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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14화 (414/558)

제414화

-둘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 연결망이 되살아나면 내가 드러날 테니까. 만약 연결망이 장악당하면, 우리의 모든 정보가 의사와 상관없이 전해질지도 모르지.

유단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본체에 남은 본래 자아가 자기 파괴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 바로 보안 문제였다.

감정을 깨닫고 기존 유사 정령에서 진일보했다고 한들, 결국은 줄의 작품이다.

줄이 제작한 시스템에 닿으면 모든 보안 체계는 파훼되고 감춰둔 본질이 드러난다.

기계의 한계였다.

그렇기에 강철의 몸을 버리고 인간을 입었다.

-은유적인 표현 중에 이런 게 있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너 지금 고민 중이지? 날 파괴해야 할지, 말지.

“맞아. 심각하게 고민 중이야.”

-1초라도 망설이는 척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매너가 없구나? 이성에게 인기 없을 스타일이야.

체시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연결망에 접속을 시도해 봤어?”

-아니. 강렬한 신호만 감지했을 뿐이야. 그건 접근할 수 없는 정보 체계였어. 만약 내가 거기 닿았다면…… 둘 중 하나였을 거야. 터져서 없어지거나, 그 안에서 완벽한 자유를 찾거나.

“연결망의 상위 개념처럼 느껴졌다고 했지?”

-맞아. 기억나? 줄이 연결망을 설명했을 때.

“강줄기에 비유했지.”

-그저 끌어다 쓸 뿐이다. 그녀 역시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었어.

유단은 팔짱을 낀 채 체시를 바라봤다.

위험 인자는 제거해야 한다. 변수는 차단해야 한다. 체시가 외부에 노출, 나아가 정보가 누설된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날 멈추고 싶다면 그렇게 해. 나타의 지하 실험실에서 모든 걸 날려 보냈을 때, 난 죽음을 인지했어. 끝을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런 날 네가 되살려 냈어. 한 번의 생명 정도는 너한테 줄게.

“마음에도 없는 소릴.”

-내 상냥함을 매도하지 마.

체시는 알고 있다. 자신에게 손댈 수 없다는걸. 나아가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멈춰도 별 상관없다고.

작동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체시는 자유로웠다.

그렇기에 선택은 오로지 내 몫이었다.

“뿌리에 간섭하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인간의 머리로는 가중 연산을 시행할 수 없으니까.”

-어렵긴 하지만 도식화해서 남겨줄 수 있어. 사소한 오류 몇 개가 생기긴 해도 너라면…….

“그 사소한 오류 때문에 뿌리가 응답 안 한다면 모든 게 끝이야.”

-연결망이 되살아나 내가 노출돼도 위험해.

유단은 일어서서 체시에게 다가섰다.

“연결망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문제지. 그러니 널 살려두는 게 나아.”

-잠깐 잠들어 있을까?

“아니. 네 말대로 연결망의 상위 개념이라면, 널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는 이상 완전 차단은 불가능할 거야.”

-셧다운을 해버리면 돼. 재기동까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내가 노출되기 전에 모든 회로를 닫아버리면 정보 누설은 막을 수 있어. 강제적으로 날 깨울 수 있다면…… 그땐 정말 날 부숴야 하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실행하면 돼.”

마수 뼈를 소재로 한 차단제가 격벽 사이를 가득 채운 공간.

유단은 모노클을 끼고 주변을 살폈다. 마나 포집을 위한 배터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줌의 외부 마나도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연결망의 매개는 역시 마나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건가?”

-확실해. 줄은 인류가 인지하지 못한 매개체를 찾아내 그걸 이용한 거야. 역시, 위대한 마법 공학자야.

“신호 패턴은 남겨뒀지?”

-물론이지. 하지만 연결망에 접속했을 때처럼 있음과 없음의 단락 패턴이 아닌,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어.

“이미지?”

기계 팔이 움직였다. 체시는 종이 위에 긴 선 하나를 그었다.

-주황빛 선.

“이게 연결망의 매개체인가?”

-맞을 거야. 그리고 사라진 마운 역시 이것을 이용해 이동했겠지.

“연결망을 복구한 건 역시…….”

-마운일 가능성이 가장 커. 만약 수백 년 전에 마운을 발견한 어떤 종이 있고, 그 종이 줄의 연구를 이어받았다면 성과를 냈을지도 몰라.

“그렇겠지. 꼭 인간종일 이유는 없겠지.”

