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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23화 (423/558)

제423화

웍센은 새벽녘에 일어난다. 계절에 상관없이, 날씨에 상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공방으로 향한다.

보랏빛 어둠에 잠긴 공방의 문을 열고 차갑게 식은 도구를 정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지난 50년간, 장소는 바뀌었을지언정 루틴은 바뀐 적이 없었다.

적막한 공방을 일깨우는 것.

누구에게도 넘긴 적 없고, 누구도 넘겨받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었다.

보름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러했다.

“또.”

웍센은 혀를 차면서도 내심 미소를 지었다. 제조장 옆 공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새벽 5시. 이른 아침에 여는 식당과 빵 배급소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든 시간이지만, 공방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공방의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두툼한 내열 장갑을 낀 가하란이 맞이해 주었다. 형틀을 들고 옮기는 중이다.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저 무거운 걸 혼자 들다니, 희한한 놈이었다. 신체술을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하던 일이나 마저 해라. 괜히 인사하다가 사고 내지 말고.”

“금방 옮기고 차 끓여 드릴게요.”

“됐다니까 그러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슬쩍 의자에 앉아 가하란을 바라봤다. 평생 쇠 만지고 살아온 놈처럼 보이는데 찻물 내리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달달한 발효주만 반기던 입이 어느덧 차를 찾게 된 것도 다 저놈 때문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가하란이 형틀을 밀어내고 장갑을 벗었다.

쭈글쭈글하면서도 물에 뜬 기름처럼 반질반질한 손이 보인다. 처음 저 손을 봤을 때 티를 안 내려 했지만, 결국 묻고 말았다.

어쩌다 생긴 상처냐고.

가하란은 배움의 증거라고 대답했다. 고 녀석 말 참 잘하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속으로는 짧게 감탄했다.

불과 쇠를 다루는 직업이라 사람 보는 눈이 없을 거라고 여긴다. 단언컨대 편견이었다.

공방의 열기는 사람의 체면마저 녹인다. 감정까지 달구는 열기 앞에서 인간은 속내를 쉬이 드러내 버린다.

바깥이라면 모르나, 공방 안에서는 인간의 됨됨이를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웍센이 지난 보름간 지켜본 가하란은 꼼수를 모르는 놈이었다. 불 앞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놈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명장, 명공이라 불린 이들의 일과는 특별하지 않다. 하루만 떼어놓고 보면 무척이나 단조롭고 단순해 보인다.

군더더기가 남지 않도록 정제한 것이다. 더없이 명료해서 남들이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나, 그 단순함에 이르기까지 명공들은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가하란에게서는 명장의 명료함이 보였다.

“드세요.”

웍센은 찻잔을 받았다. 동부 놈들이 쓰는 아기자기한 찻잔. 처음에는 낯설었으나 이제는 적응했다.

향을 맡고 차를 음미했다. 과실 향이 진하게 풍겼다. 온몸이 나른해지는 맛이었다.

“둔이라는 제국 도시의 옛 모습을 발견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었죠?”

“그랬지.”

가하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방에 와 차를 들며 가하란의 이야기를 듣는 것. 웍센의 새로운 일과였다.

어린놈에게서 왜 명공의 분위기가 흐르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해하게 됐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다 포기했을 환경이었다.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외딴곳에서 몇 년을 버티는 게 가당키나 한가?

대부분 미쳤을 것이다. 희망의 터럭조차 보이지 않으니까.

그걸 버텨낸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 녀석은 또 다른 틈새에서 또 다른 역경을 겪고 이겨냈다.

옹골찬 놈.

손녀가 있었다면 짝을 지어주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놈이었다.

굳은 심지뿐만 아니라 손끝도 기가 막혔다. 쇠를 다루는 기술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용로를 작동시키는 것과 쇠를 만지는 건 전혀 다른 분야인데, 녀석은 녹은 쇠를 찰흙처럼 만져댔다.

시험 삼아 만들었다는 외장갑용 합판을 처음 봤을 때 웍센은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특수 공정 없이, 이 작은 공방에서 만들어 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였다.

강도는 물론 충격을 완화하는 후면 설계까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효율을 극한으로 챙긴 모습이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줘봐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멀스멀 해가 오르고 있었다. 틈새에서 만난 기이한 유사 정령을 끝으로 가하란의 모험담이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청철이 다 식은 거 같거든요.”

