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들고 갈까?
-들고 가지 말까?
-내버려 둬. 무거워.
-무거운 게 뭔데?
-조용히 좀 해. 그리고 얼른 따라와.
시끄러웠다. 수십 명이 둘러싸고 조잘조잘 떠드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미끄러지며 사라져 가는 거대한 얼음이었다.
얼음 안에는 큼지막한 눈동자가 여러 개 박혀 있었는데, 가끔 경련하듯 움직였다.
멍하니 멀어져 가는 얼음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대고 있던 곳에 보니, 흰개미가 일렬로 늘어서서 지나가고 있었다.
개미들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고개를 가볍게 털고 주변을 보다가 기억에 남은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졌구나.”
변명할 수 없는 깔끔한 패배였다.
인식을 쪼개고 쪼개, 순간의 틈이라 할 수 있는 영역에서 반전을 꿈꿔봤지만…… 되돌아온 건 기절이었다.
육체 쪽은 괜찮은 걸까?
“설마 죽어서 넘어온 건 아니겠지.”
뇌까리며 괜스레 몸을 더듬었다.
“잘 된 것 같지는 않네.”
돌아보니 사슴이 있었다. 곁으로 다가온 사슴이 네 다리를 굽히며 앉았다. 마치 기대라는 듯 몸을 내주었다.
푹신한 몸통에 머리를 기댔다.
“힘까지 빌렸는데 졌어요.”
“너희 세계에서는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하겠지. 그래, 죽은 거야?”
“아니요.”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대련 같은 거였어요. 몸 쪽은 아마 기절해 있겠죠.”
“네가 죽으면 곤란해. 난 그쪽 세계로 놀러 가고 싶고, 그러려면 네가 필요하니까.”
“저도 죽으면 곤란해요.”
오른손을 바라봤다. 외력이 붙들고 있던 정령의 힘이 모두 사라졌다.
“사슴님.”
“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사슴 등에 손을 올렸다. 외력으로 힘을 붙들고 떼어냈다. 외력과 동화된 힘이 손끝에 머물렀다.
“이 에너지, 다시 가져가 보시겠어요?”
“어렵지 않지.”
사슴이 말한 순간 손끝이 저렸다. 외력이 반발하며 악착같이 정령의 힘을 붙들려 했으나, 이내 흩어지고 말았다.
원천 제공자의 동의 없이는 힘을 유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억지로 빼앗는 건 불가능한 걸까?
“네가 나한테서 가져간 건, 내 일부나 다름없어. 그러니 내가 부정하는 순간 네가 가져간 건 돌아오게 돼.”
“아쉽네요. 몰래 훔치고 싶었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릴.”
목을 뒤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지, 저걸 하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안원은 제멋대로였다. 어느 방향에서는 발밑에 새가 날고 있고, 어느 방향에서는 물이 위로 솟구친다.
사람을 기점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이곳에서 버려야 한다.
“이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내가 보기엔 자신만만했는데.”
“뭐, 솔직히 말하면 아주 조금 가능성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마주하고 보니 알게 됐어요.”
“뭘?”
“급이 다르다는 걸.”
“그러면 됐어.”
“네?”
“급을 판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증거니까.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위험할 뿐, 가늠할 수 있는 건 언젠가 닿기 마련이지.”
“사슴님 말이 옳아요. 산페르 아저씨를 보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이해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기에 공포조차 발생하지 않는 거겠죠.”
“가장 오래된 것들과 여전히 어울리나 보네. 그것들을 조심해. 심사가 뒤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사슴님은 아닌가요?”
사슴의 연녹색 눈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보기엔 정령들은 다 자유로운 것 같아요. 자유의 정의가 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래요.”
“근원이 속삭이는 방향으로 살아가기에 자유롭다고 볼 수도 없어. 거기에 순응하면 이지를 잃고 그냥 떠돌아다니는 멍청이가 되고, 거부하고 살아가면 나처럼 뒤틀린 놈이 되는 거지.”
가하란은 사슴의 연녹색 눈을 바라봤다.
“사슴님은 목적이 뭔가요?”
“목적?”
“예. 살아가는 이유요.”
