 필요할까.”
가하란이 거병 무릎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매번 깨닫는 게 있어요. 도면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죠. 물론 도면은 중요하지만, 제작은 결국 사람의 손끝에서 이뤄지니까요. 마에스트로의 작품들이 칭송받는 이유는 그 손끝의 정교함 때문일 테고요.”
“난 마에스트로가 아니다만.”
가하란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선배님께서 보시기엔 어떠세요?”
처음에는 한참 어린놈한테 선배라 불리는 게 낯간지러웠으나, 지금은 마공장이란 호칭보다 익숙해졌다.
“예전에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피로도가 심각해서 기존 형식을 고수하게 됐지.”
웍센은 확대경으로 체임버 하부를 살폈다. 정밀하게 깎인 쇠들이 유격 없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었다.
상부와 하부의 연결부.
뼈대인 탈로스가 제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충격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충격을 완화하고 금속 피로를 덜기 위해 주변에 완충 장치를 달기 마련인데, 가하란이 손댄 건 충격 완화 장치 쪽이었다.
“정교하구나.”
“시뮬레이션에서는 허용 범위 안쪽이었지만 실제는 다르겠죠.”
“여기하고 여기.”
웍센은 드라이버 끝으로 연결부를 툭툭 쳤다.
“이곳에 이격이 생기면 상판이 내려앉을 거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맞물려 있다면…….”
“괜찮을까요?”
“적어도 내 눈에는 괜찮아 보인다. 내가 그렸던 이상적인 모형이 이거였지. 하지만 부품을 깎아내기 어려웠다. 초정밀 단계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데, 내 정신력으로는 버텨낼 수가 없었지.”
이격에서 발생하는 흔들림.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거병 공학의 핵심이었다. 마법이란 수단으로 보조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정밀 가공은 모듈 생산의 꽃이었다.
“용로도 그렇고, 네 손끝에는 신이 내려앉아 있구나.”
“연륜을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그깟 연륜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그나저나 너한테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어렵구나. 야심 차게 따라온 것치고는 성과가 없어.”
웍센은 드라이버 끝으로 가하란의 옆구리를 찔렀다.
“노하우를 알려달라 했더니 혼자 마술을 보이고 있구나. 썩을 놈.”
“저는 선배님께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나만 손해라는 거다! 내 기술은 죄다 훔쳐 가면서 정작 내놓는 건 없다니.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장사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밀 가공의 끝을 목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듈 구조는 한 세대를 앞서 나가 있었다. 마전기를 이용한 거병을 이보다 완성도 있게 풀어낸 제작자는 없을 것이다.
고작 넉 달이었다.
유사 정령 초기 버전 제작부터 탈로스 성형에 이어 모듈 구축까지. 공장 단위로 들러붙어야 가능한 시간인데…….
“누구도 믿지 않을 거다. 넉 달 만에 혼자서 거병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반복하다 보니까 익숙해지긴 하더라고요.”
가하란이 외장갑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첫 기동은 선배님께 부탁하고 싶은데, 해주실래요?”
“늙은이를 어디까지 부려 먹으려고.”
가하란을 도와 외장갑을 부착했다.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완벽하게 맞물렸다.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부위도 있었다.
“아름답군.”
매끄러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마감 처리마저 깔끔했다. 도포한 방수제도 가하란의 창작품이었다.
기존에 쓰던 것보다 유지 기간이 길어 비용적인 측면에서 매력적이었다.
슬쩍 배합 방법을 물어봤는데, 가하란은 흔쾌히 알려주었다.
“선배님.”
가하란이 얇은 목탄을 내밀었다.
“이건 왜?”
“안쪽에 이름을 쓰셔야죠.”
“내가?”
목탄을 받아 든 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네가 하지 그러냐. 최종 검수자는 내가 아닌데.”
“선배님의 기운을 받아 보려고요.”
“덧없을 텐데.”
“그건 모르는 거죠.”
웍센은 목탄을 만지작거리다가 체임버 덮개를 들었다. 안쪽 귀퉁이에 이름을 적었다.
부디 이 사인이 사고로 훼손되는 일 없길.
“다 썼다.”
“그러면, 움직여 볼까요?”
“첫 기동까지 나한테 시키고,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
가하란은 말없이 웃고 있었다.
웍센은 시동키를 차고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조정석 높이가 딱 알맞았다. 미리 만져둔 모양이다.
장갑을 벗고 조종간을 붙잡았다.
거병에 올라타 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기동 점검은 대부분 써전에게 맡겼으니까.
덮개를 내리고 잠금장치를 건 후 벨트를 착용했다.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다.
-반갑습니다!
상단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활기찬 녀석이었다.
“그래, 반갑다.”
-오늘 움직일 수 있는 건가요?
“왜? 걱정되느냐?”
-아니요. 너무 신나서 주체할 수가 없어요!
온갖 동물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학습을 이상하게 시켰는지, 이 녀석은 신이 날 때면 동물 소리를 냈다.
“시끄럽다.”
-왜요. 신나는데.
“거참, 말 안 듣는 놈일세.”
웍센은 줄어든 동물 소리를 들으며 좌측 패널에 손을 댔다.
정말로 완성했구나.
수없이 많은 탈로스를 만들고, 거병을 제작해 왔다. 역작이라 부를 만한 생산 모델도 이 손끝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기체에 비하면 모두 한 단계 아래였다. 좋게 봐서 한 단계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급을 매길 수 없는 차이였다.
사실 기체보다 더 믿기지 않는 건 오토마타였다.
조잘조잘 떠드는 유사 정령이 제작된 지 반년밖에 안 된 녀석이라고 한다면 몇이나 믿을까?
