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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16화 (416/558)

제416화

“굳이 거길 가야 했어요?”

“넌 이해할 수 없겠지. 새로운 경험이라는 건…….”

에단은 손을 내밀어 타챠의 입을 막았다.

“됐어요! 또 이상한 소리 늘어놓으려고.”

타챠가 입을 벌려 기다란 혀로 손을 치워냈다.

“모자란 놈.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소중하죠. 누가 안 소중하대요? 근데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곳에 있는 열매를, 정체불명의 과일을 먹어 보겠다고 난리 치는 게 소중한 경험에 들어가요?”

“……인간족들이란.”

“할 말 없으면 꼭 그 말 하더라.”

딱 봐도 위험해 보였다.

진액이 뚝뚝 떨어지는 가시덩굴에 말라비틀어진 동물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게 안 위험해 보인다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 괴상한 식물에 접근하지도 않고…….”

말을 끝맺지 못한 건 타챠가 불쑥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손바닥 위에 연분홍빛 열매가 보였다. 새끼손톱 크기에 동글동글하다.

“그래서 안 먹게?”

“먹긴 먹어야죠. 그 고생을 했는데.”

“결국 먹을 거면서 주절주절 말은.”

“저니까 이 정도로 말해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아저씨 곁을 떠났다고요. 아니지, 이미 다 떠나서 없잖아요.”

“고독은 삶에 필수적인 요소다.”

“외로운 것도 좋죠. 근데 평생 혼자 살 건 아니잖아요. 우리 입이 왜 뚫려 있어요? 소통하려고 뚫려 있는 거잖아요.”

“그 뚫린 입이 모든 재앙의 씨앗이라는 걸 인간들은 모르고 있지.”

“누가 할 소리를. 아저씨가 입만 열면 분위기 험악해지는 거 알죠?”

“그건 인간족의 이해심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저번에 있었던 일은요? 그 순하디순한 위드로 할머니가 아저씨한테 인상을 잔뜩 쓴 건요?”

“……하여간 인간족들이란.”

타챠가 눈을 흘겼다.

에단은 열매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식감은 모래를 씹는 거 같고, 맛은 밍밍했다. 단맛보다는 쓴맛과 신맛이 강하다. 목숨을 걸어야 할 맛은 절대 아니었다.

“그 고생 한 대가가 고작 이런 맛이에요?”

“미식이로군.”

“예?”

“미각에 집중해 봐라.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미식의 길을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아저씨 꼬리가 얌전한데요? 아예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잖아요.”

타챠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슬그머니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데 이미 늦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다시금 뻔뻔하게 말하는 타챠였다. 에단은 혀를 차며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일주일이나 돌아 왔어요. 원래대로라면 일주일 전에 복귀해서 시원한 물에 몸을 담가야 하는데, 아저씨 덕에 숲에서 고생한 거죠.”

“청명한 하늘이야.”

타챠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하늘 높이 날고 있던 다오가 수직으로 내려왔다.

커다란 날개를 접은 다오가 타챠 어깨에서 자리를 틀었다.

“주변에 뭐 없나 보네요. 대마수 쪽으로 이동하던 놈들도 흩어진 거 같고.”

“이지가 있는 것들은 돌아서고 있고, 본능에 충실한 것들은 대마수에 합류하고 있어. 게웰, 그놈이 불러들이는 거겠지.”

에단은 다오의 턱을 간질이며 물었다.

“아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에 변함이 없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배려를 해줄 수 있지. 서쪽의 불청객은 정당한 요구를 했다. 그놈은 살 권리를 주장했어. 그걸 탄압할 명분은 나에게 없다.”

“저게 수천, 어쩌면 수만의 인간을 죽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직은 아니지. 저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 공생 중이다.”

“저게 영원히 자리를 지키고 얌전히 있을까요?”

“모르지. 나는 마수가 아니다. 마수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저것들이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그때 가서 물음을 던지면 된다.”

“그때가 되면 늦지 않을까요?”