“그래, 일 봐야지.”

“제 이야기 따분하지 않았나요?”

“그럭저럭 재미는 있다. 그러니 내일도 잘 준비해 봐라.”

옅게 웃으며 턱짓했다. 가하란은 일어나 형틀로 다가갔다. 반구형의 작은 쇳덩이를 꺼내 들고 있었다. 어디에 쓸 부품일까.

웍센은 남은 차를 마시며 가하란의 작업을 지켜봤다.

느긋한 시간을 만끽할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 있나요?”

가하란이 다가왔다. 웍센은 손을 내저었다.

“넌 신경 쓸 필요 없다. 미치광이 녀석들이 쇼하는 거니까.”

공방에 난 창으로 밖을 보았다.

붉은 깃발을 든 자들이 제조소 공터에 모여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은 놈들이었다.

“제작을 중단하라!”

“화합에 이르러야 한다!”

웍센은 미치광이들의 외침을 들으며 작게 말했다.

“이 땅의 고난도 모르는 것들이.”

마공장으로서 브룬드 제조소에 온 지도 어언 12년.

초기에는 핵심 모듈을 제외한 거병 외장갑 및 탈로스 부분 성형만 맡았던 곳이, 그라운드 제로를 기점으로 거병의 일체를 제작하는 생산 라인이 됐다.

‘국경 지대에 핵심 시설을 배치한다.’

예전 같았으면 비웃음 살 얘기지만 그라운드 제로와 대마수의 출현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다.

잦은 전투로 소모품에 가까워진 거병을 현지에서 조달할 필요성이 생겼고, 대마수에 대항하는 1차 저지선을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이 도시에 많은 시설이 들어찼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치적 대립이 있었는지, 웍센은 떠올리기조차 싫었다.

지금이야 자치권을 길드가 움켜쥐게 되어 안정화됐다지만,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반 마법공학자들과 마수 포용자들.

철없는 이상주의자들, 아니, 정신병자 집단들이 출몰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저들의 뒤에 길드가 있다는 점이었다.

마수가 날뛰던 시절에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대마수가 국경에 자리를 잡고 몇 년간 평화로운 대치 상태가 이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랄 맞은 설파를 시작했다.

국경 수비에 들어가는 돈이 아까운 건지, 아니면 저들을 통해 제조소 통폐합을 이뤄내려는 건지, 이유야 알 수 없지만 길드는 저들을 은연중에 돕고 있었다.

“평화가 길어지면 정신병자들이 득세하기 마련이지.”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었는데, 입맛이 달아났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왔다죠?”

가하란이 곁에서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네 일 하라니까.”

“어느 정도는 끝내놨어요.”

웍센은 길게 늘어서 외치는 마수 포용자들을 바라봤다.

“기고만장해졌어. 마수를 섬겨야 한다니. 대가리를 열고 안을 확인해 보고 싶군. 아마 새끼 마수가 득실대고 있겠지.”

“우연은 연이어 일어나지 않죠. 대마수에 접근하고도 또 살아 돌아온 걸 보면 뭔가 있는 게 아닐까요?”

“이용당하고 있는 거겠지. 마수들 중에서는 인간만큼이나, 아니, 인간보다 영리한 놈들이 있다. 내부 분열을 노리고 저 멍청한 놈들을 살려두는 걸지도 몰라.”

한참 소리 지르던 놈들이 줄 맞춰 섰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모양이다.

“굶주린 마수 앞에 던져놔야 저런 소리를 못 하지.”

창문을 열고 퉤 침을 뱉었다.

멀어져 가는 마수 포용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는데, 친히 가운뎃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한동안 눈싸움하다가 몸을 돌렸다. 저것들과 씨름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오늘은 뭘 할 생각이냐?”

뒷짐을 지고 가하란 곁으로 갔다. 반구형 쇳덩이의 쓰임새가 궁금했다.

“손끝 감각도 만족할 만큼 되살렸으니, 이제 시작하려고요.”

“뭘?”

“거병 제작이요.”

