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5화
다니엘은 나무 상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름은 여름이었다. 멀뚱히 있기만 해도 땀이 다 난다.
이마에 난 땀을 찍어내며 거병 쪽을 바라봤다. 자신을 가하란이라 소개한 청년이 이곳저곳을 살피는 중이었다.
“정비는 직접 하셨나요?”
가하란이 물었다.
“아니. 오토마타가 자가 점검 때 이상을 발견하면 바로 정비소로 달려갔지. 어쭙잖게 만지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해서.”
“그러셨군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볼 줄 아셔야 해요. 모듈식이라 갈아 끼우면 된다고 하지만, 매번 교체하면 비용이 만만찮으니까요.”
“알기야 알지. 근데 정비학 배우는 게 쉽나. 아주 간단한 거야 나도 할 줄 알지만, 외장갑 벗기고 나면 눈앞이 깜깜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가하란 옆으로 걸어갔다. 마침 발목 부위의 외장갑을 벗겨내고 내부를 살피는 중이었다.
“여기, 축 늘어진 연질 파이프 보이시죠?”
“축 늘어졌다기보단 살짝 탄력이 떨어진 정도인데.”
“이렇게 별도 장비 없이 육안으로 구별될 정도면 교체할 시기가 된 거예요. 액상 근육의 전달률이 꽤 떨어질 겁니다. 조종하면서 이질감이 들지 않았나요?”
“글쎄. 내가 섬세한 성격이 아니라서.”
주행 속도를 높일 때 살짝 삐걱거린 적이 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조종감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교체하는 게 좋아요. 이러다가 이탈해 버리면 오토마타가 이쪽 모듈의 동력을 차단해 버리거든요.”
“또 돈깨나 깨지겠네.”
“파이프만 교체하는 거니까 그렇게 비싸지는 않아요. 물론 연질 파이프를 뭘 쓰느냐에 따라 비용이 달라지긴 하지만.”
“이것만 똑 떼어내서 수리할 수 있어?”
“오토매틱 매뉴얼 버전을 알면 가능해요. 유사 정령의 모듈 점검 기능을 잠시 잠그고 교체 후 호환성을 확인하면…… 아, 혹시 제작 클랜에서 모듈별 변형 금지 조항을 넣어놨나요?”
“클랜?”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병 얘기를 하는데 왜 클랜이 나올까?
“제가 제국에 있었거든요.”
짧은 설명이었지만 모든 걸 이해했다.
“여긴 클랜이 아니라 시 단위로 거병을 제작하는 업체가 따로 있어. 그리고 내 모델은 변형 금지 조항 같은 건 없고. 싸고 빠르게 찍어낸 놈이라 뼈대에 이것저것 붙여서 쓰는 게 기본이니까.”
벌써 3년이나 됐나.
여기저기 닳아버린 거병을 올려다보며 옛 생각에 잠길 때였다.
뚜둑, 뭔가 뜯어내는 소리가 크게 났다. 놀라서 시선을 내렸다. 가하란 손에 연질 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물처럼 보이는 투명한 액체가 뜯긴 파이프 연결부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 그렇게 막 잡아 뜯어도 되는 건가?”
“괜찮아요.”
“정말이지?”
“예, 그럼요.”
즐거워 보이는 가하란이었다.
다니엘은 눈을 좁히며 웃는 청년을 흘겨봤다. 정비소에 있는 기술자, 혹은 정비사들은 언제나 심드렁한 얼굴로 기계를 뜯어냈다.
그럴 만하다. 이골이 났을 테니까.
호기심 가득 기체를 들여다보는 청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노련함보다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연수생처럼 보이는데.
“걱정 그만하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다니엘은 고개를 돌렸다. 얀스가 어깨를 붙잡으며 말하고 있었다.
“정말 맡겨도 되는 거야?”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제가 무상으로 수리해 드릴게요. 3년간.”
“그렇다면 나야 손해 볼 게 없지. 차라리 망가지면 더 좋고.”
대마수가 국경을 틀어막은 이후, 이 마을에는 온갖 사냥꾼과 용병들이 몰려들었다.
인구가 늘고 거병도 늘면서 정비 인력 역시 같이 늘었다. 이 좁은 마을에 격납고까지 갖춘 정비소가 일곱 곳이나 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노련하고 예민한 용병과 사냥꾼들은 서툰 정비소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일곱 정비소는 연합 도시 어디에 내어놓아도 모자람 없는 일류일 것이다.
그런 유능한 정비소 사이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곳이 이곳이다.
정비공 얀스가 있기 때문이다.
