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감각기를 손에 꼈다. 없어도 시그니처는 불러낼 수 있지만, 버릇처럼 끼게 된다.
유사 정령의 본체가 될 반구형 쇠를 작업대에 올렸다. 그랑겔 툴을 쥐고 엘리멘트 패널 각인에 쓰이는 얇은 팁을 끼웠다.
사용감이 묻어나는 도구. 손때 탄 물건은 안정감이 느껴진다. 새것이 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회로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아 가느다란 선 하나만 그어져 있었다.
시작점.
이제 가지를 덧대야 한다. 그랑겔 툴로 본체 표면을 긁었다. 베이스 소스를 새긴 후 레이어를 덧대나갈 것이다.
수없이 해온 작업이라 손은 매끄럽게 움직였다. 머릿속 이미지가 손끝에서 그려지고, 각인된 회로가 공중에 뜬 시그니처에 추가됐다.
곁눈질로 회로 모형을 점검하며 손을 움직였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 사이에서 부단히 손을 움직였다. 시그니처에 선이 생겨날 때마다 미소도 짙어졌다.
본류의 마나 농도를 적용한 시제품. 첫 제작인 만큼 정석을 밟아야 한다.
기초 점검이 끝나고 무사히 기동한다면, 그때는 비트와 외력을 이용해 새로운 체계를 도입할 것이다.
베이스 소스 각인이 끝났다. 베이스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 모든 유사 정령의 기본 시스템이 장착된 것이다.
외력으로 마나를 끌어당겨 회로에 신호를 줬다.
뒤로 한 발짝 물러나 방사형으로 뻗은 선들을 바라봤다. 정중앙에서 시작된 푸른빛이 촘촘하게 엮인 선들을 타고 전해졌다.
착안을 열지 않아도 회로의 흐름은 확인할 수 있었다. 지겹도록 봐온 거니까.
수정해야 할 곳이 13곳 정도 있었다. 미세한 겹침으로 인해 신호가 역류했다. 집약률을 높인 것치고는 오류 발생률이 낮았다.
툴을 선반에 놓고 양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선들이 엉겨 붙었다.
왼손 검지와 중지를 살며시 움직이며 오류가 난 선을 잡아냈다.
본체 쪽을 슬쩍 바라보니 하단부 H22 쪽에서 미세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같은 작업을 반복해 수정할 곳을 모두 찾아냈다. 툴로 조정한 후 재확인했다.
“좋아.”
푸른빛이 시야에 들어온 모든 선에 뿌려졌다.
시계를 확인했다. 2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가볍게 어깨를 풀고 커피를 한 모금 한 후 작업대에 섰다.
회로는 기본적으로 평면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회로를 추가하려면 새로운 면을 덧대야 한다.
아버지는 완전히 격리시켜야 할 베이스 소스에 레이어를 덧대는 것으로 마나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세기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짜맞춤은 다른 차원의 발상을 요구한다.
아버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아니,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분명 도달했을 체계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한 시스템.
가하란은 아버지가 남긴 아이디어 노트를 떠올렸다. 마지막 장에 그어져 있던 무수히 많은 선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어렴풋하게 이해했던 것들이, 지금은 온전한 지식이 돼 머릿속에 남아 있다.
아버지는 마력선 짜맞춤의 개요를 들여다본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 공학도로서 짜맞춤을 발견했을 때 아버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기뻤을 것이다.
동시에 안타까웠을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닿을 것 같은데, 그 좁은 격차가 절대로 채워지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 같이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어릴 때 생일 선물로 받은 거병 모형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던 교육 자료가 떠오른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지식.
언젠가는 아버지와 함께 거병을 제작할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꿈.
가하란은 넓게 퍼진 선들을 한데 그러모았다. 동시에 착안을 열었다.
면 위에 놓인 선은 꼬임이 발생할 수 있기에 겹칠 수 없다. 또한 점과 점 사이에는 하나의 선만 존재할 수 있기에 집약률을 생각하며 회로를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짜맞춤은 두 개의 축이 아닌 세 개의 축을 사용해 회로를 구성할 수 있다.
