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7화
사람들의 시선이 타챠에게 쏠릴 때였다. 남자가 박수를 두 번 쳤다.
“이쪽 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점검표 받아주세요. 간단한 설명 후에 작업 시작할 테니까요.”
남자와 거병 기사들이 자리를 비켰다.
에단은 바닥에 눌러앉은 타챠에게 갔다.
“누구예요?”
“너도 아는 인간이다.”
“전혀 모르겠는데.”
“가하란. 이름은 들어봤지?”
“예? 그 친구, 죽었잖아요.”
따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니나 이름은 질리도록 들었다. 에단은 멀리 서 있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동시에 밀레나와 샬롯, 그리고 율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하란의 장례식이 치러진 날, 다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덤만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 있다.”
“예?”
“저렇게 살아 있으니 살아 있는 거다. 그거면 됐고.”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사기꾼인가?
아니지. 타챠가 조잡한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갈 리 없다.
그렇다는 건 정말 가하란이라는 건가?
“아저씨 코가 잘못됐을 리는 없으니 가하란이 맞겠죠. 근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나야 알 수 없지.”
타챠가 콧김을 내뿜으며 가하란을 응시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친구한테 대전사의 자격이 있어요?”
“모른다. 확연하게 보이지 않아. 그렇기에 견줘볼 가치가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되돌아왔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틈새에 갇혔다가 복귀한 자들이 몇몇 있으니까.
“얌전히 계세요. 얀스 누님한테 물어보고 올 테니.”
타챠의 어깨를 툭툭 친 다음 정비소 건물로 들어갔다. 르완 용병들과 인사 후 얀스의 위치를 물었다.
“얀스라면 곧 올 거야. 밭 보러 잠깐 나갔거든.”
“필렌 님보다 더 열성적인 거 같아요.”
“귀찮아했는데 돌보다 보니 정이 든 거겠지.”
에단은 건물 밖에 있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저 친구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누구? 가하란?”
“네.”
“재활 치료라고 하던데. 자세한 건 듣지 못했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대장이 말해줬겠지.”
“다들 저 친구하고 아는 사이예요? 보니까 몇몇 삼촌들이 가하란한테 말을 걸던데.”
“저 녀석이 차려준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어. 짧은 인연이었지.”
“그래요?”
“살가운 놈이야. 두어 번 봤는데 정이 가. 음, 밀레나 때문이려나?”
일 없으면 여기 좀 봐라, 말을 남긴 후 자리를 비키는 용병이었다.
의자에 앉아 멀뚱히 가하란을 지켜봤다. 거병 사이를 오가며 바쁘게 정비 중이었다. 거병 기사들도 그 뒤를 쫓으며 설명을 듣는 것 같았다.
“왔네?”
문을 열며 얀스가 들어왔다.
“왔죠. 그보다 저 친구에 대해 설명 좀 해줘요.”
“가하란하고 친분이 있었던가?”
“아니요. 주변 사람을 통해 많이 들어봤을 뿐이죠.”
얀스가 주억이며 말을 꺼냈다. 돌아온 자이며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정비를 돕고 있다고.
“틈새, 가하란 말로는 위상이란 곳의 마나 분포도가 여기와는 많이 다르다고 해. 그래서 적응하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는 중이고.”
“그래요?”
가하란의 손짓에 따라 거병 기사들의 고개가 크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미 새의 부리를 쫓는 아기 새들 같았다.
“타챠 아저씨가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가하란한테?”
“네. 한바탕할 모양이에요.”
“이유 없이 그럴 분이 아닌데.”
“그렇긴 하죠. 근데 원래 저런 인상이었나요?”
“아니. 싸움하고는 인연이 없는 애였어. 마법 공학, 특히 의수 쪽 개발에 몰두하던 연구자였으니까. 어릴 땐 얼굴이 순했지. 지금도 잘 뜯어보면 그때 얼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인상이 많이 바뀌긴 했어.”
“틈새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건 그런 거겠죠. 협회에도 알려야겠네요. 총무님 지금 이쪽에 넘어와 있죠?”
“글쎄. 칼리고 씨 위치를 알아내는 건 쉽지 않잖아.”
“하긴, 총무님도 한곳에 진득하게 있는 분이 아니죠. 대부분 동부에 계시니 제가 넘어갈 때 소식 전하면 되겠네요. 밀레나랑 샬롯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아, 율 누나도.”
