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
타챠의 왼쪽 손목에서 뻗어 나온 흰색 선이 팽창하면 돌진 준비였다.
허리에서 시작된 선까지 합류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돌진해 온다는 뜻이었다.
정보를 품은 선은 거짓을 모른다. 제대로 해석하기만 하면 사전에 정보를 취합,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보인다면, 가능하다.
보인다면.
가하란은 왼쪽 눈을 찡그렸다.
착안으로 보던 선의 세계가 한순간 뭉개지고 있었다. 타챠 몸에서 줄기줄기 뽑혀 나오던 선이 한순간 검붉게 변하더니, 이내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치 않는 건 아니었다.
해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온다!
시각 정보를 배제한, 온전히 사냥꾼의 직감으로 대비했다.
외력으로 끌어당긴 마나를 양팔에 두르고 두 다리를 지면에 박아 넣었다.
회피는 늦었다.
받아내야 한다!
싸아, 서늘한 바람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아니, 소리보다 먼저 타챠의 거대한 주먹이 가슴께를 향해 날아들었다.
가하란은 교차한 팔에 힘을 주며 충격에 대비했다.
쿵!
타격음이 귀에 닿는 순간 통증이 일어났다. 몸이 붕 떠올랐다. 외력과 마나로 감싼 팔목이 짓뭉개지는 것 같았다.
낙법을 취할 새도 없이 등부터 바닥에 닿았다. 몇 바퀴를 굴렀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정비복이 흙먼지로 너저분해졌다. 입 안으로 들어온 모래가 으적으적 씹혔다.
퉤, 침을 뱉어낼 생각이었는데 붉은 게 섞여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침대에서 눈을 떴을 거예요.”
“막아낼 거라 생각했다.”
“과한 믿음이에요.”
“어쨌든 막아냈으니 괜찮다.”
마른기침을 내뱉은 후 양팔을 툭툭 털었다. 외력이 붙들고 있던 마나가 흩어지고 있었다.
집중력이 분산되면 외력은 힘을 쓰지 못한다. 타격 순간에 조금 더 침착했다면 충격을 흘려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가하란은 착안을 양쪽 다 열었다.
현실이 뭉개지고 정보로 된 선들이 날뛰었다.
들판과 바위, 근처 나무들이 선의 집합체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타챠는 형태를 유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타챠의 몸에서 선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 후로 아무것도 감지해 낼 수 없었다.
완력 말고 다른 힘이 타챠 몸에 깃들었다.
착안을 닫았다.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체력과 심력이 소모되니까.
정보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나니 타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몸에서 붉은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건 뭐죠?”
“산의 영령께 도움을 받았다. 강신까진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강신은 아니다.
가하란은 어깨를 붙잡고 팔을 크게 돌렸다. 미증유의 힘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산의 영령, 산테의 힘이다.
“산페르 아저씨는 안원 밖에서 힘을 쓰는 건 힘든 일이라고 했어요.”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산의 전사들은 위대한 영령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영혼으로 이어져 있기에 그분의 힘을 잠시나마 이어받을 수 있지.”
“저도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이었다면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위대한 전사’도 그것만큼은 불가능할 테니까. 하지만……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안원에 발을 들이고도 무사히 돌아온 혼. 틈새를 헤매고도 무너지지 않은 영.”
타챠가 제구에 손을 뻗었다. 둘둘 말려 있던 깃발이 활짝 펼쳐지더니, 붉은빛에 감싸여 창대에서 떨어져 나왔다.
“신은 갈구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니까.”
“공학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맞아보면 알게 될 거다.”
다시 온다.
창대에 휘감긴 붉은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를 써서 피해야 한다.
회피를 인지하고 몸에 신호를 보내 놨는데도, 반박자 느렸다.
이미 창대는 눈앞에 있었다.
가로로 누운 창이 공기를 찢으며 다가왔다. 목적지는 옆구리였다.
가차 없는 공격이었다.
쐐애액, 창대가 눈앞을 쓸고 지나갔다. 뒤로 누워버린 건 최고의 한 수였다.
어설프게 막거나 살짝 움직여 피하려 했다면 창대 끝에 걸려 뼈마디가 작살났을 테니까.
