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28화 (428/558)

제428화

“왜 아무 말도 안 해?”

아르드헨은 마주 오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얼떨떨한 모습으로 바라보던 남자를 뒤로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테인이 말했다.

“아무거나. 난 네가 입 다물고 있을 때가 가장 무섭더라.”

“무섭다는 개념을 알고 계셨군요.”

“무서운 거야 많지. 자리를 빼앗기는 것도 무섭고, 나이를 먹는 것도 무섭고.”

‘지혜의 관’이라 불리는 학회 중앙 건물을 나섰다.

“가을이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쪄 죽는 줄 알았는데, 신기하단 말이지.”

“이러다 곧 겨울이 오겠죠.”

“난 겨울이 싫어. 낮이 짧거든.”

테인이 왼쪽 뒤편에 섰다.

“기계였는데 살기가 느껴졌습니다. 학회장이 만든 장난감은 하나같이 희한합니다.”

“재능이 있어. 그러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갔겠지.”

“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까요?”

“나야 모르지. 우리가 아는 ‘계를 여는 방법’ 말고도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으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알고 있을 뿐, 모든 걸 파악한 건 아니잖아?”

아르드헨은 걸음을 멈추고 테인을 바라봤다.

“그래서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제가 말려야 속이 시원하시다면 말려 드리겠습니다.”

“그건 안 되지. 학회장하고 친분을 텄는데, 저 친구 앞길을 막으면 내 앞길도 불투명해져.”

“그러면 내버려 두겠습니다.”

“걱정되지 않아? 그러다 계에 도달하면 대형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는데.”

“때가 돼 필요해지면 말씀하십시오. 검을 뽑겠습니다. 그전까지는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어.”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죠. 전 실수를 해결하는 용도로 사용돼도 상관없습니다.”

“과한 충성은 부담스러워.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니까.”

과일상에게 청사과 두 개를 샀다. 하나는 입에 물고 다른 하나는 테인에게 던졌다.

“계를 열어서 사고가 날 수도 있죠.”

테인이 사과를 훑으면서 말했다.

“누구나 다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주술사님의 힘을 빌리면 약간의 착오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문제가 될 요인을 찾아 도륙할 수도 있죠. 그 과정에서 몇몇 무고한 사람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대다수를 위한 길이니 어쩔 수 없죠.”

아르드헨은 사과를 와작 씹으며 테인의 말을 들었다.

“학회장이 계를 열 가능성이 있다. 지금 죽여두면 편하긴 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을 잃게 되겠죠. 갓 태어난 아이가 살인범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그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였으니까요.”

“표현이 삭막해. 죽일 필요라니.”

“죄송합니다.”

아르드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그저 내 이득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야. 그런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아르드헨은 손목을 빙글 돌렸다.

좌우로 베어 먹은 사과.

“어차피 양면이야. 외계를 대비하려면, 계에 도달할 정도의 재능 있는 자들이 필요해. 폭발물도 필요한 순간에 터트리면 요긴하지. 시장에서 터지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러니 터지기 전에 말씀해 주십시오.”

“그걸 다 알고 있었으면 내가 이 꼴이겠나. 난 말년에 편안하게 섭정하며 인생을 끝내려 했어. 근데 세상이 뒤바뀌어 민심을 얻기 위해 쇼를 하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아르드헨은 시장 한복판에서 눈물을 짜내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고 힘껏 외쳤다.

“아이의 부모를 찾습니다! 확인 좀 해주세요.”

몇 번 외치자 젊은 여자가 다가와 아이를 넘겨받았다. 고맙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르드헨입니다. 먼 곳에서 시장을 하고 있죠. 저는 언제나 여러분의 편이니 무슨 문제가 있으시다면 제 사무실을 찾아와 주세요.”

여자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떠났다.

“폐하.”

“시장님.”

“예, 시장님. 그 멘트는 안 바꾸실 겁니까?”