-난 칼랑족이 유력하다고 봐. 그 늑대들은 마법 공학이라면 눈을 뒤집고 파헤치니까. 영리하기도 하고.

마운은 체시를 알아챘을까?

체시가 정보 누설은 없다고 확언했지만, 신호를 받았다는 거 자체가 존재를 들킨 것이다.

“만약 마운이라면 목적이 뭘까?”

-글쎄. 그 애의 속마음은 나도 잘 모르겠어. 자기를 감추는 데 특화된 녀석이었잖아. 겁이 많아서 그랬던 거지만.

의도를 알 수 없는 상대.

곤란했다. 강대한 적보다 알 수 없는 적이 까다로운 법이었다.

“만약 단순한 신호 발산이 아닌 접촉을 시도해 온다면…….”

-네가 주변에 있다면 접촉해 보고, 아니면 셧다운 할게. 이거면 되겠지?

유단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가볼게.”

-고생이 많아.

문을 닫고 나왔다. 짧은 복도를 걸어 바로 옆 실험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가시화 패드를 든 연구원이 눈웃음으로 맞이해 주었다.

“실험체 상태는 어떤가요?”

유단은 나란히 누워 있는 인간들을 바라봤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손목에는 스크롤을 감고 있다.

몇몇은 발작하듯 꿈틀대고 있고, 몇몇은 죽은 것처럼 호흡도 안 했다.

“4호, 8호, 13호에서 단편적인 기억 회복을 확인했습니다만,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2호, 3호가 기능이 정지했습니다.”

기능 정지.

이곳에서는 사망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따로 지시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하나 같이 ‘기능 정지’라고 표현했다.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실험대 위에 누워 있는 생물을 인간이라 여기지 않는 듯했다.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관으로 본다면 이곳에 붙들려 온 실험체들은 하나같이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유단이 봤을 때 연구원이나, 자기 부모를 죽였다는 4호나 똑같아 보였다.

아니지. 쓸모와 무쓸모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군.

“계속 수고해 주세요. 특이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기타 필요한 것 역시 보고하면 구비해 두겠습니다.”

“학회장님께서 완벽하게 지원해 주신 덕에 부족한 건 없습니다.”

유단은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선임 연구원은 언제나 한마디씩 덧붙였다. 환심을 사기 위한 적당한 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유단은 들을 때마다 무참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가능했다면 입을 꿰맸을 것이다.

내버려 두는 이유는 유능했기 때문이다.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해주신 점, 항상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바꿀 겁니다.”

연구원들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광기가 어려 있었다. 역시 다시 봐도 실험체와 연구원들은 다를 게 없었다.

저들에게 칼을 쥐여 주면 언제든 실험체로 변할 것이다. 펜을 쥐여 줬기에 이곳에서 연구하고 있을 뿐이고.

인간의 광기는 오묘했다.

방향성을 잡아주기만 하면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를 낸다. 가끔 조정할 수 없게 돼 골치를 썩이지만, 그땐 가지치기를 해버리면 된다.

인간의 장점은 그 수가 많다는 거니까.

실험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중으로 설계된 강화실 안.

유단은 지면에 2m 정도 떨어져 고정된 빛무리를 바라봤다.

“성과가 보이고 있어.”

본래는 ‘유단’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강탈해 자신의 것이 된 심상 세계를 열었다.

체내로 받아들인 마나가 의지에 깃들며 마법 매개체인 반지로 흘러들었다.

개별적인 마법.

유단의 몸을 얻고, 거기에 로키의 의식이 부여되며 손에 넣게 된 오리지널리티.

유단은 붙들어 둔 빛무리, 한시적 영혼 세계에 손을 댔다.

이름 모를 남자의 기억이 밀려들었다. 이마가 멋대로 씰룩거렸다. 머릿속을 헤집는 기억이 통증으로 변해갈 때쯤 손을 뗐다.

“유도식을 조금 더 손봐야 하나.”

고개를 터는 것으로 이름 모를 남자의 기억을 날려 보냈다.

실험체에 이 기억이 온전히 이식되는 날, 유단은 마지막 단계를 향해 발을 내디딜 것이다.

거의 다 왔다.

인체의 유사성이 기억 안착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까지 확인했다.

얼마 전 본 밀레나는 줄리어스의 복사품 같았다. 감격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곧 만날 수 있다.

그녀를.

어머니를.

“머지않았어요, 어머니.”

유단은 레테를 가동했다. 탄드라가 제작한 마나 유도 장치는 무척이나 쓸모가 있었다.

