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화
“우린 이걸 다룰 수 있는 인간이 필요해요. 실험 데이터를 착실히 얻어줄 인간이. 그라운드 제로 이후 너무 많은 게 바뀌었어요. 칼랑의 후예로서 혼잡한 것들을 내버려 둘 순 없어요.”
밀레나는 체임버 안쪽을 들여다봤다.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국경을 넘을 예정이라 들었어요.”
“네. 그러기 위해서 힘이 필요해요.”
“잘됐네요. 우리는 데이터가 필요해요. 만약 이걸 다룰 수 있다면, 빌려드리도록 하죠. 사소한 부탁을 하나 더 하자면…….”
“국경을 넘게 되면 어머니께 양도하면 될까요?”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밀레나는 손을 툭툭 털었다.
“뭘 하면 될까요?”
“교감해 주세요. 그리고 기동시켜 주세요.”
“근데 팔다리 모듈이 없는데, 이대로 깨우면 되나요?”
“팔과 다리는 안에 내장돼 있어요.”
고르피가 거병의 왼쪽 어깨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성공한다면 ‘비앙크’가 팔과 다리를 만들어줄 겁니다.”
“비앙크요?”
“자세한 건 거병을 깨우고 난 후에 말해드리죠. 기동하지 않는다면 설명은 불필요하니까요.”
깨우지 못하면 얻는 것도 없다.
“인지 통합은 기존 거병과 같은 프로세스를 거치나요?”
“마법의 비중이 높을 뿐 거병인 건 마찬가지예요. 그대가 해왔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돼요.”
독특한 시스템은 아닌 듯했다.
밀레나는 체임버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시동키는 어디에 있죠?”
“시동키는 없어요. 이건 편리한 기계가 아니니까요.”
의자에 앉아 조종간을 잡았다. 낯선 냄새가 풍겨왔다. 비밀로 만들어진 거병.
비앙크라는 건 오토마타의 이름인 걸까?
“행운을 빌어요.”
고르피가 한걸음 물러섰다. 밀레나는 왼손을 뻗어 레버를 당겼다. 체임버 덮개가 닫히며 어둠이 찾아왔다.
“비앙크? 내 목소리 들려?”
일반적인 거병은 시동키를 통해 인지 통합이 이뤄진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거병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깨어 있으면 대답해 줄래?”
조용하기만 했다.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기동 시 발밑에서 느껴지는 마전기 특유의 파장도 없었다. 그 어떤 힘의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오토마타가 응답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법에 좀 더 치우쳐진 거병.”
밀레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체술을 사용했다. 주변에 퍼져 있는 마나를 끌어당겨 발바닥으로 옮긴 다음 전신으로 퍼트렸다.
높아진 청력이 바깥 소리를 잡아냈다.
“대답하지 않는 것 같죠?”
“그러니까 반대한 겁니다. 검증된 인간종에게 맡겼어야 했어요. 유단의 제의를 거절한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힘의 밸런스가 중요해요. 타리움은 너무 비대해졌어요. 우리의 지식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가면 땅 위의 지성체들에게 재앙이 닥칠지도 몰라요.”
“애초에 이렇게 모인 것부터가 어긋난 겁니다. 칼랑의 뜻을 따라 개별적으로 지혜를 갈구해야 할 자들이 한곳에 모여 욕심을 부리다니. 이러면 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코텐 그대도 제작에 참여했다는 걸 잊으셨나요?”
“전 인간족의 개입을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대재앙이라는 특수한 사건이 우릴 덮쳤어요. 칼랑의 뜻도 중요하나 일족의 안위도 고려해야 합니다.”
고상한 어투로 신나게 싸우는 중이었다. 아무 성과도 못 내고 밖으로 나가면 눈치깨나 받을 것 같았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대답해 줄래?”