“미스터 리가 추천해 준 거야. 민심을 얻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고.”

“제가 볼 땐 시장님을 놀리려고 한 말 같습니다만.”

“멘트가 구려도 내 매력이면 충분하지.”

저만치 멀어진 여자가 뒤돌아보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아르드헨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봤지?”

“가끔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 어떤 일을 벌이실지.”

“투표로 연임할 수 있도록 법 뜯어고치고, 슬쩍 의회를 끼워 넣어서 시의회의 힘을 약화해야지.”

“단언컨대, 칼리고 씨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곧바로 시민을 규합해 궐기하겠죠.”

“그러니까 그놈을 암살해야 일이 편해져.”

“그것만큼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애초에 총무님께 권한을 실어준 건 시장님이십니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나! 의회 견제하려고 만들어둔 칼인데, 칼날이 매번 내 목 밑에 있어. 허스한테 부탁해 볼까?”

“협회장님에게 말을 걸기 전에 구치 씨한테 저지당하실 겁니다.”

“그 친구도 깐깐하지.”

아르드헨은 혀를 찼다.

“편하게 놀고먹고 싶다. 진심이야.”

“다음 예정지로 가시죠. 아직 놀고먹기에는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테인이었다.

* * *

둔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다.

일주일 정도는 말을 타고 달렸고 그 뒤로는 하염없이 걸었다. 아니, 뛰었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발을 움직였다. 어디로 향하는 중인지 몇 번이고 물었으나, 엔엔은 곧 도착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 왔어요.”

밀레나는 엔엔의 말을 들으며 걸음을 멈췄다. 무릎이 뻐근했다. 스콜라 생도 시절에도 이런 강행군은 없었다.

“정말 다 온 거 맞죠?”

“이번에는 정말이에요.”

-이틀 전에도 그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엔엔 등에 매달려 있는 카트시가 말했다.

“자, 봐요.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니까.”

엔엔이 서 있는 절벽으로 걸어갔다. 절벽 아래, 분지가 보였다.

벌목된 나무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오밀조밀 지어진 집이 보였다.

주거지로 보이는 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네모반듯한 건물이 보였다.

격납고 같았다.

“가죠.”

엔엔이 몸을 날렸다. 절벽을 한 번 차더니 급경사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밀레나도 엔엔의 움직임을 모방해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신체술을 사용하면 쉽게 소화해 낼 수 있는 동작이었다.

“설명은 해놨지만, 동지 중에는 반기지 않는 자도 있을 거예요.”

“설득은 제가 해볼게요.”

말을 주고받으며 길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이 보였다. 공터에 칼랑족이 모여 있었다. 열 명 남짓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새하얀 털을 지닌 칼랑족이 앞으로 나섰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르피 님.”

사전에 설명을 들었던 터라 자연스럽게 이름을 언급할 수 있었다.

“눈이 정말 필렌 님을 닮았네요.”

“어머니를 아시나요?”

“거병 관련 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아주 호쾌한 사람이었죠. 제 털을 몇 번이고 매만지는 통에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어머니 대신 사과드릴게요.”

“호호, 괜찮아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니까요.”

사나운 눈동자와 달리 고르피의 목소리는 푸근했다. 연륜이 느껴진다.

밀레나는 고르피 오른쪽 뒤에 있는 칼랑족을 바라봤다. 두 쌍의 눈이 탐탁지 않다는 듯 씰룩이고 있었다.

반면 왼편에 있는 칼랑족은 온화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알아보기 쉬워서 그나마 다행이네. 밀레나는 양쪽 모두에게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엔엔을 통해 이야기는 들었겠죠?”

“네.”

“여독을 풀 시간을 주고 싶지만, 우리도 애가 타서요. 지금 당장 확인해 보고 싶은데.”

“저야말로 부탁드릴게요.”

“씩씩하네요. 좋아요.”

고르피가 몸을 돌렸다. 다른 칼랑족들도 고르피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응이 격하진 않네요.”

