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27화 (427/558)

제427화

“타리움 수석 회의 말고 개인적으로 한번 뵙고 싶었는데, 연락을 드려도 답변이 없고. 그래서 온 김에 직접 찾아왔죠.”

“중간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연락을 받았다면 제가 초대했을 텐데.”

유단은 아르드헨에게 자리를 권한 후 시선을 뒤쪽으로 던졌다. 무뚝뚝한 사내가 정면을 응시한 채 서 있었다.

테인 오첸.

늙은 호랑이만큼이나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테인 경도 앉으시죠.”

귀족이 몰락한 이후 ‘경’의 호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몇몇 인물에게는 아직도 쓰이고 있었다.

테인 역시 그러한 인물 중에 하나였다.

“감사합니다만 전 여기 서 있겠습니다.”

“이 친구야, 학회장님께서 마음 써주신 건데 물리면 쓰나.”

“앉으면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저야 무슨 일이 벌어지든 괜찮습니다만, 시장님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서 있겠습니다.”

테인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아르드헨은 못 말리는 친구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뒤에 있는 고지식한 친구는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잘 웃지도 않습니다. 제 앞에서는 아부도 잘 떠는 친군데, 숫기가 모자라…….”

“이상한 소리 그만두시죠, 시장님.”

테인이 시장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아르드헨이 눈을 찡긋거렸다.

“예전에는 제 말이면 끔뻑 죽었는데 이제는 절 가르치려 듭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어요.”

“충직한 분을 곁에 두셔서 부러울 따름입니다.”

유단은 직접 차를 내왔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학회장님께서 드시는 건데 입에 맞겠죠.”

아르드헨이 한 모금 마신 후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권력의 맛이 나요.”

“마음에 드셨다면 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기서 마셔야 이 맛이 사는 차인 것 같네요. 제 허름한 집무실하고는 운치부터가 달라서.”

“부끄럽습니다.”

유단은 찻잔에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시장님과 긴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처리해야 할 안건들이 쌓여 있어서요.”

“바쁘신 분 오래 붙들고 있을 순 없죠.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인간도 아니고.”

염치라.

‘유단’을 떼어내고 난 후부터 감정에 무뎌지고 온전히 이성으로 작동하게 됐는데, 아르드헨 입에서 나온 염치란 단어를 듣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역시 이 인간하고는 안 맞는다.

자기 잇속을 위해서 뭐든 하고 말 인간. 염치와 가장 먼 인간.

수석 회의가 있는 날이면 아르드헨은 열변을 토해냈다. 뭐 하나라도 더 챙겨 보겠다고 펼치는 웅변. 보고 있으면 진이 빠졌다.

아르드헨은 겸양을 모른다.

예의상 거절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기에 경박하다.

그런데도.

“좋네요, 좋네.”

유단은 넉살 좋게 웃고 있는 아르드헨을 응시했다.

훤히 보이는데 읽어낼 수가 없었다.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감추거나 뒤로 일을 꾸미는 법이 없었다.

때론 천박할 정도로, 옛 황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 내보였다.

보이는데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그대로 이해하려 해도 감각 저 깊은 곳, 기계가 아닌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직감이란 놈이 속삭인다.

저 모습을 믿지 말라고.

유단은 눈을 흘겼다. 간파하지 못한 상대와 마주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오라클과 정식 계약한 클랜이 일곱 곳 정도였죠?”

아르드헨이 운을 뗐다.

“예.”

“오라클에서 운영하는 거병은 아주 특수하죠. 마법을 다루는 거병. 정말 탐나는 물건이에요. 그걸 개발하신 학회장님의 뛰어난 두뇌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들은 것과 다르군요. 이론부터 설계까지 학회장님께서 혼자 해내셨다고…….”

“와전된 소문입니다. 발전은 혼자서 이뤄내는 게 아니니까요.”

“그만한 능력을 지니셨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이리도 겸손하시다니. 역시 구세주라 불릴 만합니다.”