“네 솜씨라면 탈로스 성형은 완벽하게 해내겠지만, 거병이란 게 뼈대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회로를 기반으로 한 각 모듈을 제작해야 하고, 혈관이나 다름없는 파이프 설계, 거기에 액상 근육과 수많은 공학 회로까지.”

쇠 다루는 실력은 인정하나 그 외의 것들은 다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웍센은 턱을 쓰다듬었다.

“인력을 소개해 주마. 내 재량으로 프로토타입 한 기 정도는 생산할 수 있으니 사람들과 연계해서…….”

“사람은 괜찮습니다.”

“뭐?”

“장비만 대여해 주신다면 저 혼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랑겔 툴을 오래 써야 할 것 같은데, 작업 시간 이후에 제가 쓸 수 있을까요?”

웍센은 왼쪽 눈을 씰룩였다.

“포부는 좋다. 사내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하지만 거병 제작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탈로스를 완벽하게 짜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다른 공학적인 설계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가하란의 눈을 본 탓이었다.

“정말 혼자 하겠다고?”

“예.”

“용로 다루는 것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있고? 마법 공학이란 게 그리 쉽게…….”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선들의 향연에 눈만 깜빡였다.

이 현상이 무엇인지, 웍센은 잘 알고 있었다.

“시그니처. 아주 간결한 형태구나.”

“기본 설계부터 마무리 공정까지, 제가 담당하고 싶습니다. 설비 사용 허가만 내주셨으면 해요. 액상 근육은 현시대에 개량된 버전이 있다면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아니라면 기존 것을 쓰면 되고요.”

시그니처를 바라보다가 번뜩이는 게 있었다. 웍센은 반구형 쇳덩이를 바라봤다.

“설마, 유사 정령까지 제작할 생각이냐?”

“틀은 잡아 놨습니다. 회로 설계도는 머릿속에 들어 있고요. 툴로 회로 레이어를 쌓고 시뮬레이션해 보면 작동할 겁니다.”

“그걸 혼자서 하겠다고?”

거병 제조소가 도시 곳곳에 있으나 유사 정령 제작 시설은 단 한 곳뿐이었다.

집결 수도에서 파견 온 유능한 학자들과 공학도, 마법을 깨우친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대야 생산되는 최중요 장비.

거병 제작이 국가의 관리를 벗어나 도시와 길드, 심지어 개인에게까지 자유가 주어졌지만 유사 정령의 제작만큼은 여전히 국가 손아귀에 있었다.

법으로 제한한 게 아니라, 단순히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법 공학의 정수.

그걸 혼자서 만들어낸다?

헛소리 말라는 말이 목젖까지 치고 올라왔다. 다른 놈이었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드라이버로 머리통도 한 대 때렸을 것이다.

“……정말 제작할 수 있는 거냐?”

“혹시 법률상 문제가 되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제작의 자유가 있으니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어지간한 제한은 다 풀어놨지. 그리고 재능 있는 자들은 전부 집결 수도로 향했고.”

웍센은 고개를 돌려 제조소를 바라봤다. 5번 라인이 비어 있었다.

“그랑겔 툴을 빌려주마. 비어 있는 곳이 있으니 거기서 하면 될 거다.”

“감사합니다.”

“너, 정말로 만들 수 있는 거냐?”

“이곳에 넘어와서 해본 적은 없지만, 그쪽에서는 여러 대 만들어 봤습니다.”

“믿기질 않는군.”

가하란을 데리고 5번 라인으로 향했다. 안에 있는 정비반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앞으로 오후 8시 이후에 이곳에서 작업해라. 내가 사람을 통제할 테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정말로 제작이 가능하다면, 나 또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다른 분에게 말한 적 없습니다. 마공장님께 처음 털어놓은 거예요.”

웍센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날 어떻게 믿고?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널 다른 곳에 팔아버릴 수도 있는데.”

“전 믿거든요, 제 눈을.”

“네 눈에는 내가 어찌 보이든?”

“절 아주 아끼시는 친절한 어른이요.”

“……이제 보니 혓바닥이 아주 매끄럽구나.”

싫지 않은 아부였다. 웍센은 뒷짐을 지며 문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4시간 동안은 그 누구도 이쪽으로 오지 않을 거다. 난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어디 한번 마음껏 해봐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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