속삭이듯이 엔엔에게 말했다.

“다짜고짜 반대할 정도로 한심한 자들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밀레나의 역량이 모자란다고 판단하면, 바로 물어뜯을지도 몰라요.”

“그건 조심해야겠네요.”

밀레나는 카트시를 향해 말했다.

“답답하더라도 참아. 네가 말하기 시작하면 저분들이 널 뜯어보려 할 테니까.”

-털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입을 열 정도로 용기가 있진 않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엔엔뿐이에요.

카트시가 조용해졌다. 당분간 말을 안 할 것이다.

“개발 중인 유사 정령이라 소개하면 되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마세요.”

“네. 카트시에 관한 건 엔엔 님께 맡길게요.”

주거지를 지나 커다란 건물 앞에 섰다. 예상했던 대로 격납고였다.

거병 제작소에서 봤던 장비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제작하다가 도중에 멈춘 듯한 거병들도 여러 대 보였다.

“안쪽에 있어요.”

격납고로 들어갔다. 출입구를 통해 스며든 햇빛이 분해된 거병을 비췄다.

몸체는 완성돼 있었으나 팔다리 모듈이 안 보였다.

고르피가 미완성된 거병 옆에 섰다.

“이게 밀레나 님에게 부탁할 물건이에요.”

“이건…….”

“미완성품으로 보이겠지만, 이미 완성된 물건이에요. 아니지, 어떤 의미에서는 미완성이겠네요.”

밀레나는 거병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체임버 덮개가 놓였다. 손을 들어 외장갑을 만져봤다. 탁한 은빛이 감도는 장갑. 결은 매끄러웠다.

“제가 본 거병과는 사뭇 다르네요.”

“조금 특수한 연결체를 사용해 봤거든요.”

밀레나는 옆면을 바라봤다. 왼팔 모듈 연결부가 보여야 할 자리에 외장갑이 부착돼 있었다. 이 상태로는 모듈을 달 수 없을 텐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체 모듈이 결합돼야 할 자리에도 두꺼운 외장갑이 장착돼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겹겹이 쌓인 외장갑이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달아둔 거지?

몸통만 덩그러니 있는 거병이라니.

“기존의 거병은 마법 공학 중 공학의 비중이 컸지만, 이건 마법의 비중이 커요.”

“마법이요?”

고르피가 체임버 덮개에 손을 올렸다. 덜컥 소리와 함께 덮개가 들렸다.

내부는 여타 다른 거병과 다를 바 없었다.

“이 거병은 칼랑을 위해 제작됐어요. 하지만 여기에 쓰인 매개체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거였죠.”

“인간만이 쓸 수 있다는 거죠?”

“그래요. 그래서 연이 닿은 인간에게 부탁하려 했지만, 일이 꼬여버렸죠.”

엔엔도 설명해 주지 않은 이야기였다. 집중해서 고르피의 입을 바라봤다.

“1순위는 그대의 어머니, 필렌 님이었죠. 하지만 이 땅을 떠난 지 오래돼 연락이 닿지 않아요.”

“연합 도시로 넘어가셨거든요. 대마수 때문에 이동도 어려워졌고.”

“그래요. 그다음 순위가 비일 님이었죠.”

“……그분도 어머니와 같이 있죠.”

“네. 그래서 테인이란 분께도 부탁해 보려 했으나, 거절당했죠.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당대 최고의 기사들 이름이 언급됐다. 밀레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물었다.

“허스 님께는…….”

“그분은 해당 사항이 없어요. 거병을 조종하지 못하거든요.”

“정말요?”

“네. 애초에 거병이 필요 없기도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엔엔 추천으로 그대를 초대하게 됐어요. 우린 인간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아는 인간이 몇 없거든요. 일로는 엮여도 개인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방침이라.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인간을 섭외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그래서 저한테도 기회가 온 거군요.”

고르피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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