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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25화 (425/558)

제425화

“어?”

라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밀레나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돌아왔어요.”

“예, 보면 압니다. 근데 뜨겁게 이별한 것치고는 금방 돌아오셨네요. 벌써 국경을 넘었다가 돌아왔을 리는 없고.”

라틀이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시죠.”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다 여기 있었네.”

두 달 전, 나름 비장하게 이별했던 부대원들과 다시 마주했다.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른다.

부대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돌아오신 겁니까?”

“보면 몰라? 생각을 바꾸신 거겠지. 아무튼 잘 돌아오셨습니다. 저희 아직 임시 발령 중입니다. 지금이라도 상부에 전하면…….”

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바뀌어서 돌아왔을 뿐이야. 방법을 찾아서 넘어가야지.”

“지인이라던 랍파분께 무슨 일이 생긴 거군요.”

라틀이 말했다.

“예정대로라면 접선 장소에서 만나야 했는데 오지 않았어요. 국경 지대의 분위기가 바뀐 것과 연관이 있겠죠.”

국경 지대 볼로스에 도착했을 때 밀레나는 한탄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실익을 챙기던 소규모 상단조차 대마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수만 마리의 마수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해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최근 들어 그 좁은 틈조차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조사대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마수들이 조금씩 산개하고 있다는 것.

수가 많지 않아 문제 될 정도는 아니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대마수가 국경에 자리 잡고 근 3년. 초기에는 타리움도 대규모 병력을 꾸려 항전 준비를 했으나, 이제는 자연 경관의 하나처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사소한 변화 정도는 사람들을 긴장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입니까?”

“용병단을 꾸리려고요.”

“소규모 상단조차 발길을 끊었다면서요? 돈에 환장한 그 친구들이 일정을 멈춘 거면 말도 안 되게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알고 계시죠?”

라틀이 눈을 좁히며 말했다.

“알아요. 알지만 가야 해요.”

“사람은 구할 수 있고요?”

“구해봐야죠. 구해보고 안 되면…….”

“안 되면요?”

“혼자서 넘어가야죠. 반드시 가야 하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대원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랍파의 안내 없이 가는 건 무모하다, 너무 위험하다, 때를 기다리는 게 낫다 등등.

걱정과 조언이 쏟아졌다.

합당한 말이었다.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부하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아니. 너희는 타리움이 지정한 부대로 가. 임시 발령도 곧 끝일 테니까.”

“저는…….”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옛 부하를 데려가라고? 날 못된 인간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옅게 웃으면서 말했다.

“돈이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혼자 움직여야지. 그리고 여길 찾아온 건…….”

밀레나는 라틀을 바라봤다.

떠나기 전에 부탁해 놓은 것이 있었다.

“대장님께서 소개해 준 사람을 통해서도 알아보고, 저 나름대로 조사해 봤는데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칼랑족들은 연고지 없이 계속 이동 중이니까요. 무얼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뒤바뀐 시대의 마법 공학을 재정비하기 위해 노력 중일 거예요. 엔엔 님께 소식을 전하고 싶었는데.”

떠나기 전부터 수소문해 봤으나 소식이 닿지 않았다. 두 달이나 지났는데도 답보 상태면 찾는 건 뒤로 미뤄야 했다.

“자, 갈 사람은 다시 갈 테니 다들 잘 지내. 특히 중사님. 나이가 나이인 만큼 몸조심하시고요.”

“저보다는 대장님이 걱정이죠. 사지를 뚫어야 하는데. 제가 가정만 안 꾸렸어도 대장님 곁을 지키는 건데, 아쉽습니다.”

“그렇게 말할 땐 슬픈 척이라도 해줘요.”

오랫동안 함께해 온 전우들이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면 열이면 열 앞장서 줄 것이다.

그렇기에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근데 걱정하지는 마세요. 전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니까.”

“저희도 이쪽에서 자리 잡아놓고 대장님 복귀하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독립 3부대는 무기한 휴식인 걸로 하죠.”

라틀과 악수를 나누고 다른 부하들에게 눈인사를 전할 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라틀이 눈짓하자 부하 하나가 재빨리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밀레나는 문을 열고 복도를 바라봤다. 군관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유단이 보였다.

* * *

“말없이 사라지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밀레나는 유단이 내민 차를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찻잔을 잡았다. 이목을 끈 상태로 수작을 부릴 정도로 무능한 인간은 아니니까.

“타리움에 보고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협조하는 관계지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왜 그렇게 절 꺼리는지.”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서로 엮일 일도 별로 없었고.”

“그랬던가요?”

유단이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나이에 권력 정점에 선 남자. 그런 것치고는 인상이 정말 순하다.

전후 사정을 몰랐다면 그의 호감을 기쁘게 받아들였을까?

“인사는 끝난 거 같고, 서로 할 얘기도 마땅히 없는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국경을 넘으실 생각인가요?”

“네.”

“녹록지 않을 텐데요. 최근 국경 상황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니 준비를 단단히 해서 가려고요.”

“지원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타리움 내에서 대마수 토벌에 관해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밀레나는 남은 차를 슬쩍 바라본 후 일어섰다.

“바쁘신 분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안 되겠죠. 이만 일어나 볼게요.”

“조금 더 시간을 내주실 순 없나요?”

