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야, 야. 너 괜찮은 거야?”
뺨이 얼얼했다. 가하란은 왼뺨을 매만지며 에단을 빤히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 갑자기 기절해서 때려본 거니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픈데.”
“미안. 내가 저 아저씨랑 붙어 다니다 보니 힘 조절하는 법을 잊어버렸어. 너도 잘 알겠지만, 저 아저씨는 후려 패듯 쳐야 겨우 인지하니까.”
이유야 이해 간다지만, 가하란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타챠를 바라봤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그보다 다녀온 것 같구나.”
“네. 안원에 잠깐 다녀왔어요.”
“길이 열리는 걸 봤다. 준비된 의식 없이 안원을 제멋대로 드나드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이지. 피를 나눈 형제 중에서도 그런 게 가능한 건 대를 잇는 제사장뿐이고.”
타챠가 일어섰다.
짙은 그림자가 가하란의 얼굴을 가렸다.
“시작해도 되겠지?”
“안 된다고 하면 제대로 한 대 맞을 거 같으니…….”
가하란은 일어서서 타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다시 시작하죠.”
비스듬하게 뚫린 타챠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나왔다. 가하란은 콧김에 나풀거리는 앞 머리카락을 꾹 누르며 뒤로 물러섰다.
“안원에서 뭘 한 거냐?”
“대여해 왔어요.”
“대여?”
가하란은 오른손을 바라봤다. 외력이 깃든 그 손에 이질적인 힘이 감돌고 있었다.
“혹시 보이시나요?”
타챠에게 물었다.
“느껴진다. 네가 말한 기괴한 외력 말고도 무언가가 더해져 있어. 친숙하면서도 두렵군.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힘이야.”
“안원에 있는 정령에게서 힘을 빌려 왔어요. 아마 오래 머물진 않겠죠.”
말하는 도중에도 외력이 붙들고 있는 사슴의 힘이 흩어지고 있었다.
원천 제공자가 허락했음에도 힘의 분산은 막을 수 없었다. 계속 붙들어 둘 수 있다면 영구 동력이 가능할 텐데.
“힘의 대여라.”
“아저씨가 산테 님에게 힘을 이어 받는 것과는 형태가 좀 달라요. 전 외력을 통해 붙잡아 둘 뿐이니까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에 감겨 있던 외력을 전신으로 퍼트렸다.
“처음에는 배터리를 이용해서 신체술의 운동 능력을 따라 해봤어요.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죠.”
“그것도 나름 쓸 만해 보였다.”
“쓸 만해 보이는 정도로는 안 돼요. 그 녀석은 더 대단한 걸 준비해 뒀을 테니까요.”
“그 녀석?”
“친구가 있어요. 여기서는 아니겠지만.”
“복잡한 건 질색이다. 너의 관계는 네가 해결해라. 지금 난, 너의 힘을 견식 하고 싶을 뿐이다.”
“맞아요. 제 일은 제가 해결해야죠.”
외력으로 마나를 붙들 때는 정신력 소모가 대단했다. 다리에 휘감는 것만으로도 착안을 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사슴이 빌려준 힘은 외력에 친화적이었다. 힘의 기화는 막을 수 없지만, 이용하는 건 마나보다 쉬웠다.
“신체술은 체내로 받아들인 마나를 발산하는 것으로 오감을 높이죠. 마치 거병의 출력을 높이는 것처럼.”
외력에 부착된 사슴의 힘이 온몸을 두드렸다.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어서 날 쓰라고.
한없이 달콤한 말이지만, 그렇기에 경각심이 들었다.
출력만이 거병의 모든 것이 아니다. 가용 불가한 마전기는 잉여 자원이 돼 운동 능력을 낮출 뿐이다.
가하란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한 줌의 힘이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사용하려면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날려 보낸다.
외력이 붙잡아 뒀던 정령의 힘을 대부분 흘려보냈다. 기화 속도를 계산해 전투에서 다룰 수 있을 정도만 남겨뒀다.
“흥미롭군.”
타챠가 말했다.
“외력을 얻고 난 후로는 배터리와 연계해 신체술, 아니, 유사 신체술을 사용해 보려고 노력했어요. 배터리 출력과 마나 파장, 그리고 외력. 까다롭지만 분명 성과가 있었죠.”