얀스가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요?”
“쟤를 데리고 가. 동부로.”
“……견적 내보고요. 자기 몸 지킬 정도는 돼야 갈 수 있으니.”
“타챠 씨가 검증해 주겠지.”
시계로 시선을 던질 때였다. 반대쪽 문이 벌컥 열리며 딜라가 나타났다.
잰걸음으로 다가온 딜라가 다리에 찰싹 붙었다.
“언제 왔어!”
“지금. 딜라도 잘 지냈지?”
“어!”
방글방글 웃는 게 정말 귀엽다. 에단은 딜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도마뱀 아저씨 보러 가자.”
“아저씨 왔어?”
“왔지.”
살며시 미소 짓는 얀스를 뒤로한 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땅바닥에 앉아 있는 타챠에게 다가갔다.
타챠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아저씨!”
바둥거리는 딜라를 타챠 꼬리에 올려뒀다. 바짝 일어섰던 비늘들이 평평하게 누웠다. 딜라가 다치지 않도록 눕힌 것이다.
“아저씨, 언제 왔어?”
“…….”
“아저씨, 나 새가 되고 싶어. 해주면 안 돼?”
딜라가 타챠의 머리를 붙들며 말했다. 길게 한숨을 뽑아낸 타챠가 딜라를 한 손으로 높이 들었다.
“와아!”
터벅터벅 걷던 타챠가 에단을 노려봤다. 에단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차피 기다리는 동안 할 것도 없잖아요. 딜라랑 놀아주세요.”
“네가 하면 되잖아.”
“저보단 아저씨를 더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래요.”
만사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딜라가 무언가 요구하면 다 들어주는 타챠였다.
저러니 따를 수밖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생기 넘치는 딜라와 반쯤 탈진한 타챠를 구경 중일 때였다.
“아저씨한테 저런 모습도 있었네요.”
가하란이 옆으로 다가왔다.
“일은요?”
에단이 물었다.
“마무리 지었어요. 애초에 오래 걸릴 작업은 아니어서.”
딜라를 높이 든 타챠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비소에서 점점 멀어진다.
“에단이에요.”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이 붙잡으며 이름을 말했다.
“그쪽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기뻐할 사람이 동부에 아주 많아요. 몇몇은 눈물을 줄줄 흘릴 것 같고.”
“에단 씨는 국경을 몇 번이고 넘었다고 했죠?”
“네. 협회 일 때문에 넘은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어서 오간 것도 있고.”
협회란 말에 가하란이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근데 서로 씨 붙이면서 말 높이는 거 번거롭지 않아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제가 원체 격식 같은 걸 못 차리거든요. 물론 꼭 필요하다면 하긴 하지만.”
슬쩍 말을 꺼냈다.
“저도 편한 게 좋아요.”
“그렇지? 그럼 서로 편하게 하자.”
에단은 어깨에 힘을 뺐다.
가까이서 본 가하란은 르완의 용병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니, 어쩌면 타챠에 가까우려나?
“건강해 보인다고 말하면 무례한 거겠지?”
“아니. 사지 멀쩡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건강한 거 맞잖아. 무례랄 것까지야.”
가하란이 먼 곳을 보며 말을 이었다.
“들었어. 틈새, 위상에서 돌아온 사람치고 멀쩡한 사람이 없다고.”
“워낙 험악한 곳이니까. 아, 직접 경험해 본 사람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우습긴 하네.”
“난 재수가 좋았어. 어쨌든 사람이 살 수 있는 위상이었으니까. 생존에 필요한 것이 심각하게 결여된 공간이었다면, 이곳으로 못 돌아왔겠지.”
에단은 허리에 달아둔 주머니에서 분홍빛 열매를 꺼냈다.
“운, 재수. 그런 것도 다 실력이라고 하더라. 자, 생환을 기념하는 선물.”
“희한한 과일이네.”
“먹어봐.”
가하란이 열매를 입에 넣고 씹었다. 얼굴 표정이 금방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 구하느라 일주일 넘게 고생했어.”
“…….”
“솔직하게 평가해 봐.”
“끔찍한 맛이야.”
“그렇지? 하여간 저 아저씨 때문에 안 해도 될 고생을 했다니까. 가능하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내 힘으론 어림도 없고.”