지면에 등이 닿자마자 의족에 부착된 배터리를 사용했다. 마나 파장이 분사되며 나자빠진 상태에서 한 바퀴 굴러 일어설 수 있었다.
“재미난 걸 달고 있구나.”
“제 목숨을 몇 번이고 살려준 고마운 기술이죠.”
반대쪽 발뒤꿈치로 의족 정강이를 툭툭 쳤다. 배터리가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예비용 배터리를 끼워 넣고 덮개를 닫았다.
“방금 그거, 한 번 더 할 수 있는 거냐?”
“세 번 정도 더 할 수 있죠. 그 이상은 무리고요.”
“땅에 버린 거 배터리 같은데, 그게 더 있다면 계속할 수 있겠군.”
“아니요. 의족 내구성이 못 버텨요. 생활하면서 깨달은 건데, 가끔은 쇳덩이보다 사람 몸뚱이가 단단하더라고요.”
가하란은 손도끼에 부착해 놓은 배터리도 가동시켰다.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붉은빛에 휩싸인 창대는 뭉툭한 도끼날도 박살내 버릴 것이다.
버티려면 마전기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금 살살해 주시면 안 돼요?”
“난 네가 버틸 수 있을 만큼만 힘을 주고 있다.”
“슬슬 버거워지고 있어요.”
“괜찮다. 잠깐 기절하면 되니까.”
길게 튀어나온 타챠의 입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흥에 겨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아까 말씀하셨죠. 신은 갈구하는 자에게 손을 내밀어 준다고.”
타챠가 창대를 어깨에 이었다.
“네가 외력이라 부른 힘. 내 눈에는 무언갈 붙드는 힘처럼 보인다. 몸을 관통해 발현되어야 할 마나를 넌 외부에 붙들어서 힘을 쓰고 있지.”
“네. 제대로 보셨어요. 외력으로 마나를 붙들어 사용 중이에요.”
“붙들 수 있는 게 마나뿐일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가하란은 공중에 떠 있는 깃발과 타챠가 들고 있는 창대를 번갈아 봤다.
창대와 깃.
둘을 연결하고 있는 건 개미의 형상을 한 작은 정령들이었다.
정령들이 연결부 역할을 하며 두 제구를 하나로 잇는 것이다.
“아저씨.”
“왜?”
“잠깐만 다녀와도 될까요?”
“뭔가를 해볼 생각이구나.”
“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려고요.”
타챠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으마. 기다림은 강자의 미덕이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오면…….”
“돌아오면?”
“그땐 뭐 아저씨한테 한 대 맞고 침대에서 일어나죠.”
“그것도 나쁘지 않지. 육체는 깨질수록 강해진다. 너는 전사이니 마땅히 그래야 하고.”
“전 전사가 아니에요. 기술자지.”
“아니, 넌 훌륭한 전사다.”
가하란은 입가를 닦아낸 후 바닥에 앉았다.
“괜찮아? 어지러워서 쓰러질 거 같아?”
에단이 다가왔다. 갑자기 주저앉으니까 걱정이 된 모양이다.
“잠깐 다녀올게. 혹시 내가 쓰러지면 받아줘.”
“다녀오다니? 어딜?”
“안원. 제대로 도착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분명 갈 수 있을 거야. 그때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으니까.”
비트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정령 세계, 안원은 착안을 완전히 열기 전에도 몇 번이고 드나들었다.
타챠의 말대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갔던 때가 언제더라?
샬롯의 작은 손이 떠올랐다.
손을 붙잡고, 눈을 감고, 바라고 나면…….
“그대로네.”
가하란은 제멋대로인 안원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의식이 이전된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방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온 것처럼, 너무나도 간단하게 안원에 발을 디뎠다.
비트에 녹아들며 위상을 여행한 덕일까?
언젠가 봤던, 몸에 불을 두른 뱀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
어릴 땐 도도하게 지나가기만 했던 뱀이 고개를 쓱 내리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왼쪽 착안이 저절로 발동했다.
안원에서는 선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릴 적,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저 신비로웠다.
그리고 지금.
알고 나니 두려워진다.
이곳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개성을 갖춘 채 살아가고 있는 정령들은 하나같이 강력했다.
강(姜).
현실에서 자아를 버리고 그저 부유물로 살아가는 정령과는 차원이 다르다.