“지금은 거기에 정령의 기원도 깃들었군.”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날뛰도록 내버려 두면 몸이 버티지 못할 테고, 과하게 제어하면 상충해서 쓸모가 없어지죠.”
가하란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몸이 10cm 정도 뛰어올랐다.
한 번 더 굴렀다.
20cm.
외력이 붙든 정령의 힘으로 신체를 감싸고, 의족의 배터리 출력을 최대치로 짜냈다.
어, 하는 순간에 발밑에 나무가 있었다. 찰나지만 공중에서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6m? 7m?
부유했던 몸이 중력의 손길을 받으며 밑으로 떨어졌다.
쿵.
배터리 분사로 반발력을 상쇄하며 지면에 안착했다.
복잡하지만, 못 다룰 정도는 아니었다. 비트에 접촉했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비트의 정보는 무한하나, 지금은 몸뚱이만 다루면 되니까.
“해볼게요.”
자신감이 생겼다.
승리는 멀어 보이나 일격을 먹이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타챠가 제구를 땅에 꽂았다.
거리의 이점을 거둔 채 상대해 주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자비로운 산의 영령이시여!”
타챠가 외쳤다.
착각이었다. 무기를 내려놓은 건 봐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육탄전을 벌이기 위한 사전 준비였을 뿐이다.
타챠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까는 아지랑이처럼 희뿌옇게 솟아나던 붉은 증기가, 이제는 실타래에서 풀려나온 실처럼 선명해졌다.
공포가 실체를 갖춰나갔다.
가하란은 숨을 볼 가득 문 다음 다리를 박찼다.
두렵지만 회피할 생각은 없다.
더 지독한 공포를, 공포의 주인들을 목격해 왔다.
역치가 높아졌다. 정신도 단련됐다. 타챠는 위대한 산의 전사지만 윈테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주먹이 다가온다.
아니, 내 쪽에서 주먹을 향해 돌진 중이다.
어깨 위로 빗겨나간 주먹을 눈으로 잠시 좇았다가 정면을 바라봤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타챠 몸에 돋아난 비늘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세보라면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강하게 쥔 오른 주먹을 살며시 비틀며 내질렀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텅 비어 있는 복부를 향해 주먹이 뻗어진다.
들어간다!
쾅!
피육으로 이뤄진 것들이 부딪쳤는데, 폭발음이 났다.
가하란은 전신을 밀쳐내는 반탄력에 맞서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거리를 둬선 안 된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직감이 알려줬다.
살짝 꺾였던 상체를 다잡고 뒤로 밀려났던 오른손을 위로 뻗었다. 타점은 타챠의 턱.
시선이 마주쳤다. 복부를 가격당했음에도 타챠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열려 있는 턱은 속임수다.
종종 상처를 내보이며 헐떡이는 마수가 있었다.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듯 빈틈을 내보이고 있지만, 그런 마수들의 눈빛은 언제나 예리했다.
덫을 놓는 것이다.
벌어진 상처를 미끼 삼아 적의 숨통을 끊는 것이다.
판단이 섰다. 내지른 주먹을 회수할 수는 없었다. 대신, 타격 방식을 바꿨다.
주먹을 안쪽으로 돌리며 팔꿈치를 세웠다. 주먹에 집중시켰던 외력을 재빨리 팔꿈치로 이동시켰다.
타격 순간에 맞출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콰득!
살짝 도약하며 내지른 팔꿈치가 타챠의 턱에 틀어박혔다. 물렁물렁한 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산의 전사도 이쪽은 단련하지 못한 걸까?
“훌륭하다!”
외침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힘이, 출력이 모자랐다는 걸.
외력과 정령의 힘이, 타챠가 두른 산테의 기운을 뚫어내지 못했다.
아니.
기운이 아니라 육신의 강도(強度)를 이겨내지 못했다.
재수가 안 좋은 게 아니었다.
타챠는 정확히 가늠했고, 난 그러지 못했다.
수년간 치열하게 마수를 사냥했다. 생존을 위해서, 실력 향상을 위해서.
적지 않은 경험, 데이터를 쌓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잠시 잊고 있었다.
눈앞의 전사는…….
“견뎌봐라.”
수십 년간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오로지 강자와 싸움에 임해 왔다는 걸.
먹먹한 소리가 뒤통수를 타고 전해졌다.
흐릿해져 가는 의식 사이로 보인 건 깍지 낀 타챠의 손과 “미쳤어요!”를 외치며 달려오는 에단, 그리고 부리로 연신 타챠를 쪼는 큼지막한 매였다.