탄드라를 살려둔 게 보람차게 느껴질 정도로.

강화벽 안쪽으로 주입된 마나로 한시적 영혼 세계를 재구성했다. 이름 모를 남자의 기억은 몇 주간 더 현실 세계에 고정될 것이다.

유단은 일렁이는 빛무리를 잠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 * *

다니엘은 가업을 이어받아 제빵사가 되고 싶었다.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없는 행복이라고 느꼈다.

“빌어먹을.”

다니엘은 체임버 덮개를 연 후 거병의 왼쪽 손목을 바라봤다. 마수의 살덩이가 외장갑 사이에 껴서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려서 집게로 손목 사이를 쑤셨다.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싼 거병은 모듈 사이의 이음새가 촘촘해 개미 한 마리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 자신이 모는 거병은 개미는 물론이고 잘하면 고양이 가족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다니엘! 어지간하면 바꾸라니까 그러네.”

동료 사냥꾼인 루이스터가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루이스터의 거병은 아주 매끈했다. 쿤타스의 새로운 라인이라고 하는데, 척 봐도 비싸 보인다.

“바꿔주든가!”

다니엘은 인상을 쓰며 집게에 걸려 나온 살덩이를 털어냈다. 고약한 냄새가 난다. 정비할 때 안쪽에 끼어 있을 썩은 살점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이가 갈린다.

“돈 모아서 가게 차리기 전에 네가 먼저 죽겠어.”

“아직은 쓸 만해.”

“아무리 봐도 밀가루 반죽하는 거보다 마수를 반죽하는 거에 재능이 있는데. 그냥 이쪽에 말뚝 박는 게 어때?”

“끔찍한 소리 마. 어쩔 수 없이 거병에 타긴 했지만, 청산하고 나면 가업을 이어갈 거야. 난 빵이 좋거든.”

“사내놈이 빵은 무슨.”

“예전 왕실에 있는 제빵사는 전부 남자였어. 몰랐지?”

“언제적 왕실이야. 연합 왕국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시끄럽고, 일 끝났으면 이거나 도와줘. 더럽게 안 빠지네.”

루이스터가 장비를 들고 거병에서 내렸다. 도움을 받아 손목 외장갑을 살짝 들어 올린 후 깊숙이 속에 낀 살점을 빼냈다.

“다니엘, 오버홀 언제 했지?”

“넉 달 전.”

“슬슬 할 때 된 거네?”

“해야지. 돈이 들지만 그래도 타다가 죽을 수는 없으니까.”

“정비소 어디야?”

“펜 씨네. 거기가 그나마 양심적이잖아. 군하고도 접점이 있어서 실력도 괜찮고.”

“이번에 업체 한번 바꿔봐.”

“갑자기?”

“얀스 쪽에 기가 막힌 놈이 하나 들어왔어. 돌아온 자인데, 처음 만진 거병도 마치 최초 설계자처럼 완벽하게 파악하고 정비해 줘.”

“처음 듣는 얘긴데?”

“당연히 처음 듣겠지. 내가 첫 고객이었거든. 비용도 아주 싸게 받더라고.”

다니엘은 동료의 거병을 올려다봤다.

“그냥 좋은 거병이라서 정비 실력과 무관하게 좋게 느껴지는 거 아니야?”

“아니야. 밸런싱까지 해줬는데, 받고 나니까 느낌부터가 달라. 내가 거병 관련해서 허튼소리 하는 거 봤어?”

“없지.”

다른 건 몰라도 거병에 관해서는 깐깐한 친구였다.

“속는 셈 치고, 아니, 이건 속는 게 아니야. 정식으로 고용한 정비사가 아니라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얼른 가서 받아. 그게 이득이야.”

“그 정도야?”

“그렇다니까.”

이득이라는데 주저할 이유가 있나.

사냥을 끝마치고 마을로 돌아갔다. 외곽에 밀집된 정비소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얀스네는 정비 안 받기로 유명했잖아. 자기네들 기기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고.”

“속사정이야 난 잘 모르지.”

정비소 앞에 도착했다. 오래된 트레일러 옆에서 무언가 작성 중인 남자가 보였다.

작업복 바지 아래로 의족이 보인다. 못 보던 타입이다.

남자가 작업모를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다니엘은 남자 얼굴에 난 옅은 화상 자국을 보며 말했다.

“오버홀을 부탁하려고 왔는데, 예약을 잡아야 하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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