몇몇 세계가 층으로 완전히 분리돼 서로 개입할 수 없는 이유를, 그렇게 설계한 까닭을 알게 됐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정령 몇 체만 현실로 넘어와도 대부분의 도시는 대항력을 잃을 것이다.
그 옛날, 융성했던 나타 왕조조차 비트에 의해 찰나간 현신했던 정령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너무나도 위험한 힘.
불을 두른 뱀이 고개를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마른침을 삼킨 후 긴장된 숨을 토해냈다.
산페르 옆에 있을 때는 이런 기분을 맛보지 못했다. 아저씨가 배려해 준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형태.
그들이 힘을 마음껏 발산한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드넓구나.”
다른 위상을 거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으나,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인식조차 못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있다는 걸 알며 접촉까지 마친 상태였다.
크나큰 차이였다.
미지의 천을 벗겨냈으면 이해가 가능하다.
언젠가…….
“느낌이 왔지. 사라졌던 오래된 형태의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을 때 네가 떠올랐거든.”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날개를 접으며 바닥에 내려앉는 사슴이 보였다.
“여기 다시 오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나는 너희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 않지만, 네가 많이 변했다는 건 알겠네. 인간들은 참 빨리 큰단 말이지.”
사슴이 다가왔다.
“놀러온 거야? 아니면 여기서 눌러살게? 널 기다리는 친구들이 아주 많아.”
“인기가 식질 않네요.”
“새로운 장난감이 좀처럼 안 나타났거든. 너만 한 놀잇감이 없지.”
저 멀리,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날뛰고 있는 정령들이 보였다.
그들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이쪽으로 와, 재미있을 거야, 육체가 꼭 중요한 건 아니잖아?
“변함이 없네요.”
“변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가하란은 손을 뻗어 사슴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사슴님.”
“그 징그러운 호칭은 잊지도 않았네.”
“이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죠.”
“하나 만들든지 해야지.”
“만들면 알려주세요. 그 이름으로 불러드릴 테니.”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사슴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온 거야? 저번에 내가 한 얘기 잊었어? 다음에는 네가 오지 말고 날 그쪽으로 초대하라고 했을 텐데.”
“현신. 네, 기억하고 있어요.”
가하란은 손끝을 바라봤다. 이곳에 있는 건 육체가 아니었다. 과연 외력이 발동할까?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령 세계에서 근원을 발현해 거병의 팔을 만들었을 때처럼, 손끝으로 외력이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사슴의 눈이 검푸르게 변했다.
“그건 뭐지? 이곳에 없는 힘인데.”
“외력이에요. 저도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요.”
“그걸로 뭘 할 생각이야?”
“당겨보게요.”
“응?”
“사슴님을요.”
“날?”
“온전한 현신은 힘들어요. 방법도 잘 모르고, 또 위험하죠. 하지만 한 줌의 힘이라면…….”
“잠깐만. 너 바깥에 있는 애들처럼 내 힘을 끌어다 쓰겠다는 거야?”
“실험 삼아 해보게요.”
“이것 봐. 아주 제멋대로네.”
“안 될까요?”
사슴의 눈이 다시 녹색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거 아주 재미있을 거 같아. 가장 오래된 형태들처럼 나도 외부에 개입할 수 있는 거야? 표리 영역의 틈새를 거치지 않고도?”
“아직은 몰라요. 그래서 해보려고요.”
“도전은 좋지. 자! 마음껏 가져가. 원하면 다리 한 짝 뽑아줄까?”
“그건 좀…….”
가하란은 사슴의 털을 한 움큼 쥐고 살며시 손을 들었다. 털을 뽑는 게 아닌 외력으로 사슴의 힘을 끌어내는 이미지로.
손끝에 마나와는 다른 힘이 뭉글뭉글 맺히고 있었다.
“정말 가져갔잖아.”
“써보고 올게요.”
“돌아가게?”
“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다음에 올 때는 다른 선물도 가져와.”
“기다려 보세요. 이걸 보고 나니 떠오르는 게 있어요.”
“뭔데?”
가하란은 눈을 반쯤 감으면서 말했다.
“인지 통합 유도 장치를 왜 유사 정령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거든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릴게. 날 밖으로 끌어내 봐.”
가하란은 사슴을 향해 미소를 보인 후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