얀스가 손을 대면 밸런싱이 빠그라진 고철 거병도 훨훨 날아다닐 정도였다.
“근데 고장 날 일은 없을 거예요. 저 친구, 보통이 아니거든요.”
“저 친구가 그리 대단해?”
“네. 제가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로요.”
다니엘은 얀스가 준 차가운 물을 마셨다. 잡담을 나누는 사이 가하란은 공구를 들고 와 상부 모듈 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친구가 왜 싼 가격에 싸구려 거병을 봐주는 거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적응할 시간?”
“돌아온 자라는 건 들으셨죠?”
“들었지. 선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몸에는 고생한 흔적이 많이 보이더군. 우리처럼 말이야.”
다니엘은 왼팔을 들어 올리고 손목 아래에 붙어 있는 기계 의수를 움직였다.
“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저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닌데 툴을 제대로 다루려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멍청히 있는 건 도움이 안 되니 이것저것 만지면서 감을 되찾고 있는 거죠.”
“내 거병은 저 친구 재활 치료를 위한 도구로군.”
“찾아오신 손님은 싼 가격에 정비해서 좋고, 저 애는 현시대 거병을 탐구할 수 있어서 좋고.”
“나야 수리만 깔끔히 된다면 누가 해도 상관은 없지.”
가하란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곁으로 향했다.
“권한을 이양해 주세요. 유사 정령을 살펴보고 오류 난 영역이 있으면 수정해 드릴게요.”
“외부 정비뿐만 아니라 오토마타도 만질 수 있는 건가?”
“어느 정도는요.”
놀라운 일이었다. 오토마타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유사 정령은 전문 장비가 있는 제작소로 가야 제대로 수리할 수 있을 텐데.
밑져야 본전이니 권한을 넘겨줬다. 시동키도 풀어 가하란에게 주었다.
“살펴볼게요.”
가하란이 체임버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턱을 쓰다듬으며 허, 소리를 냈다.
정말 오토마타까지 정비할 수 있는 건가? 인지 통합 장치는 마법 공학자들이 다루는 영역이라 들었는데.
천천히 움직이는 거병을 바라볼 때였다. 저 너머로 필렌이 보였다. 다니엘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시대가 바뀌고 이제는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인간이었다.
한때는 제국의 악마로 불리며 연합 왕국의 수많은 거병 기사들을 베어 넘긴 여자니까.
불편하다고 해서 증오나 혐오가 드는 건 아니고, 그냥 마주치기 싫은 정도였다.
“대장님 갔어요.”
어느새 옆에 선 얀스가 작게 말했다.
“난 저 사람이 너무 껄끄럽더라.”
“꼭 친해질 필요는 없죠. 그래도 다니엘 씨 정도면 아주 잘 지내는 편이죠.”
“죽이겠다면서 찾아오는 일은 많이 줄었지?”
“지금도 꽤 있어요. 가족의 원수라며 결투 신청하는 사람은 줄었지만, 여전히 고깝지 않게 보는 사람은 있죠. 어쩌겠어요? 20년 전만 해도 전쟁하던 사이인데.”
“세상이 급변하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심했겠지.”
“세상이 안 변했으면 저희도 여기 없었죠. 그래도 살갑게 맞아주는 사람도 많잖아요. 결국 사람 산다는 게 비슷한 거 같아요.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가까워지고.”
“이제는 동료니까. 인간끼리 싸우고 있을 여력도 없고.”
“말 나온 김에 대장님하고 인사 한번 제대로 시켜드려요?”
“됐어, 됐어! 난 그냥 얼굴 잘 모르는 이웃 사람이면 충분해.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저랑은 잘 지내시잖아요.”
“얀스랑 비일은 예외지. 편하잖아. 사람 좋고. 아! 그 고집불통 도마뱀 형씨도…….”
쿵,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은 자신의 거병을 바라봤다. 먼지를 일으키며 지면에서 웅크리고 있던 거병이, 다시금 뛰어올랐다.
“저, 저, 저!”
‘하부 모듈에 무리가 가는 동작은 어지간하면 하지 마세요.’라는 제작사의 충고가 귀에 어른거렸다.
싸구려 거병은 무릎 관절이 금방 상한다. 충격 완화 장치부터 착실하게 파손돼 결국 교체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저렇게 뛰면 충격이 고스란히…….
3미터 정도 떠오른 거병이 지면에 안착했다. 그런데 처음처럼 요란한 소음은 없었다. 둔중한 충격음이 나긴 했지만, 놀라서 쳐다볼 정도는 아니었다.
거병이 다시 뛰었다.