체임버 왼쪽 벽을 손으로 쓰다듬을 때였다. 밀레나는 붙들어 둔 마나가 어디론가 이끌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체임버 후면 하단. 오토마타가 위치한 자리였다.
밀레나는 응집된 마나를 조금씩 풀었다. 대기로 흩어지기 직전의 마나가 체임버 후방으로 빨려 들어갔다.
-……건.
목소리였다. 방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디서 난 소리일까? 고개를 휙휙 돌리고 있을 때였다.
-……는 건.
“비앙크?”
-원하는 건?
선명해진 목소리가 귀에 꽂힐 때였다. 강렬한 빛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고 앞을 바라봤다. 분사된 빛이 한순간 사라졌다.
밀레나는 몸을 내려다봤다.
체임버 안이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조종석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서 있었다.
주변을 훑어봤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 세상이었다.
“여긴…….”
환각인 걸까? 아니면 마법이 이뤄낸 비현실적인 공간?
“엔엔!”
목소리를 크게 내봤다. 소리가 메아리도 없이 쭉쭉 뻗어나갔다.
대체 어디일까. 호기심과 두려움이 균등한 부피로 몸을 채워나갈 때였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발가벗은 아이가 바닥에 있었다.
막 태어난 것처럼 쪼글쪼글한 아이였다.
몸을 숙여 아이를 바라봤다. 감겨 있던 아이의 눈이 떠졌다. 온통 검은색인 눈과 마주했다.
-원하는 건?
아이가 물었다.
밀레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많던 생각이 사라지고, 갑자기 식욕이 들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식탐이었다. 지금이라면 쓰레기통의 오물도 기쁜 마음으로 입에 쑤셔 넣을 것이다.
다시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가 빙긋 웃었다.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지 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아니, 애초에 망상으로 이뤄진 세계였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질타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상상이니까.
미칠 듯한 굶주림만 빨리 해결하고 잠시 기다리면 현실에서 멀쩡히 눈을 뜨게 되리라.
머릿속이 식욕이란 두 글자로 잠식됐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들렸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이가 코앞까지 왔다.
-원하는 건?
아이의 목소리에서 달콤한 향이 났다. 참기 힘들었다. 미칠 듯한 굶주림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원하는 거.”
밀레나는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쭈글쭈글한 얼굴을, 핏덩이나 다름없는 몸을 바라봤다.
“만나고 싶어.”
여전히 배가 고프고 식욕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탐식보다 중요한 게 하나 있긴 했다.
말로 내뱉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들끓던 식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밀레나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웃고 있던 아이가 손가락을 쥐었다.
“넌…… 나구나.”
무엇을 이해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언가가 밀려들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아이가 사라졌다.
순백의 세계도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흐릿한 어둠에 싸인 조종간이었다.
돌아왔다.
밀레나가 격하게 숨을 내뱉을 때였다.
마나가 격동했다. 붙잡아 둔 마나뿐만이 아니라 체임버 주변의 마나들도 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체임버가 흔들렸다.
어둠이 흩어지고 빛이 찾아들었다. 인지 통합이 이뤄지며 거병과 시야를 공유했다.
떨림이 심해졌다. 기체 앞에서 대기 중이던 칼랑족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밀레나는 좌우를 바라봤다.
연결부에 덧대져 있던 외장갑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까앙, 맑은 쇳소리와 함께 외장갑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새하얀 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부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백색 물질로 이뤄진 발이 거병의 몸체를 지탱했다.
떨어져 나갔던 외장갑이 순백의 팔다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콰득!
맞물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밀레나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팔을 바라봤다.
감각 확장 7단계에서도 체험해 보지 못한 일체감이었다. 새로이 돋아난 하얀색 팔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팔을 움직였다. 조정이 완벽하게 끝난 거병처럼 지연이 없었다.
손목을 앞뒤로 뒤집어 봤다. 손가락도 움직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초정밀 모듈에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다.
“성공했군요.”
고르피가 다가오며 말했다.
