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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21화 (421/558)

제421화

발목을 향해 목봉이 다가왔다. 느릿해 보이나 쉽게 피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공격은 어디까지나 포석. 이어질 공세를 예측하며 몸을 빼야 했다.

“생각이 많은 건 좋으나.”

타챠의 음성이 귀를 꿰뚫었다. 동시에 목봉에 가속도가 붙었다.

“혼자 하는 수 싸움은 악수를 두기 마련이지.”

반 발짝 뒤로 뺐으나 이미 목봉이 오른쪽 무릎을 때린 후였다. 따끔한 통증에 눈 밑이 씰룩였다.

“어려운데요.”

가하란은 바닥에 털썩 앉았다.

“너한테는 더 어려울 거다. 몸보다 먼저 머리를 쓰는 게 네 녀석이니까.”

“그것도 그렇고, 다리만 보고 예측한다는 게 영 쉽지 않네요.”

“넌 너무 많은 걸 본다. 덜어내는 것도 필요하지. 나아가 착안 없이도 생각의 속도와 몸의 속도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

착안을 생략한 전투.

거기에 한정된 시각 정보로만 전투를 이어 나가야 했다.

“한 번 더 하시죠.”

“좋지.”

타챠가 목봉을 움켜쥐었다. 가하란은 시선을 내려 타챠의 다리만 바라봤다.

착안이 제공하는 선의 정보 없이, 오로지 신체 하부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전체 동작을 예상해야 했다.

타챠의 오른발에 무게가 실렸다. 꼬리 반동과 왼발의 이동을 보아 좌측에서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슬며시 끌어당기는 오른발. 타챠가 공격에 들어가기 전 항상 보이던 동작이었다.

온다.

근육에 신호를 보내며 한 박자 빠르게 대비하려 할 때였다. 이동 경로 사이에 목봉이 놓였다.

내던진 몸이었고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져 돌이킬 수 없었다.

딱,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얼얼한 정강이를 연신 비비며 타챠를 바라봤다.

“내 버릇을 읽어냈겠지. 발을 당기면 들어온다는 것도 알아냈고, 거기에 맞춰 움직였을 것이다.”

“예, 맞아요. 이번에는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좋을수록, 수읽기에 뛰어날수록 ‘태세’에 걸려들기 쉽지. 보통은 전체를 바라봐야 기세를 읽어내고 다음 수를 예측하는데, 넌 한정된 부위로도 알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정말 훌륭했다면 그마저도 예상해서 피해냈을 겁니다.”

“그 또한 옳다.”

타챠가 곁으로 다가왔다.

“수없이 많은 전사를 봐왔으나 너만큼 눈이 좋은 자는 없었다. 본다는 모든 행위에 특화된 네 눈은 전투에서 압도적인 이점을 가져다주겠지. 하지만 위대한 전사들은 상대의 이점마저 이용해 버린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와의 전투는 치열했으나, 어떤 면에서는 정직한 싸움이었다.

몇몇 마수들을 제외하고는 체력과 순간적인 운동 능력에 기반한 전투를 펼쳤고, 싸움의 결과는 공식의 해답처럼 명확했다.

그러나 타챠와의 대련은 명확한 공식에도 불구하고 풀 때마다 각기 다른 답이 나왔다.

실제 전투였다면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난 위대한 전사는 아니나, 아주 대단한 전사이긴 하지. 그러니 낙담할 필요 없다.”

담담한 표정으로 자찬하는 타챠였다. 그게 어색하거나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겸손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전투라는 시스템 안에서 타챠는 완벽에 가까운 회로였다. 동력원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한 톨의 소실 없이 전달하는 이상적인 구조.

타챠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버릇없는 랍파 꼬마였다면 지금쯤 한마디 했을 텐데.”

“전 아저씨가 위대한 전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아요. 부딪쳐 볼수록 알게 돼요. 아저씨가 형성해 놓은 전투 체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타챠였다. 가하란은 타챠의 꼬리를 바라봤다. 비늘이 바싹 솟은 꼬리가 격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착안이 네 뜻과 상관없이 열리고 닫히는 이상, 그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새겨들을게요. 그래도 이점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저씨의 방식과 제 방식, 둘 다 익힐 겁니다.”

“바른 자세다. 그렇기에 힘든 길이기도 하지. 태세에 익숙해진다는 건 역으로 고심할 거리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상대의 진의를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자충수를 둘 확률이 높아지지. 그럼에도 네 강점인 수 싸움을 잘 이용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의미 없는 질문인 걸 알지만,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생존을 건 싸움을 한다 치면, 제가 아저씨를 이길 확률은 몇이나 될까요?”