“즐거움. 색다른 경험. 안원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놈들은 다 똑같아. 호기심에 미쳐 있지. 그 호기심이 인간에 닿으면, 한 인간을 위해 다른 모든 걸 배척하는 괴짜가 되는 거고.”
말을 듣는 순간 산카가 떠올랐다. 샬롯은 잘 지내고 있을까?
“맞다. 그 아이, 종종 이곳에 오고 있어.”
“그 아이요?”
“이곳에서 방황하던 꼬마 애. 네가 구해준 애.”
“샬롯이요?”
“이름은 관심 없어서 몰라. 내 눈에는 널 제외하고는 똑같이 생긴 애들이니까. 아무튼 걔도 종종 보여.”
가하란은 사슴 몸통에 양손을 올렸다. 사슴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뭐야? 왜?”
“얘기 좀 전해주세요.”
“얘기? 뭔 얘기?”
“샬롯을 보게 되면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려주세요. 가하란이 살아 있다, 이렇게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난 얻은 게 없는데 부탁만 늘어나네. 거래는 우리에게 중요한 법칙이야. 난 여러 개를 내준 거 같은데, 넌 바라기만 해. 이건 옳지 않아.”
정이란 게 인간 사회에서나 통하는 개념임을 떠올렸다. 아니, 사슴의 말대로 사정을 많이 봐준 것이다.
“제가 실수했어요. 약속을 먼저 지킬게요.”
“돌아가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지? 유사 정령이 어쩌고저쩌고.”
“네.”
“뭔가 방법을 찾은 거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 길을 열 수 있을 것 같아요.”
“난 즐겁게 기다리면 되겠네.”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손길이 느껴졌다. 가하란은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작고 거친 정체불명의 무엇이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인가 봐요.”
“준비가 되면 불러.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면 언제든 갈 테니.”
가하란은 미소를 지은 후 눈을 감았다.
촉감에 집중했다. 안원과 현실, 두 층의 경계를 잇는 육체가 서서히 느껴졌다.
뻑뻑한 눈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까슬까슬한 털. 아무래도 루루 같았다.
손을 들어 루루를 떼어냈다.
걱정했는지 눈이 그렁그렁했다.
“나 괜찮아. 안 죽었어.”
루루를 품에 안고 상체를 세웠다.
익숙한 벽면이었다. 정비소 2층 같았다. 얼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1층으로 내려왔다.
“정신 차렸네.”
필렌이 보였다. 둘둘 말린 신문을 펼치고 있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죠?”
“한 세 시간? 푹 잤으니 배가 꺼졌겠네. 일단 이것부터 먹어.”
필렌이 식탁 위에 있는 그릇을 턱으로 가리켰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식탁에 앉았다.
그릇 안에는 우유에 잠긴 말린 곡물이 들어 있었다. 끓인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형태였다.
“이게 뭐죠?”
“별미. 미스터 리가 알려준 건데 후루룩 먹기에 좋아. 식감도 좋고.”
한 술 떠서 입에 넣었다. 우유에 잠겼는데도 바삭한 식감이 느껴졌다. 곡물 특유의 고소함과 단맛이 치고 올라왔다.
“이건 뭘 말린 건가요?”
“아난베. 이쪽 지역에 식생 하는 곡물인데, 촘촘하게 박아 키워도 잘 자라.”
“밭에서 이걸 기르고 계셨던 거군요.”
“먹을 게 풍족해지면 싸움을 덜 하니까. 마수니 외계니, 너무 머나먼 문제에만 집중하면 코앞에 있는 돌부리에 넘어져 다칠 수도 있지. 맛난 걸 잘 키워서 배불리 먹는다. 이것만 잘 해결돼도 웃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맞는 말이에요.”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속이 든든했다. 역시 음식은 소중하다.
“어디 신문인가요?”
“울프지. 그라운드 제로 때 한동안 발간 안 하다가, 신문나무가 다시 일을 시작했는지 3년 전부터 다시 나오고 있어. 칼리고 이 친구의 미친 소리를 읽는 게 꽤 재미있지.”
“아, 맞다. 감찰단 단장 이전에 기자라고 했었죠.”
“볼래?”