오토마타의 학습 능력은 시간에 비례한다. 인지 통합 및 거병의 기능적인 지식은 베이스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빠르게 학습하지만, 언어 구사 능력만큼은 단기간에 습득할 수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인데, 가하란은 해냈다. 반년 만에 개성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어휘 체계를 구축했다.
전율이 찾아왔다. 이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해피.”
-네!
“걸어보자.”
-좋아요! 인지 통합을 시작할게요. 감각 확장은 1단계부터 적정 수위까지 확인하며 설정할게요.
시동키를 찬 왼쪽 손목이 따끔했다. 체임버 하부에서 소리가 났다. 마전기가 활동하며 액상 근육을 일깨우는 것이다.
시야가 잠시 번졌다가 서로 다른 상이 겹치더니, 이내 거병과 시야를 공유했다.
체임버 안쪽에 빛이 찾아들었다.
웍센은 시계(視界)를 점검했다. 소실분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주변을 살폈다.
손을 흔드는 가하란이 보였다.
“어떠세요?”
“완벽하다. 감각 공유도 매끄럽고, 시야 전환도 잘 되고 있다. 오토마타의 서포팅은 흠잡을 곳 없어.”
바람이 느껴진다.
섬세한 시스템이었다. 웍센은 거병의 왼팔로 어깨 부위를 매만졌다.
감촉이 전해진다. 약간의 이질감은 있으나 그건 신체와 거병이라는 심리적 괴리감에서 오는 것이니 괜찮았다.
-감각 확장 3단계가 적당하겠네요. 일체화에 문제없어요. 운동 지각에도 이상 없고요.
“3단계에서 이 정도 일체감이라니.”
-어때요? 저 잘했죠?
“그래. 훌륭하구나.”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요!
가하란이 옆으로 비켜서며 팔을 들었다. 손끝이 향한 곳에 격납고 출입구가 있었다.
슬며시 동이 트고 있었다.
선명하다. 시각 장치마저 품질이 뛰어났다.
-시작할까요?
웍센은 조종간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웨이브 겔이 분사되며 몸 전체를 압박했다. 마나 씰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뗐다.
오토마타의 자세 제어 서포팅을 받으며 거병이 첫발을 내디뎠다.
중심축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벼운 진동만 느껴질 뿐이었다.
다시 한 걸음.
각 기관이 유기적으로 협응하며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첫 기동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정화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격납고 밖이었다.
-뛰어볼까요?
“뛰고 싶냐?”
-네!
고개를 틀어 가하란을 바라봤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웍센은 조종간을 힘껏 쥐었다. 자세를 고정하고 의지를 발현했다.
몸이, 기체가 나아간다.
보폭이 점점 늘어나고 이내 강한 떨림이 찾아들었다.
쿵! 쿵! 쿵!
허리에 가해지는 충격이 심했으나, 곧 진정됐다. 웨이브 겔이 반동을 잡아주고 완화 장치가 제 역할을 시작했다.
-야호!
속도가 올라간다. 마을 외곽으로 빠져나감과 동시에 출력을 높였다.
지면이 깨지며 거병이 튀어 나간다.
시야가 잠시 흔들렸으나 곧 보정됐다. 눈앞에 있는 폭 4m의 균열을 향해 뛰었다.
“넘을 수 있겠지?”
-저 정도는 제 서포팅이 없어도 가능하다고요!
지지대가 된 왼발이 힘껏 펴지며 거병이 뛰어올랐다. 부유감이 몸을 휘감았다. 시야 밑으로 깔린 풍경을 보며 감탄하는 사이, 균열을 뛰어넘은 거병이 지면에 안착했다.
쾅!
묵직한 중량이 충돌하며 바닥이 움푹 꺼졌다. 지반이 생각한 것보다 허약했다.
기체가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 때였다.
-잡을게요!
해피의 목소리와 함께 거병이 몸을 틀었다. 후면부가 지면에 닿기 직전 왼팔을 휘둘러 반탄력을 주더니, 반 바퀴 회전하며 꼬꾸라지던 기체를 바로 세웠다.
웍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웨이브 겔로도 상쇄하지 못한 관성력이 배 안쪽을 건드렸다.
마른기침을 연신 토해내다가 앞을 바라봤다.
가하란이 있었다. 이놈은 대체 어떻게 쫓아온 걸까? 최대 출력으로 뛴 거병을 사람의 몸으로 따라오려면…….
가하란의 오른쪽 다리가 보였다. 증기와 함께 배터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 저게 있었지.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가하란이 살짝 경직된 얼굴을 들이밀었다.
“괜찮으세요?”
“……반쯤 죽을 뻔했다.”
“이쪽 지반 상태를 체크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아니다. 내가 신이 나서 실험터 바깥으로 나온 거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대체 뭐냐?”
웍센은 손가락을 들어 체임버 후면을 가리켰다.
“자세 제어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권한을 풀어줬다고 해도 이 정도의 제어력은 이해가 안 돼.”
“기계인형으로 쌓아온 데이터가 좀 있거든요. 벽에 부딪히고, 떨어지고, 매달리면서 차곡차곡 수집해 왔죠.”
“그런 거라면 나도 갖고 있다.”
웍센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넌 몇 대의 기계인형으로 데이터를 모은 거냐?”
가하란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쪽에 있었을 때, 마지막으로 제작한 게 1828번째였어요.”
“……됐다. 너랑 얘기하면 나만 손해지.”
웍센은 혀를 차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머진 네가 해라. 더 했다가는 내 몸이 먼저 부서질 거 같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