타챠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에단을 바라봤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마수나 인간족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니, 인간의 도덕으로 보면 인간이 더 악하지. 무형의 가치를 숭상하는 게 아닌 재물을 탐내고, 그 재물을 위해 동족을 무참히 죽이니까.”

“……아저씨랑 깊게 대화하면 머리가 아파요. 이거나 드시죠.”

푸르스름한 사과를 하나 따서 타챠에게 던졌다. 입을 크게 벌린 타챠가 날아든 사과를 한입에 씹었다.

으적 소리가 나고, 타챠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인간족이라고 해서 다 악한 게 아님을 잘 안다. 오히려 선한 쪽이, 아니, 이성을 잘 붙들고 있는 쪽이 더 많지. 악이 득세했다면 인간족은 진즉에 씨가 말랐을 테니까.”

“타린족은 부족끼리 다툼은 없어요?”

“다투기엔 우린 너무 멀리 있지. 가까이 있다고 해도 다툴 시간이 없다. 단련할 시간도 부족한데 허튼 것에 심력을 낭비할 순 없지.”

“무승의 삶이란 어렵네요.”

“어렵지 않다. 너희가 너무 복잡할 뿐.”

에단도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푸르스름한 것 치고는 달콤했다.

“선과 악이라. 아저씨 기준에 악은 뭔가요?”

“인간 도덕에 빗대서 악을 말했지만, 우리에게 있어 악은 태만한 자다.”

“성실하게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면, 타린족 기준으로 악은 아닌가요?”

“그자의 업이 살인에 닿아 있다면 그건 악이 아닐지도 모르지.”

“무섭네요.”

“어디까지나 개념론일 뿐이다. 만일 그러한 자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제거당하겠지. 구도자의 삶을 산다고 여겨도, 다른 이가 보기에 미치광이 살인마일 테니까.”

“엇비슷하네요, 인간과.”

“세상은 단순하다. 단지 아까도 말했듯, 너희가 복잡할 뿐이지.”

쉬고 있던 다오가 다시 날아올랐다. 긴 울음과 함께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네요.”

눈에 익은 산길을 바라봤다. 곧 마을이 보일 것이다.

딜라는 잘 지내고 있을까?

당돌한 척하지만 울음이 많은 애였다. 정기 순찰을 나갈 때마다 빨리 오라고 바짓단을 붙드는데,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딜라가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저씨 꼬리 만지는 거 엄청 좋아하니까.”

“난 그 애가 버겁다.”

“왜요? 샬롯 어릴 때보다 얌전한데.”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샬롯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노는 아이였다. 가끔 내가 하늘로 던져도 별문제 없는 아이였고. 하지만 딜라는 다르다. 너무 연약해. 겁이 날 정도로.”

에단은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기억나요? 딜라가 아저씨 꼬리 잡고 기어오르다가 떨어진 날.”

“말도 꺼내지 마라. 그건 역경이었다.”

“어찌나 울던지. 비일 형이 온갖 재롱을 부려도 안 그쳤잖아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며 고개를 내젓는 타챠였다.

희한하게도 아이들은 타챠를 좋아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 때문에 멀리할 법도 한데, 만나는 아이마다 타챠에게 겁 없이 다가섰다.

외형과 달리 순박한 에너지 같은 게 흘러나오는 걸까?

“뭘 그렇게 보냐?”

“아니요. 순박함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서요.”

“뭐?”

타챠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맞은편에서 거병 세 기가 걸어왔다.

왼쪽 어깨에 흰색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도시의 허가를 받은 사냥꾼들이다.

“이번에는 좀 늦었네.”

체임버 덮개가 열리며 아는 사냥꾼이 나타났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죠. 나가는 중이에요?”

“정탐반에서 무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혹시 오는 길에 뭐 본 거 있어?”

“아니요. 이쪽 길목은 괜찮았어요.”

에단은 하늘에 있는 다오를 가리켰다.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겠군. 아무튼 고생했어.”

“예, 형님도 수고하세요.”