* * *
“사람을 죽이면 안 되죠!”
에단은 앞으로 꼬꾸라진 가하란을 들고 연신 뺨을 때렸다.
눈이 반쯤 풀린 상태로 멍하게 하늘을 보고 있는데, 깔끔하게 기절한 것보다 위험해 보였다.
“야! 야!”
툭툭 치면서 말을 걸다가, 흔들면 위험한 수준이라는 걸 파악하고 얌전히 눕혀 놨다.
“호들갑 떨 필요 없다. 그 정도로 죽을 놈이었다면 첫수에 싸움을 그만뒀을 거다.”
“얘 꼴을 좀 보세요. 이게 괜찮아 보여요? 아저씨 말대로 죽지는 않겠지만…….”
아이고, 한탄이 절로 나왔다.
맹하게 뜨여 있던 가하란의 눈이 감겼다.
“비켜봐라.”
타챠가 제구를 들고 옆에 앉았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땅을 움푹 파내 젖은 흙을 한 줌 쥐더니, 그걸 가하란의 이마와 배에 조금씩 덜어 놓았다.
뭐 하는 건지 묻지 않았다.
몇 번이고 봐온 것이니까.
에단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도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전사에게 어설픈 경험은 성장에 방해될 뿐이다. 확실한 경험, 죽음과 가까운 전투만이 각성에 이르게 해주지.”
“전사가 아니라 기술자라고 말한 걸 제가 들었어요.”
“그거나 그거나.”
타챠가 두 손을 가하란의 이마와 배에 올려뒀다. 땅에 꽂아둔 제구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강풍이 부는 것처럼 깃발이 펼쳐지며 좌우로 흔들렸다.
눈에 보이는 붉은 기운이 타챠의 손을 통해 가하란의 이마와 배로 전해졌다.
“이름 모를 존재의 힘이 남아 있는데, 치유의 인도를 거부하질 않는군. 가하란과 상성이 좋아.”
짧은 기도가 끝났다.
에단은 가하란의 안색을 살폈다. 숨도 편하게 쉬고 있었고, 손발도 따뜻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타챠를 바라볼 때였다. 타챠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아파요?”
“…….”
“아픈가 보네. 어쩐 일이래요. 칼도 튕겨내시는 분이.”
“마지막까지 수 싸움 하려는 놈이었다. 찰나간에 그 정도로 머리를 쓰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인데.”
“머리를 쓴 게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한 거겠죠. 싸움이란 게 그런 거니까.”
“아니. 이놈은 분명 내 생각을 읽어내고, 읽어낸 것을 바탕으로 계산한 뒤에 움직였다. 그럼에도 행동에 지체가 없었지. 물론 그 틈새를 파악하고 완벽하게 대처한 게 나지만.”
툭, 뭔가가 떨어졌다.
에단은 바닥에 떨어진 하얀 조각을 들었다. 날카로운 치아였다.
타챠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에단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를 흔들었다.
“우리 아저씨, 이갈이 할 때가 됐나 봐요?”
“충치였다. 빠질 때가 돼서 빠진 거지.”
“요즘은 충치가 반들반들하고 하얗네.”
에단은 치아를 하늘을 향해 던졌다. 다오가 날아올라 이를 물고 저 멀리 사라졌다.
“매에 실어 멀리 날려 보내면 금방 되돌아온다는 설이 있으니 아저씨 이도 금방 날 겁니다.”
“충치래도.”
타챠가 일어서서 제구를 들었다. 창대 끝자락을 가하란 옷자락 사이에 쑥 집어넣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꼭 통돼지 바비큐처럼 들어야 해요?”
“네가 들래?”
“아니요. 무거워서 싫어요.”
“그럼 잔말 마라.”
창대에 꿰어 좌우로 흔들리는 가하란을 바라볼 때였다. 머리 위쪽에서 끽,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에단은 재빨리 손을 뻗어 정체불명의 동물을 낚아챘다.
“원숭이?”
둥글둥글하게 생긴, 굉장히 작은 원숭이였다. 아등바등하며 가하란 쪽으로 두 팔을 뻗는 중이었다.
“가하란을 아는 것 같은데요?”
타챠가 물끄러미 원숭이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시끄럽다.”
끽, 원숭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얌전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