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그만두죠.”
밀레나는 팔에 감은 붕대를 매만지며 엔엔을 바라봤다.
“절 여기로 데려온 건 엔엔 님이신데요?”
“미안해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일족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착각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그 무엇보다 비원과 일족의 안위를 중요시한다는 걸.”
“엔엔 님은 아닌가요?”
“중요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밀레나의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아요.”
엔엔의 눈꼬리가 밑으로 처지고 있었다. 우울해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죠. 전 농담한 건데.”
“네?”
“괜찮아요. 전 엔엔 님을 탓하지도, 밖에 계신 분들을 원망하지도 않아요. 제가 말했죠? 힘을 얻는 데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칼랑이 제작한 거병이 손에 들어왔어요. 이 정도는 대가 축에도 못 끼죠.”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가 눈을 찌푸리며 슬며시 내렸다. 격하게 움직일 정도로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밀레나.”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비앙크라는 물건, 그들이 나한테 설명한 것과 너무 달랐어요.”
“속인 게 아니라 정말 몰랐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밀레나는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설명을 들어보죠.”
엔엔이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르피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어떤가요?”
“멀쩡해요. 비앙크는 문제없나요? 마나 폭발이 일어날 거 같아서 일단 뜯어내긴 했는데.”
“아무 문제 없어요. 이 레거시는 파괴가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하거든요.”
고르피가 의자에 앉으며 비앙크를 내밀었다. 새하얀 구체. 왼손으로 비앙크를 쥐었다.
“지금은 얌전하네요.”
“마나를 주입하려면 유도 장치가 필요해요. 초소형 유사 정령을 유도체로 써야 할 만큼 까다로운 레거시죠.”
“봤어요. 오토마타도 없이 유사 정령 하나만 달랑 들어가 있는 거. 인지 통합이 된 게 신기할 정도였어요.”
“비앙크의 힘이죠. 시전자의 신경과 동화돼 의지의 팔을 만들어주죠.”
“의지의 팔?”
“비앙크가 힘을 발현했을 때 인지 통합을 뛰어넘은 일체감을 느꼈죠?”
“네. 거병 몸에 제 팔이 돋아난 것처럼 생생했어요.”
“마나를 동력원 삼아 시전자의 의지를 형태로 빚어낸 거예요. 제대로 다룬다면 일반적인 거병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들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죠.”
밀레나는 비앙크를 바라봤다.
“레거시는 일회용 마법 용품 아니었나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런데.”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쓰이고 있죠. 틀린 말도 아니고요. 하지만 비앙크처럼 특별한 것도 존재해요. 마나가 아닌 의지에, 영혼에 반응하는 특수한 물건.”
“귀한 물건이네요. 칼랑의 후예분들께서 만들어내신 건가요?”
고르피가 고개를 저었다.
“지상의 모든 지성체가 레거시의 비밀을 풀어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죠. 쓸 수 있으나 작동 원리는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상태예요.”
“오토마타, 베이스 아키텍처와 같은 거군요.”
“그래요. 아주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신의 작품이죠.”
“신의 작품이요?”
“우리는 그렇게 불러요.”
비앙크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동시에 흐릿한 풍경이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손에서 힘이 풀리며 비앙크가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밀레나.”
엔엔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잠깐만요.”
두통이 밀려들었다. 이마를 찌푸리며 생각했다.
“거병에 타고 있었을 때 무언가를 봤어요. 그곳은 체임버가 아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곳이었고요.”
기억을 더듬었다.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는데, 정작 확인하려 들면 뿌옇게 변해 보이지 않았다.
뭘 봤었지?
아무리 집중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건진 게 하나 있긴 했다.
“……배가 고팠어요.”
밀레나는 멀뚱히 고르피를 바라봤다. 기현상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
“우리가 비앙크를 확인했을 때 그런 일은 없었어요. 그대는 정확히 무엇을 본 거죠?”
“모르겠어요. 조금 전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요. 잊을 만한 일이 아닌데.”
“침착하게 되짚어 봐요. 비앙크의 원리를 알아낼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르니.”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정신을 던지며 흐릿해져만 가는 기억을 잡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낼 수 있었다.