“전 그 호칭이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글쎄요. 전 시장님 같은 성격이 못 돼서.”

“제 성격이요?”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좋은 의미로 쓴 건데 오해할 여지가 있네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제 성격 모난 거야 잘 알고 있죠. 얼마나 모났으면 전 국민에게 욕을 처먹었을까요.”

아르드헨이 너스레를 떨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이 자꾸 딴 길로 새네요. 바쁘신 분 계속 붙잡으면 안 되는데. 음, 본론을 꺼내죠.”

유단은 늙은 호랑이의 입을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여까지 온 걸까. 오라클로 서문을 연 걸 보면 제조 시설에 관한 문제일까?

“학회장님.”

“예.”

“저 기억 안 나십니까?”

아르드헨이 빙긋 웃었다.

질문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뭘 떠보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모르겠다, 네.”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늙은 호랑이였다.

“그라운드 제로 후 1년 정도가 지났을 때죠. 전 학회장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이 경직될 뻔했다. 유단은 의도적으로 몸을 크게 움직여 찻잔을 쥐었다.

“어릴 적이라 하심은.”

“학회장님께서 열 살 정도 되셨을 때죠? 그보다 어릴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대화해 본 건 아니라서요.”

“그랬었군요. 죄송합니다, 당시 워낙 어리고 눈앞에 닥친 일들이 많아 기억이 흐릿합니다.”

“그럴 수 있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죠. 그런 참사를 겪고도 정신이 멀쩡한 쪽이 이상한 거고요.”

유단은 웃으며 차를 마셨다.

몸의 주인을 떼어낸 순간,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 날아가 버렸다. 종종 데자뷰처럼 옛일이 떠오르긴 하지만 상세하지 않았다.

“저는 격려차, 그리고 신도시 안을 상의하고자 둔을 찾았었죠. 당시 둔은 정말 처참했습니다. 성도만큼이나 피해가 심했죠.”

유단은 잠자코 옛 황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자가 무얼 원하는지, 혹은 무얼 의심하는지 알기 전까지 입을 뗄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을 봤죠. 절 원망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 의아해하는 사람, 의지하려는 사람. 그 사이에 학회장님도 있었습니다.”

“그랬었군요. 저는 그때 어떤 눈으로 시장님을 보고 있었을까요?”

“눈이라.”

아르드헨이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아잔탄스 가를 기억하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튤립 전쟁. 그걸 잊을 순 없죠.”

당시 기억이 되살아났다. 흐릿하긴 하지만 대중 앞을 지나가는 황제를 본 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든 정보와 기억을 취합해 대답했다.

“아, 어렴풋하게 기억났습니다. 저는 시장님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유단’은 말했었다. 황제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고.

“예! 맞습니다. 기억이 나셨군요.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하하, 어릴 때라 철이 없었나 봅니다. 튤립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 그러니 황제를 원망해야 한다. 어린아이의 단순한 논리였죠. 세상은 그런 게 아닌데.”

여유를 되찾았다. 기억의 모호함도 이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황제의 의도는 여전히 알 수 없으나 대응할 수 있으리라.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학회장님.”

“예.”

“저는 말이죠, 다른 거에 신경 안 씁니다. 제가 통치할 땅, 그리고 사람만 멀쩡하다면 그 안에서 어떤 경쟁이 벌어지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가끔 모든 걸 치워 버리려는 이상한 작자들이 나타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남의 밥상을 멋대로 치우려고 하다니? 이 얼마나 괘씸한 놈들입니까.”

“마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마수 역시 제가 통치해야 할 대상입니다. 전 그것들을 이용해 사업을 할 생각이니까요.”

“하하, 사업이라. 시장님의 꿈은 제가 감히 재단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시군요.”

“제가 원체 욕심이 많아서요.”

옛 황제가 슬며시 일어섰다.

“볼일 다 봤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게 끝인가?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정말 인사차 왔다는 건가?

“나중에 찾아오시면 제대로 맞이하겠습니다.”