“이게 대체 뭐죠? 이건…….”
“마법이에요. 레거시가 이뤄낸 기적.”
“레거시요?”
그때였다.
오른팔 근육이 날뛰기 시작했다. 밀레나는 조종간에서 손을 뗐으나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
“물러나세요!”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외침과 동시에 거병의 오른팔이 지면을 쓸었다.
쿠우웅!
격납고 바닥이 쓸려나갔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역시나 칼랑족. 외치기 전에 이미 피하고 있었다.
“이거 왜 이러죠?”
“역류일 수도 있어요. 마나를 차단해요.”
“하고 있어요! 하지만…….”
신체술은 진즉에 풀었다. 그럼에도 체내를 거쳐 체임버 뒤편으로 마나가 흘러가고 있었다.
밀레나는 왼팔로 오른손 손목을 움켜쥐었다. 경련이 점점 더 심해졌다. 혈관이 날뛰다 못해 피부를 뚫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돼.
조종석에서 일어나 후면 하단부를 바라봤다. 덮개가 보인다. 이 안에 오토마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덮개를 뜯어냈다.
“……오토마타가 아니잖아.”
안에 놓여 있는 건 완성된 오토마타가 아닌 자그마한 유사 정령이었다.
인지 통합을 위한 최소 기능만 탑재해 놨는지 카트시보다도 작았다.
불러도 대답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의사 능력 따위는 없을 테니까.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다. 흘러간 마나는 유사 정령 밑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팔 피부가 찢어지며 피가 튀었다. 가닥가닥 나뉜 근육들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밀레나는 왼손에 단검을 쥐고 유사 정령 밑 합판 사이에 찔러 넣었다.
합판을 들어내자마자 하얀색 구체가 보였다. 그게 마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밀레나는 요동치는 오른손으로 구체를 쥐고 잡아 뜯었다. 촘촘하게 박혀 있던 커넥터들이 일시에 분리됐다.
쿵.
기체가 주저앉았다.
날뛰던 마나가 대기 속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밀레나!”
엔엔이 체임버 덮개를 열어젖히며 외쳤다. 밀레나는 어설픈 미소를 보이며 오른손에 쥔 구체를 내보였다.
“고장인가 봐요.”
“그 손…….”
“별거 아니에요.”
엔엔이 고개를 홱 돌렸다. 옆얼굴이 살짝 보였는데, 화가 난 표정이었다.
“일족의 안위만큼이나 제 친구의 안전도 중요합니다. 당신들은 절 속였어요.”
“엔엔.”
“지금부터 전 당신들에게 제 이름을 허락하지 않겠어요. 당신들은…….”
엔엔의 회색 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이 맹수의 것으로 변해간다. 도톰한 손가락 사이로 예리한 손톱이 나오는 것도 봤다.
“엔엔.”
밀레나는 엔엔의 팔을 붙잡았다.
“전 괜찮아요.”
“하지만…….”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저한테는 힘이 필요했고, 힘을 대가 없이 얻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밀레나는 엔엔의 등을 토닥였다.
화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오히려 침착해진다. 엔엔의 부축을 받으며 체임버 밖으로 나왔다.
고르피가 다가왔다. 표정에 변화는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온화했다.
밀레나는 칼랑족을 조금 이해하게 됐다. 엔엔이 유달리 인간에게 호의적이라는 것도.
“이게 비앙크인가요?”
“맞아요.”
“사납던데요.”
“그러니 길들일 가치가 있죠. 어떤가요? 실험을 도와줄 건가요?”
밀레나는 비앙크를 보며 말했다.
“좋아요. 도와드리죠. 대신, 아주 오랫동안 이 거병을 빌려 가야겠어요.”
“마음껏 쓰세요. 그대가 다뤄주는 동안 데이터가 쌓일 테니.”
쥐고 있던 비앙크를 던졌다.
“잠깐 쉴게요.”
밀레나는 갈라진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