“열 번이면 열 번 다, 백 번이면 백 번 다, 천 번이면 천 번 다 내가 이길 것이다. 육신으로 다루는 무구로는 날 이길 수 없다.”

“역시 저만의 것을 더해야겠네요.”

“끔찍한 강철을 말하는 거냐?”

“예. 아저씨가 그토록 싫어하는 거병이요.”

“넌 그런 것의 도움 없이도 대성할 수 있다. 전사로서 말이지.”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전 기술자예요.”

웃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태세라는 거 골치 아프네요. 마수와의 싸움은 좀 더 단순했는데.”

“내가 보여준 건 어디까지나 입문의 경지다. 지금은 참된 기운과 그릇된 기운을 섞어 적을 혼란시키는 정도지만, 태세가 완벽히 갖춰지면 변칙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에는 뭐가 있죠?”

“의지 장악. 너처럼 눈이 좋을수록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다. 상대가 보내는 정보들이 모두 참으로 보일 테니까. 거짓이 없다고 믿기에 발을 디밀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목 위로 떨어지는 검이지.”

“거짓이 없다고요?”

“당해보면 웃음이 나올 것이다. 나는 분명 보았다. 적의를, 명백한 공격 의사를. 그건 속임수라 할 수도 없었고, 기만책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온전한 전장의 기운이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내질렀다.”

타챠가 콧김을 내뿜었다.

“그리고 드넓은 대지 품에 안기게 됐지. 완성된 태세는 시각 정보를 엉망으로 만든다. 아니, 시각뿐만 아니라 전장의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것들이 어그러지지.”

타챠의 말을 들으며 상상해 봤다.

거병의 감각 기관이 망가져 인지 통합이 해체되는 상황을.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차단돼 바깥 상황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직감만으로 전투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 상대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죠?”

답을 알아둬야 했다.

만약을 위해서.

타챠는 기분 좋게 말했다.

“패배하면 된다. 아니면 죽거나.”

“예?”

“그 또한 올바른 결말일 테니까. 음, 그렇게 죽는다면 여한이 없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타챠였다.

가하란은 머쓱하게 웃으며 귀 뒤쪽을 살며시 긁었다.

“전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을 겁니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저항하며 쟁취하는 삶도 가치가 있으니까.”

“아저씨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요?”

“두렵다. 허망한 죽음은 정말 두렵다. 하지만 만족할 수 있는 전투 끝에 죽음이 찾아온다면, 난 기꺼이 웃으면서 대지에 안길 것이다.”

가하란은 걸음을 멈춘 채 타챠를 바라봤다.

“아저씨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 사람에게…… 다시 도전하실 건가요?”

“해야지. 계속할 거다.”

“이길 가능성이 있나요?”

“없다. 티끌만큼도 없어. 기적이란 게 수백, 수천, 수만 번 내 등을 밀어줘도 대전사의 검에는 닿지 않을 것이다. 그 영역은 논리도, 운명도, 신의 섭리조차 끼어들 수 없다. 대전사는 패배를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도전하는 것이다.”

어릴 때 마주한 타챠는 신기하면서도 시끄러운 생명체였다.

조금 더 커서 만난 타챠는 강력한 힘을 지닌 전사였다.

그리고 지금 본 타챠는.

“거인이네요, 아저씨는.”

“내가 좀 크긴 하지.”

크하하, 크게 소리 내 웃는 타챠였다.

“식사하러 가시죠.”

타챠는 식사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앞장섰다. 가하란은 살랑살랑 흔들리는 도마뱀 전사의 꼬리를 바라보며 걸음을 뗐다.

* * *

“용로가 남긴 하는데, 저건 다루기 힘들 거야.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거든.”

“빌려주시기만 하면 돼요. 다른 곳을 다 알아봤는데 허공 용로 남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요.”

“사실 남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지만. 이 도시에 남는 용로가 어디 있겠어. 가동하다가 끝내 부서져서 버리는 용로만 있지.”

가하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얀스와 마공장의 대화를 들었다.

사방에서 열기가 쏟아졌다. 쇠사슬에 걸린 용로와 공중에 뜬 용로들이 시뻘건, 혹은 시커먼 쇠를 토해내고 있었다.

“어이, 젊은 친구.”

마공장이 손짓했다.

“용로 다뤄본 적이 있다고?”

“예.”