“나 자신을 만났어요. 아니, 그런 느낌이 들어요.”
“형태는요?”
“모르겠어요.”
“주변에 뭔가 특별한 상징 같은 게 있었나요?”
“온통 하얀색이었던 것 같아요.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아요.”
고르피가 고개를 주억였다.
“인지를 넘어선 기현상일 수도 있고, 마나 역류로 인한 환각일 수도 있어요. 뭐가 됐든 도움이 되는 자료인 건 확실해요.”
밀레나는 이불에 떨어진 비앙크를 다시 쥐었다.
“이건 대체 뭘까요.”
“우리도 그걸 알아내는 게 목적이에요.”
고르피가 창문을 바라봤다.
“지면에 새겨진 균열에서 증폭된 마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어요. 인간은 자신들을 신인류라 지칭하며 변화된 환경을 이용하기 시작했죠. 그 끝에 뭐가 있을지 알지도 못한 채.”
“문제가 될까요?”
“문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인간들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속도로 영토를 넓히고 있죠. 지금이야 대마수 때문에 주춤한다지만, 해결되면 어떻게 될지는 훤하죠.”
“달갑지 않으신가 보네요. 칼랑의 후예들은 인간을 배척할 건가요?”
“오래전부터 우린 인간과 교류해 왔죠. 서로 얻을 게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언제나 일정한 선을 그었어요. 우리의 비원은 인간의 욕망과 상충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엔엔을 바라보는 고르피였다.
“물론 일족의 비원에 강제성은 없어요. 역사의 망령처럼 억압돼 있지는 않죠.”
역사의 망령. 아무래도 바라라족을 뜻하는 것 같았다.
“인간과는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대들이 정도를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 역시 생각을 달리하겠죠.”
“그 반대가 될지도 모르죠.”
고르피가 눈웃음을 지었다.
“부정하지는 않을게요. 우리가 엇나갈지도 모르죠.”
“부디 그런 일이 없길 바랄게요.”
비앙크를 돌려주었다.
“그 레거시는 칼랑족 내부에서 관리하던 물건인가 보죠? 그런 게 존재한다는 소문조차 못 들어봤어요.”
마나를 매개 삼아 물질화하는 마법 용품. 거병을 지탱할 정도의 내구성이라면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저런 물건이 입소문조차 타지 않았다는 건 철저하게 관리됐다는 뜻이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죠. ‘같은 배를 탄 사이’. 같은 배에 올라탔으니 말씀드리죠. 비앙크는 우리가 관리해 온 물건이 아니에요. 그런 물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비앙크는…….”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나던 날을 기억하나요?”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면이 요동치고 하늘이 붉게 물들던 순간을 떠올렸다.
형태를 갖춘 새빨간 마나가 온 세상을 덮었고,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만 갔다.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직한 귀를 통해 우리도 대강은 파악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난 곳이 볼로스 근방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국경…….”
“그날,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해요.”
밀레나는 입술을 살며시 붙였다.
장소는 몰랐으나,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다.
신이 틀어쥐고 있던 운명이 인간에게 넘어온 날. 운명의 수레바퀴란 말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역사서 뒤편으로 사라진 날.
“그대는 뭔가 알고 있는 듯하네요.”
“비밀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요.”
“알려줄 수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쉽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가 알아내면 되니까.”
고르피가 비앙크를 들어 올렸다.
“하늘을 갈랐던 거대한 검. 그것을 목격한 우리는 곧바로 국경으로 향했죠. 그것은 정말이지…… 처참했어요. 싸움이 있었어요. 아마 초월자들의 전쟁이었겠죠. 무엇을 위한 싸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월자들.
밀레나는 협회장을 떠올렸다.
“인간들은 한동안 그곳에 접근하지 못했죠.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죽었을 테니까요. 견뎌낼 수 있는 자들만이 그곳에 나타났어요. 온갖 지성체들이 그날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비앙크는 그 과정에서 찾게 된 건가요?”
“맞아요. 우리가 먼저 발견했죠.”