대마수가 나타나고 난 후 이상 행동을 보이는 마수가 늘어났다. 해가 지날수록 수도 늘어나 사냥꾼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움직임이 좋군.”

멀어져 가는 거병을 보며 타챠가 말했다.

“움직임이요?”

“조잡한 물건임에는 변함없지만, 이전보다 고르게 힘이 전달되고 있다.”

“아저씨는 거병을 싫어하면서 누구보다 거병에 대해 잘 아는 거 같아요.”

“질리도록 봐왔으니까. 오히려 못 알아채는 네 눈이 한심할 뿐이다.”

“전 넓게 보는 중이라 사소한 건 눈에 잘 안 들어와요.”

“위대한 랍파는 작은 것도 세심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법이지.”

“제가 아직 위대하지는 않아서. 아! 혹시 제가 곧 위대해질 거라는 뜻인가요?”

“……인간족은 언어유희를 모르지.”

에단은 으쓱거리면서 걸음을 뗐다.

허름한 1차 울타리를 지나 견고하게 세운 방책에 도착했다. 경비 중인 도시군에게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 외곽에 늘어선 정비소가 보였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익숙한 마을 냄새를 한껏 들이켜며 움직일 때였다.

“뭐가 저리 많대요?”

얀스의 정비소 앞에 거병이 늘어서 있었다. 숫자가 족히 열은 넘었다.

표식을 살폈다. 생김새가 다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얀스는 르완 용병단 소속이고, 르완이 보유한 거병만 손보는 중이었다.

일손이 없어서 다른 곳의 거병들은 정비 안 하기로 했을 텐데.

“시동키 넘겨주시고 이쪽으로 오면 됩니다.”

늘어선 거병 옆에서 시동키를 넘겨받는 남자가 있었다. 나이가 엇비슷해 보인다. 아니면 한두 살 적거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정비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남자는 정비소보다는 전장에 있어야 한다.

“아저씨?”

타챠가 쿵쿵 걸음을 떼며 걸어 나갔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바닥에 끌리던 꼬리가 바짝 들리더니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았다.

뭐지?

급하게 타챠 뒤를 쫓아갔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감정적이게 된 타챠가 사고를 칠 것 같았다.

타챠가 남자 앞에 멈춰 섰다.

남자 역시 타챠를 올려다봤다.

“생긴 건 다르나 냄새가 같았다.”

“체취라는 게 변하진 않나 보네요.”

“목소리도 달라졌군.”

“굵어지긴 했죠. 악을 많이 썼더니 갈라지기도 했고. 근데 아저씨는 그대로네요.”

“나도 변했다. 더 멋있어졌지. 여자들이 한번 보면 흠뻑 빠질 정도로.”

“재미없는 농담도 여전하시네요.”

“농담이 아니다. 진실이지.”

아는 사이인가?

어쩌면 전장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년 넘게 타챠와 붙어 다녔는데, 저런 얼굴은 본 적이 없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일단 묵례로 인사했다.

“어릴 때 너에게 전사의 기질이 있다고 말했지. 네 혼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해졌고, 육체 역시 제대로 단련했구나.”

“원해서 한 건 아니지만 튼튼해지긴 했죠. 아저씨 말이 옳았어요. 몸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질겨지긴 하더라고요.”

“그래! 그래야 전사지.”

크하하, 쩌렁쩌렁하게 웃음을 뽑아내는 타챠였다. 타챠가 웃을 땐 둘 중 하나였다.

못 보던 음식을 만났을 때.

그리고.

“따라와라. 얼마나 단련됐는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

대전사에 합당한 인물을 만났을 때.

“지금은 곤란해요.”

남자가 뚝 잘라 말했다. 타챠가 인상을 써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이거 끝내고 시간 낼게요. 저도 확인하고 싶은 게 몇 개 있어요. 이 힘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아저씨라면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겠죠.”

“기대되는 말이구나. 좋아, 기다리마. 얼마든지 기다리겠다.”

쿵!

타챠가 제구로 땅을 찍으며 제자리에 앉아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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