같이 일어서며 말했다. 붙들어서 의중을 캐물을 수 없으니 지금은 보내야 했다.

“그 약속 꼭 지키셔야 합니다.”

“그럼요.”

“또 바뀌시면 안 됩니다. 다음에 왔을 때 또 바뀌어 있으면, 제가 난처하니까요.”

아르드헨이 손을 내밀며 한 말이었다. 유단은 그 손을 붙잡지 못했다.

바뀌었다.

맥락에 맞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였다.

눈꺼풀이 세상을 잠시 덮었다가 들렸을 때, 뒤쪽에 있던 테인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유단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었다. 간이 이동체 앞에 테인이 있었다.

테인은 검집의 끝으로 체시를 정확히 가리켰다.

“이 장난감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어허, 이 친구야! 남의 집무실에서 뭐 하는 짓이야. 이상한 짓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

아르드헨이 손짓하자 테인이 검집을 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학회장님. 전 학회장님이 어떤 사람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든, 정당한 대가와 다소 지저분한 암투로 그 자리를 얻어냈으니까요. 아주 바람직합니다.”

미소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뇌가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하느라 사소한 것들을 놓치기 시작했다.

“바깥의 힘이 아닌 안쪽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니 문제없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누구도 알지 못할 겁니다. 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 반응. 앞으로도 그렇게 대응하세요. 그렇게만 하신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유단이라 여길 겁니다.”

아르드헨이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어요. 원하는 게 있으면 얻어야죠. 빼앗아서 정당화시키면 그게 선입니다. 당신은 나와 닮은 점이 많아요.”

사람의 손이건만, 마치 악마의 손처럼 느껴졌다. 유단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자리 간수 잘하시고. 혹여나 이 세상 바깥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얼른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타협꾼이며 일개 감시자지만, 당신이 큰일을 벌이게 된다면…… 그땐 재미없는 친구와 면담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 쥐고 있는 것으로만 놀아요. 저도 어울려 줄 테니.”

아르드헨이 손을 격하게 흔든 후 뒤로 멀어졌다.

“아, 어릴 때 당신의 눈 안에는 두 사람이 존재했어요. 하나는 날 증오하며 원망하고, 또 동시에 선망했죠. 다른 하나는 날 보며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았고요. 지금의 당신은 후자인 것 같네요. 아니, 어느 쪽이든 둘 다 유단이었을까요?”

다음에 또 보자며 문밖으로 사라지는 옛 황제였다. 유단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읽혔다. 그것도 완벽하게.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옛 황제가 다시 문을 열었다.

“계는 열지 마세요. 당신은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까. 그거 열면 진짜 큰일 나요. 뭐, 열고 싶으면 열어도 되고.”

이젠 진짜 갑니다, 아르드헨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주 잠깐이었어. 네가 들켰다는 걸 인지한 순간 내 본체 쪽으로 신호를 보내려고 했어. 그걸 그 인간이 읽어냈어.

“테인 오첸. 그건 괴물이야.”

-맞아. 괴물. 나타 때도 한두 명씩 보이던 괴물. 기계 같은 인간. 아니, 인간을 초월한 인간.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너 의심받고 있어.

유단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멍했던 머리가 점차 맑아진다.

“괜찮아. 시장은 날 방해할 생각이 없어.”

-그 말을 믿어?

“믿어. 시장이 말한 대로 그는 날 닮았으니까. 우리가 선을 넘지 않는 한 괜찮을 거야.”

-하지만 우린…….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어. 2차, 3차 실험은 배제하고 단번에 끝내야 해. 시장의 말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순간, 무언가가 찾아올 테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과 마주하는 순간 끝나리라.

-데드라인은 언제나 날 흥분시키지. 좋아. 해보자.

“성급하게 하지는 마. 완벽한 게 더 중요해.”

-알아.

간이 이동체가 침묵했다.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냈다.

이게 식은땀이라는 건가.

젖은 수건을 보며 옅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