신문을 넘겨받았다.
신문에서는 연합 왕국을 연합 도시, 제국을 타리움 정부라고 명명하고 있었다.
이게 요즘 사람들이 쓰는 명칭인가.
헤드라인부터 마지막 문단 마침표까지, 각 지역의 지도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이었다. 쓴 사람의 목숨이 걱정될 정도였다.
“제가 다 뜨끔하네요.”
“비판의 강도가 거세긴 하지. 아니, 비판보다는 비난에 가까울 정도야. 근데 그게 울프지의 맛이니까. 검열되지 않은 욕설 한바탕. 이런 것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 말씀하시길, 유단은 구세주라 불릴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나요?”
“구세주는 구세주고. 구세주조차 집단에 들어가 있으면 욕을 먹기 마련이지. 그래서 유단을 중심으로 권력 재편성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 실권자들이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죽었다고 한들 디온 사령관의 지배력도 여전히 굳건할 테고.”
“정치라.”
가하란은 신문에 박혀 있는 ‘유단’이란 두 글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기계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참이라 여겨지는 문장.
마법 공학을 다루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대전제.
그렇기에 로키는 승리했을 것이다. 유단을 절벽으로 이끌어 목숨을 갈취하고, 육신을 강탈했을 터였다.
유단이 로키의 조언을 받아 펠트신을 제조, 덴스 교수를 살해한 게 아니었다.
이미 그때 유단 안에는 로키가 있었을 것이다.
-다르지만 같기에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지. 너한테는 버거운 상대일 거다.
겹침 세계를 떠날 때 그곳의 로키가 한 말이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이곳의 로키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동부의 정치 집합체, 타리움의 수장 격이며 시민들한테는 구원자라 칭송받고 있다.
그를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건 자충수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한다.
알아내야 할 건 로키의 목적.
만약 로키가 인류의 안정을 위해 노력 중이라면 그를 도와야 할지도 모른다.
개인을 살해해 집단의 이득을 가져온다는, 지극히 기계적인 논리가 작동한 거라면…….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 좋지. 많이 해둬. 생각이란 건 막상 필요할 때는 못 하게 되니까.”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
로키가 사적 이득이 아닌 대의를 위해 행동 중이라면, 대응 방식을 바꿔야 한다.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이 단순하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악은 단순하지 않고, 선 역시 올곧지 않았다.
악과 선은 오래된 덩굴처럼 어디서 뻗어 나온 줄기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었다.
“근데 말이야.”
가하란은 신문을 내려놓으며 필렌을 바라봤다.
“생각하는 건 좋지만, 생각만 하는 건 좋지 않아.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간이 망가지거든. 때론 가장 단순한 게 정답일 때가 있어.”
“정말 그럴까요?”
“사실 나도 몰라.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진 않겠지. 하지만 넌 나보다 영리하니까 잘 해낼 거라 믿고, 괜히 한마디 해본 거야. 이 아줌마의 고민까지 네가 다 가져가. 난 편한 게 좋으니까.”
“……하하하.”
“답이 안 나오면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지. 놀랍게도 그러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 거기에 강한 무력이 동반되면 더욱 좋지. 허스 봐! 총수 시절에 귀빈들 다 참석하는 자리에도 나리아 곁에 있고 싶다고 안 나오잖아. 힘센 놈이 정의야.”
힘센 놈이 정의.
억지스럽고, 어린애의 투정 같은 말이지만, 고심해 보면 진리 같기도 했다.
“전술이 더해지면 더욱 좋겠죠?”
“어느 쪽이든 우월한 놈이 이기겠지. 허스는 무적이지만 어쨌든 개인이야. 그 친구는 모든 걸 감싸 안을 수 없어. 넌, 어떻게 해볼래?”
“생각해 둔 게 있긴 해요. 저만의 방식을.”
필렌이 짓궂게 웃으며 일어섰다.
“네 반대편에 있는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 편히 자기는 그른 것 같다.”
챙이 넓은 농사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가는 필렌이었다.
가하란은 식탁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여러 대의 거병이 나란히 서 있었다.
“저만의 방식을 갖춰 봐야겠죠. 만일을 대비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