“이놈은 연식이 오래된 거라 내 이전 세대들도 어렵게 사용하던 거야. 그랑겔 툴 중 하나이긴 한데, 지금은 제대로 다루는 놈이 없어서 방치돼 있고.”

마공장이 손짓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먼지 덮인 천을 들춰냈다.

좌우로 벌어진 반구.

가하란은 다가가서 속이 빈 반구체를 쓰다듬었다.

“생긴 건 로브다 용로와 비슷하지만, 작동시켜 보면 알게 될 거야. 더럽게 까다롭다는 걸.”

“말씀하신 대로 예민한 친구죠.”

너무나도 익숙한 형태였다.

나타 왕조에 있었을 때 지겹도록 만진 허공 용로였다. 카트시의 도움을 받아 용로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디서 배운 적이 있어? 아는 눈치인데.”

“조금요.”

“뭐, 버릴 순 없어서 보관해 둔 물건이니까 빌려는 줄게. 대신 우리 애들 앞에서 사용해 봐. 정말로 다룰 수 있다면 말이지.”

가하란은 초로의 마공장을 바라봤다. 기대감 반, 의심 반이 담긴 눈동자였다.

“근데 그랑겔 건틀릿을 쓰려면 좀 기다려야 해. 발주 물량을 끝내려면 저녁 8시 이후에나 될 것 같은데.”

“건틀릿은 없어도 됩니다.”

마공장이 눈을 찌푸렸다.

“객기는 적당히 부리는 게 좋아. 배웠으니까 잘 알 거 아니야. 건틀릿 도움 없이 이 형태를 다루는 건 위험해.”

“위험하죠. 용융철이 반구 밖으로 분사돼 자칫 잘못하면 불타 죽을 수도 있고요.”

가하란은 소매를 걷어냈다. 용로를 다루며 생긴 자잘한 화상들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마공장은 상흔을 보자마자 호, 하고 작게 감탄했다.

“작업량이 보이는군. 젊은 친구가 어디서 이렇게 구른 거지?”

“질리도록 만져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원 없이 용로를 다뤄봤죠.”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좋아, 건틀릿 없이 해봐. 청철도 제공해 주지.”

배우겠다는 의지가 마공장의 얼굴에서 느껴졌다.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하란도 괜히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을 완전히 거둬낸 후 청철을 두 개의 반구 사이에 놓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외력이 이끈 마나가 용로에 스며들었다. 회로가 가동하며 누워 있던 용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가하란은 왼손을 천천히 위로 들었다. 실처럼 뽑혀 나온 분쇄된 청철이 빙글빙글 돌며 용로 사이로 들어갔다.

청철이 두 개의 반구 사이에서 회전했다. 검게 물들었다가 이내 푸른빛과 함께 열기를 쏟아냈다.

융해가 시작됐다. 반구 간격을 조금 더 좁혔다. 완전히 닫으면 용융철이 굳어버린다. 열어둔 상태에서 공기를 주입하며 회전 속도를 높인다.

푸른빛 안에 잠긴 철이 샛노랗게 변했다. 안정화를 위한 흑사토와 안정수가 없기에 작업은 여기서 끝이다.

오늘은 용로를 점검하기 위해 온 거니까.

날뛰는 용융철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움직였다. 허공 용로가 비스듬하게 누우며 녹은 철이 바닥에 놓아둔 형틀로 쏟아졌다.

두 손을 움켜쥐었다. 용로 회로가 정지하고, 부상했던 용로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퉁, 용로가 바닥에 닿으며 소리를 냈다.

가하란은 웃음을 지었다. 상태가 아주 좋았다. 탈로스 제작에 필요한 원료만 조달한다면 탈로스 성형까지 단숨에 끝낼 수 있으리라.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마공장이 녹은 청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친구가 가르쳐 줬습니다.”

“슬러지가 완벽하게 걸러졌어. 이토록 정제된 청철은 오랜만에 봐.”

마공장이 긴 쇠막대기를 형틀에 푹 찔러 넣었다. 잠시 후 막대기를 뽑아 든 마공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용로를 다룬다는 건 결국 거병을 만들겠다는 뜻이겠지?”

“예.”

“이 도시에서 제작 허가를 받아내는 건 상당히 어려울 거야. 길드가 꽉 틀어쥐고 있으니까.”

“그렇습니까?”

“그걸 내가 해결해 주지. 개인 공방 자리도 내주고. 대신…….”

“사용법을 알려드리면 될까요?”

“서로 남는 거래야. 거절하진 않겠지?”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가하란은 마공장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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