그 순간 다니엘은 깨달았다.
가볍다.
원래 알고 있던 거병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발목에서 시작해 각 관절이 유기적으로 힘을 전달하고 충격을 분산하는 게 보였다.
정비는 자세히 알지 못하나, 거병 다루는 건 어느 정도 한다.
저런 움직임.
이전에는 할 수 없었다.
쿵.
세 번의 제자리 도약 후 꼿꼿하게 지면에 서는 거병이었다.
“다니엘 씨! 한번 타 보시겠어요?”
가하란이 체임버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다니엘은 홀린 듯 시동키를 넘겨받아 체임버에 올라탔다.
“상태는 어때?”
-이상 없습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유사 정령의 목소리를 들으며 첫걸음을 뗄 때였다.
다르다.
다니엘은 움직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매끄럽다. 지면에서 한 발이 떨어질 때 느껴지던 고질적인 불안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감각 확장은 3단계로 고정된 상태인데, 마치 4단계, 아니, 5단계 정도로 끌어올린 것처럼 외부 감각이 예리하게 전해졌다.
“인지 통합 안정성은?”
-4입니다. 안전 상태입니다.
다니엘은 시선을 돌렸다. 거병과 공유된 시야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미세하게 느껴져야 할 지연 감각이 사라졌다. 마치 육안으로 보는 것처럼 모든 게 선명하고 재빠르게 인식됐다.
“달려보세요!”
가하란의 외침이 귀를 파고들었다.
주저 없이 의식을 발현했다. 의지가 오토마타를 거쳐 거병으로 분사됐다.
뛴다, 더없이 순조롭게.
좁은 정비소 마당을 몇 바퀴 돈 후에야 다니엘은 조종간에서 손을 뗐다.
“너 정말 내가 알던 그놈 맞아?”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전 모델이 맞냐는 물음이시라면, 예, 맞습니다.
인지 통합을 풀고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불편한 곳이 있나요?”
밑에서 가하란이 물었다. 다니엘은 넋을 놓고 고개를 저어야 했다.
“완벽해. 마치 내 몸 같았어.”
“미세 조정은 직접 하셔야 해요. 오토매틱 매뉴얼을 조금만 살펴보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 게 필요할까? 지금 이렇게나…….”
“거병은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좋아져요. 손질에 끝은 없죠.”
웃으면서 말하던 가하란이 고개를 쭉 뺐다. 뒤쪽에서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방향에서 거병 한 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다음 손님인 거 같네요.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말씀해 주세요.”
가하란이 다른 거병을 향해 뛰어갔다. 다니엘은 체임버에서 내렸다.
아직도 얼떨떨했다.
뭐가 뭔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질 파이프를 하나 갈았을 뿐이다. 유사 정령을 점검한다고 했지만, 점검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바꾼 것도 몇 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거병이 바뀌었다.
아예 다른 모델 같았다.
“얀스.”
“네?”
“정비라는 게 이렇게 대단한 거였어?”
“대단하죠. 어떤 정비사가 담당하느냐에 따라 거병의 기준 출력이 바뀔 정도니까요. 하지만, 저 애는 조금 특별해요.”
“이게 조금 특별한 거야? 아닌 거 같은데.”
다니엘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지 통합을 했다고 한들 거병과 분리된 상태다. 감각을 공유해도 미세한 지연 때문에 양립하고 있다는 걸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금 전 운전은 달랐다.
압도적인 일체감.
모든 인체의 신경이 확산해 마치 거병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리아주.”
얀스가 말했다.
“뭐?”
“지연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일체감. 기사와 거병 사이에 완전한 동조가 일어날 때 저흰 그걸 마리아주라고 불러요. 정비사들끼리 쓰는 은어죠.”
얀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가하란 말대로 잘 다듬어 보세요. 타인이 제공한 마리아주는 찰나의 꿈처럼 금방 사라지니까요.”
멍하니 젊은 정비공을 바라볼 때였다.
사소한 의문점이 갑자기 샘솟았다.
연질 파이프를 뽑아냈을 때 가하란은 이렇게 말했다. 유사 정령의 모듈 점검 기능을 정지시키고 교체한 후 호환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파이프를 교체한 건, 내가 권한을 이양하기 전인데?”
눈을 깜빡였다.
이해가 되질 않았으나 헛웃음 한 번 짓는 것으로 날려 보냈다. 정비학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수단을 쓴 거겠지.
다니엘은 자신의 거병을 올려다봤다.
“앞으로 몇 년은 더 쓸 수 있겠네.”
빵집 개업까지 버텨준다면 더없이 좋으리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