점과 점 사이에 하나의 선이 놓이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선을 놓을 수 있다.
신경이 곤두섰다. 지금부터 해야 할 작업은 극한의 정밀성이 필요했다.
각기 다른 축으로 선을 날려 보내야 한다. 날려 보낸 선들을 최종적으로는 입체적으로 바꿔야 하고.
정보가 산개한다.
착안이 아니면 잡아낼 수 없는 선의 변곡.
머리카락보다 얇은 실을 하나하나 꿰어 스웨터를 만들어야 한다. 코를 한번 잘못 꿰면 전반적인 형태가 어그러질 것이다.
스웨터는 대충 만들어도 입을 수는 있지만, 유사 정령의 정신 구조에 대충이란 있을 수 없다.
감각과 논리.
뇌가 쥐어 짜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사용해 시그니처를 붙들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하란은 그 말을 끝없이 되뇌며 작업을 이어갔다.
* * *
“자리 정리하고, 수고들 했어.”
웍센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찍어낸 후 시계를 바라봤다.
시침이 ‘11’ 위에서 놀고 있었다.
“식사하셔야죠.”
“난 좀 보고 올 게 있어서. 자네들 먼저 들어.”
“도와드릴까요?”
“아니, 됐어. 개인적인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웍센은 5번 라인이 있는 제조실을 바라봤다. 아직 작업 중이겠지?
오후에는 제조실을 써야 하니 슬슬 마무리해야 했다.
“이놈아, 밥은 먹고…….”
웍센은 입을 반쯤 벌린 채 말을 멈췄다. 제조실 가득 선이 날뛰고 있었다.
가하란이 보여줬던 간결한 시그니처가 아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난잡했다. 동시에 두통이 밀려왔다. 봐선 안 될 걸 본 기분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가하란 곁으로 갔다. 녀석은 눈동자를 바삐 움직이며 손짓하고 있었다.
말을 걸면 안 될 분위기였다.
웍센은 조용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마공장님.”
작업복을 입은 3팀이 제조실로 다가왔다.
“뭐하게?”
“시작 전에 설비 점검을 하려고요.”
“괜찮아. 내가 해뒀어.”
“예?”
“괜찮다니까. 아무튼 밥들 먹고 와. 여긴 내가 있을 테니까.”
얼른, 턱짓까지 섞어 말하자 3팀이 멋쩍게 웃으며 물러섰다.
“예, 뭐. 그러면 저희도 식사하고 오겠습니다.”
“그래그래, 천천히 먹고 와. 커피도 쭉 들이켜고. 내친김에 산책도 하면 좋고.”
“……안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문제 생기면 제가 뒤집어씁니다.”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 걱정 마. 아, 그보다 자네 툴박스 하나 필요하다며? 내 책상에 가봐. 내가 쓰던 놈이 하나 있을 테니까.”
“예? 마공장님께서 쓰시던 걸 저한테…….”
“그래, 준다니까. 그러니까 알겠지?”
3팀 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팀원을 데리고 사라졌다.
웍센은 제조실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날뛰던 선들이 점차 모여들고 있었다.
“마무리되는 거야, 뭐야.”
30분 정도 시간을 더 끌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해결해야 할 물량이 대기 중이니까.
20분만 더 지켜보고 그래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면…….
눈을 얇게 뜨고 가하란을 보고 있을 때였다.
선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가하란의 양손 사이였는데, 제조실 전체를 덮던 부피에서 이제는 작은 찻잔 정도의 크기가 됐다.
시그니처는 개인마다 형태가 다르다.
따라서 눈앞에 벌어진 현상이 성공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실패를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녀석의 입을 통해 결과를 듣기 전까지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
응축된 선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동시에 머리를 콕콕 두드리던 두통도 없어졌다.
가하란이 기지개를 켜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예리했던 기운이 사라졌다.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끝난 거냐?”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하란이 고개를 틀었다. 눈은 피곤해 보이나 입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 끝났어요.”
“베이스 소스 새기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내가 아는 손재주 좋은 기술자도 보름 넘게 걸리더라. 그래, 앞으로 며칠이면 바탕 설계가 끝날 거 같으냐?”
