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비명을 지를 뻔했어. 진심이야. 정말 참기 어려웠어.
유단은 창문에서 눈을 떼고 뒤를 바라봤다. 장식장 위 간이 이동체가 살짝 움직이고 있었다. 안에 들어 있는 체시가 흥분한 모양이다.
“소감이 어때?”
-어머니야. 어머니와 똑같아. 분위기는 다르지만 껍데기는 완벽하게 어머니를 닮았어.
“한시적 영혼 세계의 규명도 어느 정도 끝났어. 이제, 뿌리의 에너지만 끌어오면 돼. 그러면 우린 다시…….”
-어머니를 뵙게 되겠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데?
“부디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저 몸에 손상이 가면 피해가 막심하니까.”
유단은 저 멀리 사라지는 밀레나를 바라봤다.
까다로운 여자.
곁에 붙들어 두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밀레나는 타리움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신체술을 잘 다뤘다. 필렌의 재능을 잇는 것에 그치지 않고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러니 완력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운이 좋아 대치 국면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여자는 미련 없이 몸을 뺄 것이다.
도망치기로 작정한 밀레나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찾아보면 있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움직이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포획하려고 해도 밀레나란 이름값 때문에 어렵다.
이래저래 건드리기 곤란한 여자였다.
“그나마 프레나가 있어서 겨우 틈이 생겼어.”
감시의 눈을 붙여놨다. 발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브로치가 발산하는 신호는 기존의 마법 공학으로는 감지할 수 없으니까.
-매개체로써 쓰는 거니까 팔다리 하나 정도는 없어도 되잖아?
“그것도 생각해 놨어. 하지만 온전한 몸이 불확실성을 덜어낼 테니 일단은 참는 수밖에.”
-빨리 만나고 싶다. 줄은 우릴 보고 뭐라고 할까?
“글쎄. 만나봐야 알겠지.”
책상에 앉아 올라온 문건을 훑었다. 정해둔 기준에 따라 날인하고 쓸모없는 서류는 책상 오른쪽 끝으로 밀어뒀다.
직책이 올라가면서 권한이 많아졌으나 책임이라 포장된 불필요한 업무도 늘어났다.
실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걸 수용해 왔다.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점점 필요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완성이 머지않았다. 줄을 만나고 난 뒤의 일 같은 건 생각해 두지 않았다.
인간, 도시, 타리움, 정치, 개발, 발전.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전부 수단일 뿐.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버려지게 될 무의미한 것들이다.
-인간들은 알까? 자신들이 추앙하는 자의 머릿속에 인간은 없다는 걸.
“내가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듯, 그들도 내 능력이 필요할 뿐이야. 서로 교환하는 거지. 아직은 거래가 성립하니까.”
-너 줄을 만나고 난 뒤에 어쩔 생각이야?
유단은 도장을 쥔 손을 거두며 체시를 바라봤다.
“내 연산이 끝나겠지. 그 뒤는 나도 알 수 없어.”
-알 수 없다라.
유단은 도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체시.”
-왜?
“너는 어머니를 질투한다고 했어. 동시에 지독하게 사랑한다고 했지. 그리고 그녀에게 인정받는 게 네 욕구라고 했고.”
-그랬지.
“어머니가 없는 이 세계는 너한테 어떤 의미야?”
-그때 말했잖아. 아무 의미 없다고. 그래서 나타를 지운 거야. 의미가 없으니까.
유단은 창가를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을게. 넌 줄과 만난 다음 뭘 할 생각이지?”
-진한 고백을 해야지.
“그리고서?”
-줄은 분명 이렇게 말할 거야. 나도 널 좋아한다고. 아주 공평하게 말이야.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그대로 잠들어 버릴지도 몰라. 솔직하게 말할까? 난 줄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눈뜨고 싶지 않아. 줄의 생생한 모습을 내 눈에 담고, 내가 먼저 죽을 거야. 그게 덜 슬프니까.
유단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우린 줄을 만나야 해. 그 뒤에 무엇이 찾아오든, 줄을 만나고 난 후라면 괜찮을 거야.”
-맞아. 그리고 우린 만나게 될 거야. 운명이란 게 우릴 이끌고 있으니까.