밀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요. 그렇다면 비앙크란 이름은 누가 붙인 거죠? 편의상 부르는 것 치고는 뜻이 있어 보이는데.”
“각인된 이름이었어요. 최초 발견자가 이걸 쥐었을 때 이름이 머릿속으로 전해졌죠.”
두통이 다시금 시작됐다. 거병 안에서 들려왔던 작은 목소리.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아 보려 했지만, 금세 또 사라지고 말았다.
“제게 거짓말을 하셨군요.”
엔엔이 끼어들었다.
“거짓말을 한 적 없어요. 몇몇 개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죠. 엔엔, 당신은 인간과 너무 가까웠어요. 우리는 개별적이지만, 비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함께해야 해요. 하지만 당신은 인간들 사이에 있었죠.”
“…….”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신용의 문제니까요.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섭섭해하지 말고요.”
엔엔이 날카로운 눈으로 고르피를 바라봤다.
“이어받은 지도자로서 당신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이 이상 친구에게 피해를 준다면, 저는 이를 드러낼 겁니다.”
“염려하지 마요. 밀레나 님은 비앙크에게 인정을 받았어요. 거병과 동기화까지 마쳤죠. 중요한 실험체가 됐으니 최선을 다해 지원할 예정이에요.”
고르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세요. 몸 관리를 한 후에 재기동을 해보죠.”
방이 조용해졌다.
밀레나는 한숨을 짓는 엔엔을 바라봤다.
“자꾸 그럴 거예요? 사람 불편하게.”
“내 탓이에요.”
“아니에요. 아니니까 그만 우울해해요. 아, 카트시는요?”
“방에 놔뒀어요. 외관만 보면 단순한 유사 정령이니 관심받을 일도 없고요.”
“심심하다고 혼자 꿍얼대고 있겠네요.”
밀레나는 오른팔을 쓰다듬었다.
“내일쯤이면 움직여도 될 거예요. 크게 다친 건 아니니.”
상처가 욱신거리면서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순백의 팔과 상상 이상의 일체감.
“정확한 스펙이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국경을 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토록 자유로운 거병은 처음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돼요. 비앙크, 그게 만약 그날과 연관이 있다면…….”
“길리우드가 하얀 팔을 만들어 냈다고 했죠?”
엔엔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정 위험하다 싶으면 손을 뗄게요. 근데 괜찮을 거예요. 다룰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근거는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
밀레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칠 듯한 배고픔, 그리고 나. 떠오르는 건 이것밖에 없지만, 뭔가 잘 마무리된 거 같아요. 이렇게 멀쩡히 돌아온 걸 보면.”
“가하란도 그렇지만, 밀레나도 너무 겁이 없어요.”
고개를 털며 살며시 웃는 엔엔이었다. 밀레나는 엔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엔엔 님.”
“네?”
“그렇게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떤 것이든 말해봐요.”
“그, 손 좀 내밀어 보실래요?”
엔엔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밀레나는 손을 만지작거린 후 해맑게 웃었다.
“저기 목덜미도…….”
“안 돼요.”
“단호하시네요.”
손을 놓고 침대에 누웠다.
“좀 자야겠어요. 나른해지네요.”
“그래요. 푹 자고 일어나요. 상태가 안 좋으면 실험은 뒤로 미루고.”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눈을 찡긋거린 다음 느긋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 *
가하란은 눈을 떴다.
점심을 먹고 잠깐 누웠는데 깊게 잠들고 말았다. 몽롱한 시선으로 공방 내부를 살피다가 오른팔을 매만졌다.
깨어난 순간 흐릿해져 가는 꿈.
꿈에서 새하얀 공간 안에 있는 밀레나를 봤다. 성인이 된 모습이었으나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그런 모습일까. 어쩌면 생각보다 키가 안 자라 있을지도 모른다.
어릴 땐 올려다봤고, 헤어지기 직전에는 눈높이가 비슷했다. 지금은 어떨까?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가하란은 거치대에 놓아둔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일곱 대의 유사 정령이 마나를 끌어당기며 작동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