“끝났어요.”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웍센은 물끄러미 가하란을 바라보다가 유사 정령의 본체로 시선을 던졌다.
“설마 끝났다는 게…….”
“다듬어야 할 곳이 몇 군데 남아 있지만 가동시킬 수는 있어요.”
웍센은 시계를 바라봤다.
“고작 5시간이었다.”
“네.”
“정말 끝냈다는 거냐?”
“완성은 아닙니다. 완성하려면 며칠 더 필요해요.”
가하란이 부착형 커넥터를 가져오더니 본체 상단부에 달았다.
“감각 장치를 써도 될까요?”
“그, 그래라.”
테스트용 음성 장치와 연결됐다.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장난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응당 벌어져야 할 일이니 놀랄 것도 없다는 눈치.
“배터리 출력은 이 정도면 되겠고.”
이리저리 살피던 가하란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웍센은 부랴부랴 모노클을 눈에 얹었다.
마전기가 제대로 흐르고 있었다.
유사 정령이 기동할 때 보이는 몇몇 패턴이 모노클 렌즈에 맺혔다.
웍센은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렸다. 정말로 단 다섯 시간 만에…….
“목소리 들려?”
가하란이 물었다.
유사 정령은 침묵했다. 1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실패한 건가?
당연하다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안도감 같은 것이 찾아들었다. 그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유사 정령을 혼자 만든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인식했습니다. 목소리 패턴을 정리 중입니다. 주변 환경음을 이해 중입니다.
유사 정령이 말했다.
인지 통합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자가 진단을 해볼래?”
-점검 중입니다. 회로 간 신호 이상이 31개의 단자에서 확인됩니다. 의사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꼬임 예방을 위해 조속한 수리가 필요합니다.
“33개일 거야. 다른 2곳은 네가 감지하지 못한 영역에 있을 테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마.”
-점검 기록을 남겨주시면 학습해 두겠습니다.
웍센은 천천히 걸음을 떼 유사 정령 앞에 섰다. 정말로 말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단순한 음성 정보 교환은 아니겠지?”
“마공장님께서도 말씀해 보세요. 음성 패턴 수집 중이니 대답해 줄 겁니다.”
눈속임이 아닌 베이스 아키텍처가 실행된 거라면.
“내 목소리도 인식할 수 있겠어?”
-새로운 패턴을 확인했습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C 권한자로 분류했습니다. 이후 확인을 통해 조정이 가능합니다.
가하란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경악스러웠다.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웍센은 인지 능력 점검에 쓰이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학습이 필요합니다.
-전해지는 충격량은 제공된 모듈에 따라 상이합니다.
-제작자의 권익을 위해 행동하나, 정립된 도덕률에 따라 재권유를 할 수 있습니다.
웍센은 자잘하게 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사 정령 본체를 바라봤다.
“정말 깨어났어.”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레이어를 더 쌓아야 하고, 아직 연결 못 한 단자도 이어야 해요.”
“기초 테스트도 통과했는데 아직 할 게 더 있다는 거냐?”
“아직은 선의 단계예요. 이제 점으로 집약해야죠.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점으로 집약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보다 오토매틱 매뉴얼은 뭘 쓴 거냐? 이 안에는 매뉴얼에 필요한 그 어떤 것도 없는데.”
“제가 제작해 둔 걸 삽입했어요.”
“청사진은?”
가하란이 검지를 들더니 자신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여기요.”
“……내가 알고 있기로 기초 매뉴얼조차 수십만의 단자 연결을 기본으로 하지.”
“보통은 그렇죠.”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다고?”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죠.”
“미친놈. 실물을 봤으니 거짓이라 여길 수도 없고.”
허탈했다.
그동안 우린 뭘 했던 걸까?
웍센은 본체에 눈길을 준 채 물었다.
“매뉴얼의 이름은? 네가 제작했으니 있을 거 아니냐.”
“건너편에서 만난 친구의 이름을 땄어요. 로키 오토매틱 매뉴얼. 도움도 꽤 받았으니 이름은 넣어줘야죠.”
가하란이 싱긋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