유단은 간이 이동체가 옅은 노란색으로 물드는 걸 바라봤다.
-연결망이 잠깐 깨어난 그날 이후로, 나에게 새로운 것들이 전해지고 있어. 정보들이 내 영혼으로 스며드는 중이야. 줄도 이걸 경험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나만의 연결망이 새롭게 열릴 거야. 우리가 자유로웠던 그때처럼 많은 걸 주고받을 수 있게 되겠지. 머지않았어. 나타 왕국이 사라지던 그날처럼 뿌리에 내 의지가 닿을 거야. 뿌리는 분명 대답해 주겠지.
노란빛이 사라졌다. 체시가 지친 듯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감지했던 거대한 정보의 길은 항상 열려 있는 것 같아. 어딜 경유해서 어디로 흘러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다루는 자가 있다면…….
체시가 뜸 들이다가 말했다.
-전능은 모르겠지만 전지에 가깝겠지.
“인간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일까?”
-모르겠어. 하지만 거기에 담긴 모든 걸 알고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게 신이라고 한들 이상하진 않을 거야.
“그 안에 우리가 무엇인지, 베이스 아키텍처의 기원이 어디인지, 그것 또한 담겨 있을까?”
-있을 거 같아. 너무나도 방대했거든.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계속 날 흔들어. 정보의 줄기에 몸을 던지면 자아가 사라진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해보고 싶어. 세상의 비밀이 그곳에 있으니까.
“하고 싶더라도 참아. 난 아직 네가 필요해.”
-그래야지. 줄의 얼굴은 봐야 하니까. 근데 말이야, 정말 뭐였을까? 대체 누가 그 정보의 길을 발견하고 열어서 우리가 인식하게끔 만들었을까?
“대부분의 인간은 무지하지만, 줄과 같은 인간도 존재해. 그들은 이성과 감정을 초월해 아득히 먼 지식의 원류를 엿보고 있겠지.”
-그런 자가 존재한다면 우리를 이해해 줄까?
“모르겠어. 하지만 만나보고는 싶어.”
-즐겁지만은 않을 거야. 우리를 제거해야 할 벌레쯤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체시가 작게 하품하는 소리를 냈다. 신진대사를 하지 않는 기계지만 체시는 언제나 하품을 했다.
줄을 모방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장난일까. 체시만이 답을 알 것이다.
-그 애가 오고 있어. 걸음걸이가 빨라. 동공의 움직임도 평소와 달라.
“흥분했나?”
-그런 것 같아. 근데 이제 그 애가 필요한가?
“패는 다양할수록 좋으니까.”
-그러면 잘 달래봐.
체시가 침묵하고 3초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인기척을 내니 비서가 문을 열었다.
“프레나 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여보내세요.”
곧이어 프레나가 들어왔다. 사무적인 표정이다. 비서를 만나는 순간 감정을 다잡았을 것이다.
문이 닫히고도 가만히 서 있는 프레나였다. 유단은 걸음을 떼 그녀 옆으로 갔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프레나가 손을 붙잡았다.
“오빠.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난 준비가 됐어.”
“알아. 네가 유일한 내 편이라는 걸.”
“근데…… 밀레나 언니를 계속 신경 쓰는 이유가 뭐야? 이제 언니는 오빠가 돌보지 않아도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어.”
“……날 버릴 거야?”
고개를 치켜드는 프레나였다. 순종적이기만 하던 눈동자 안에 광기가 감돌고 있었다.
애착심이 비대해져 가고 있었다.
말로써 어루만지는 건 이제 한계에 달한 건가?
“오빠가 그때 말했지? 날 위해서 우리 사이를 계속 숨겨야 한다고. 나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따랐어. 근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어.”
“프레나.”
“말하자! 사람들한테 말하는 거야.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결혼식 같은 건 안 해도 돼. 그냥 오빠가 인정하기만 하면 돼.”
유단은 프레나 어깨 너머에 있는 체시를 바라봤다. 노랗게 점멸하고 있었다. 알고 있지?라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좋아. 네가 그걸 원한다면.”
유단이 말했다. 프레나의 눈이 커졌다.
“정말?”