가하란을 슬쩍 바라봤다.
“타챠 아저씨가 널 대전사로 여기는 거 같아.”
“대전사?”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 혹은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줄 상대.”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어때? 저 도마뱀 씨한테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모르겠어. 내가 본 타챠 아저씨의 창술은 마법에 가까웠거든. 삽시간에 주변을 초토화시켰지. 대항한다는 게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아.”
“근데 겁먹은 얼굴은 아니네.”
“봐버렸거든. 말이 안 되는 힘을.”
“말이 안 되는 힘?”
가하란이 앞으로 걸어가며 작게 말했다.
“용이란 게 말이 안 되긴 하지?”
“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용?
“받아라.”
타챠가 돌아와 딜라를 안겨주었다. 마음껏 놀았는지, 딜라도 칭얼대지 않았다.
“다녀오마.”
“저도 같이 가요.”
딜라를 얀스에게 맡기고 타챠를 따라나섰다.
타챠와 가하란. 둘은 나란히 서서 숲길을 걸었다. 말은 주고받지 않았다.
서로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여기면 되겠군.”
타챠가 제구를 땅에 꽂으며 말했다. 탁 트인 벌판이었다.
에단은 평평한 돌에 앉았다. 다오도 곁에 내려와 자리를 틀었다.
“설마 팔다리를 부러트리진 않겠지.”
걱정을 담아 두 사람을 바라봤다.
* * *
“외력이라고 해요. 저도 어떤 힘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외력이라. 흥미롭군.”
“아저씨에게 통할지는 모르겠네요. 사람을 대상으로 쓴 적은 없어서.”
“마음껏 해봐라!”
타챠가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허공을 움켜쥐며 당겼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 같았다.
“시작하기 전에, 너에게서 위대한 분의 냄새가 난다.”
“산페르 아저씨를 말하는 거라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쪽으로 넘어온 순간 사라지셨거든요. 저한테 어딜 간다고 말씀해 주는 분이 아니라서.”
“자유로운 분이지. 그분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닌 전혀 다른 힘이라. 즐길 수 있겠어.”
가하란은 손목을 턴 후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애용하는 무기다 보니 이게 손에 없으면 맛이 안 살았다.
“배터리는 안 쓸게요. 아저씨 피부가 상할 수 있으니.”
“괜한 걱정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라.”
“상황 봐서요. 저도 마수 말고 상대해 보는 게 처음이거든요. 아, 마수보다 위험한 분하고 놀긴 했지만.”
간을 볼 필요는 없었다. 아저씨의 능력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재지 말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왼쪽 착안을 열었다. 현실과 선의 세계가 겹치며 다양한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그 눈, 네 의지대로 쓸 수 있게 됐구나.”
“익히는데 고생깨나 했죠.”
“하지만 본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지.”
꿍, 소리와 함께 타챠가 전진했다. 선수를 양보할 줄 알았는데, 가하란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주변을 휘감은 선들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거센 힘의 파장이 느껴진다. 감지와 동시에 현상이 변하고 있었다.
내질러진 주먹.
공기를 할퀴며 다가온 주먹을 피해내며 다시금 거리를 뒀다.
타챠의 몸에서 가닥가닥 뽑혀 나오는 선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계속 보기만 할 거냐?”
“조금만 더요.”
전면으로 짓쳐들어오는 주먹 하나하나가 위험했다. 타격당하면 골절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선(死線)에 올랐을 때야 비로소 찾아드는 첨예한 긴장감.
수년간 마수를 사냥하며 체득한 사냥꾼의 감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다시 온다.
거침없는 맹공이다. 타챠라는 인물이 주먹에 담겨 있었다. 거세면서도 정직하다.
속임수가 없는 정면 공격.
“이제 된 거 같아요.”
가하란은 날아드는 타챠의 꼬리를 보며 왼손을 당겼다.
손끝에서 시작된 외력이 정보의 선을 따라 이동하며 꼬리에 닿았다.
“기괴한 힘이구나.”
타챠는 멈춰 선 꼬리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 외력이면 대항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주저할 이유가 없군!”
꼬리를 붙들던 외력이 처참하게 분해돼 튕겨져 나갔다. 가하란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뜻대로 되진 않네요.”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