“글쎄요. 며칠을 붙어 있다고 한들 저희가 이 이상의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이것저것 준비해 보죠. 밀레나 씨를 위해서.”

“부담스럽네요. 주변에 다른 분 계실 테니, 그분들을 위해 애써주세요. 학회장님.”

웃음으로 인사한 후 문을 열고 나섰다.

호의에는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면 편하게 대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니 물러서는 게 바람직했다.

유단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걸까?

적당한 결혼 상대를 알아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저번에 만났을 때처럼.

그렇다고 해도 의문이 든다.

왜 하필 나인가?

그에게 ‘엔첸세’라는 옛 1등 귀족의 이름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타리움의 기둥, 둔 학회의 수장, 거기에 항간에서는 구세주라고도 불린다.

명성을 얻을 만큼 얻은 사람이 왜 나에게 눈독을 들이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으로서의 호감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수상쩍었다.

의도. 읽어낼 수 없는 그 모호함이 싫었다.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언니.”

학회 건물 밖에서 반가운 얼굴과 마주했다.

“프레나!”

다가가 손을 붙잡아 줬다.

“반년만인가?”

“응. 남부로 간다고 한 뒤로 한동안 못 봤으니까 그 정도 됐어. 그보다 나한테 말도 없이 혼자 떠나면 어떡해.”

“미안해. 정신이 없었어. 하루라도 빨리 국경을 넘고 싶었거든.”

둔을 경유해 볼로스로 향했을 때 프레나의 자택을 찾아가긴 했었다.

길이 엇갈려 만나지는 못했지만.

“일 다 끝내고 돌아온 거야?”

“아니. 다시 준비해서 가야 해.”

“그 위험한 곳에 정말 가려고?”

“가야 할 이유가 있어. 그리고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치면 되니까.”

일이 잘못되면 도망이란 옵션이 사라지겠지만, 프레나한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학회 홍보부에서 일하고 있어. 사람은 역시 일을 해야 하더라.”

밝게 웃는 프레나였다. 마음의 병이 다 치료된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유단하고 마주칠 텐데, 괜찮겠어?”

밀레나는 학회 건물을 슬쩍 보며 말했다.

“이젠 남이나 다름없어. 주변 사람들도 날 그 사람하고 엮어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마주하니까 나아졌어.”

“그래. 네가 피할 이유는 전혀 없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뭐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없어. 정말 괜찮아.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의 길을 찾은 거고, 나도 내 삶을 찾은 거니까. 아버지로 인해 잠깐 가족으로 엮였지만 이젠 완전히 타인이야.”

프레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씁쓸해 보였다. 살며시 안아서 등을 토닥여 줬다.

“잘 이겨냈어. 역시 내 동생이야.”

“그런 동생한테 한마디도 없이 또 떠나려고 했지?”

“이번엔 제대로 인사하려 했어. 정말이야.”

당황하며 말하자 프레나가 눈웃음 지었다.

“그냥 해본 소리야. 그리고…….”

프레나가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거.”

“이게 뭔데?”

상자를 받아서 열었다. 안에는 자그마한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검은 고양이 모양. 아기자기한 게 귀여웠다.

“잠깐만 있어봐.”

프레나가 직접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밀레나는 옷깃에 꽂힌 브로치를 매만졌다.

“귀엽다. 언니한테 잘 어울려.”

“다른 분한테 선물하려던 거 아니야? 상자까지 준비하고.”

“누구한테 주려고 준비한 거겠어. 당연히 언니지.”

“내가 온 걸 알고 있었어?”

“언니 유명인인 거 몰랐지? 학회에 언니 나타났다고 소문이 쫙 돌았어. 학회장하고 조용히…….”

프레나가 얘기 도중 목소리를 낮췄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프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프레나?”

“언니, 학회장이 언니한테 뭐라고 했어? 나 걱정이 돼서.”

아,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구나.

밀레나는 호기롭게 목소리를 냈다.

“아무 문제 없어. 나한테 학회장은 남보다 더 못한 사이니까.”

“혹시라도 학회장이 이상한 짓하면 나한테 말해. 나도 여기저기 줄이 많아. 다 아버지를 통해 이어진 줄이긴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이상한 짓하면 내가 걷어차 버리면 되니까.”

밀레나는 프레나의 손을 붙잡았다.

“만난 김에 밥이나 먹자. 내가 사줄게.”

“나 요즘 진짜 많이 먹어. 괜찮겠어?”

“가게 통째로 빌려줄 테니까 마음껏 먹어.”

해맑게 웃는 프레나를 당기며 길을 걸을 때였다. 뒤에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건 학회 건물이었다.

누구지?

“밀레나!”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밀레나는 신체술을 사용해 학회 건물 옆으로 난 길을 바라봤다.

윤기 나는 회색빛 털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검은 양산을 접으며 경쾌하게 뛰어왔다.

밀레나는 반가움과 기쁨을 한껏 담아 손을 들어 올렸다.

“엔엔 님!”

* * *

유단은 커튼을 살짝 들췄다.

저 멀리 밀레나가 보인다. 양옆에는 칼랑족과 프레나가 붙어 있었다.

신체술을 끌어 올려 밀레나의 상의를 훑었다.

검은 고양이가 시야에 잡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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