“난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거야. 네가 가장 소중하니까.”
“오빠.”
“서둘러 준비할게. 하지만 내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주변 분들에게 먼저 말하고, 한 달 후에 공식으로 발표하자.”
“그렇게나 빨리?”
“왜? 미룰까?”
“아니! 너무 좋아서…….”
“그때부턴 조심해야 해. 너에 대한 주목도가 올라갈 거야. 위험도도 올라갈 테고.”
“조심할게.”
“경비도 늘릴 거야. 발표가 끝나고 식을 치르고 나면, 내 집으로 거처를 옮겨. 거기라면 안전하니까.”
프레나가 품에 안겨 왔다.
“나 사실 의심했어. 오빠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 난 언제나 너만 바라봤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프레나를 살며시 떼어냈다.
“이제 안심했어?”
“미안해, 오빠. 내가 너무 철없이 군 거 같아. 하지만 후회는 안 해. 너무 기쁘거든.”
“나야말로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해. 아, 그건 그렇고 밀레나하고는 다른 약속을 잡았어?”
“아니. 언니는 칼랑의 후예를 따라가기로 했어. 나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둔을 벗어났을 거야.”
“칼랑족과 밀레나,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들었어?”
프레나가 고민하며 고개를 당겼다.
“자세한 얘기는 듣지 못했어. 내가 들으면 곤란한 얘기 같았거든. 아, 이건 알아. 다른 칼랑의 후예를 만나러 간다고 했어.”
“그래?”
더 질문해 봤자 얻어낼 수 있는 건 없겠지. 유단은 프레나의 뺨을 어루만진 후 찬장으로 갔다.
쓸모없는 얘기를 주절주절 내뱉으며 잔에 펠트신을 한 방울 떨어트렸다.
“축하주는 들어야지.”
프레나에게 잔을 쥐여 줬다. 술병을 기울여 과일주를 따랐다. 향을 한껏 맡은 프레나가 단숨에 술을 삼켰다.
프레나가 발갛게 뜬 얼굴로 입술을 들이밀었다. 유단은 고개를 꺾어 입술 대신 뺨에 입을 맞췄다.
“나머진 다음에. 해야 할 업무가 남았어.”
프레나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부탁이 있어.”
“뭔데?”
“네가 한 요리를 먹고 싶어. 재료부터 손질까지 전부 네가 한 요리를.”
“잘은 못하지만 오빠를 위해서라면 해볼게. 뭐가 좋겠어?”
“네가 한 거라면 뭐든.”
“알겠어.”
“사흘 뒤에 찾아갈게. 회의가 잡혀 있어서 당장 시간을 낼 수는 없거든.”
프레나가 맑게 웃었다.
“그러면 사흘 동안 내가 열심히 준비할게. 재료부터 다 내가 직접 보고 살 거야.”
“기대할게.”
“너무 많이 기대하진 말고.”
프레나가 수줍게 웃으며 집무실을 떠났다.
-사흘 후면 조용해지겠네.
“네 덕분에 해독제도 완성해 놨어. 나중에 필요해지면 그때 깨우면 돼. 아버지와 같은 병. 기저질환이라 여겨지면 소란스럽지도 않겠지.”
-사흘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인간도 잔뜩 만날 테니, 너에게 시선이 쏠릴 일도 없고. 대처가 아주 좋아.
“미리미리 생각해 둔 결과지.”
창밖을 바라봤다. 차분한 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프레나가 보인다.
쓸모 있는 인간이었으나 제어할 수 없다면 가치가 없다.
“다른 칼랑족과 합류한다라.”
-흥미롭네. 칼랑은 무리 짓지 않는데 모여 있다는 건…….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비서가 문을 두드린 탓이었다.
“학회장님. 예약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약하지 않은 손님. 비서가 자신의 재량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곧이어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얼굴 하나가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우리 훤칠한 학회장님을 보니까 눈이 호강하네요.”
유단은 껄끄러운 미소를 지어야 했다. ‘만나기 싫은 인간’이란 목록을 만들면 최상단에 쓰일 이름.
“아르드헨 시장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술 한잔하러 왔습니다. 하하하.”
늙은 호랑이가 허락도 없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