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밀레나는 부대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죠. 산책 다녀오듯이 미개척지 안쪽을 헤집고 돌아오셨으니까요.”
구치가 랜더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이라도 흔들어주는 게 어때?”
이런 농담이 익숙하다는 듯이 랜더는 옅게 웃을 뿐이었다. 구치가 밀레나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보니까 철수 준비하는 거 같은데. 우리도 얹혀갈 수 있을까? 이 친구랑 너무 오래 붙어 있었더니 다른 사람이 그립네.”
“그럼요. 저야 영광이죠.”
“책임자의 허락도 받았겠다, 돌아가는 길은 느긋하게 가자고.”
랜더가 말을 받았다.
“항상 느긋하게 걷지 않았나요?”
“자네 기준에서야 느긋한 거지. 난 힘들어.”
구치가 어깨에 멘 활을 풀며 팔을 주물렀다.
“말 나온 김에 저 친구들한테 인사나 좀 하고 오지? 저렇게 열성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무시할 수는 없잖아. 게다가 같이 이동해야 하고.”
“가서 뭐라고 해야 할까요?”
“뭐라고 하긴. 예전이었다면 너희들은 다 내 밑에 있었을 테니까 알아서 모시라고 해야지.”
“정말 그렇게 말할까요?”
“이 친구 봐라.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줘. 아무튼 다들 궁금해하는 거 같으니까 뭐하던 사람인지나 말해주고 와. 좋아할 테니.”
“옛 이름 대는 거 좀 쑥스럽네요.”
“그러면 자기소개 없이 일단 패든가. 다들 자네랑 한번 겨뤄보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대련이라.”
랜더가 검집에 꽂힌 검을 보며 낮게 말했다.
“밀레나 양, 괜찮겠어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요!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거든요.”
랜더가 몸을 돌려 부대원들에게 다가갔다. 밀레나는 구치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고마워요, 아저씨.”
“저 친구도 은근히 남 봐주는 거 좋아해. 그보다 저 기체,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예리해진 느낌이야. 거병도 쓰는 사람에 따라 뭐가 많이 바뀌긴 하나 봐?”
“아저씨 말대로 취향에 맞게 조금씩 바꿔 나가니까요. 생산 라인에서 막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많이 달라졌죠.”
“루인이라고 했지?”
“네.”
그때였다.
저 멀리, 바닥을 나뒹구는 케스가 보였다. 시작된 모양이다.
“저기.”
“너도 가봐. 누구보다 네가 배우고 싶을 테니까.”
구치가 모닥불 근처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라틀이 술잔을 들며 다가섰다.
구치 아저씨와 라틀, 두 사람 다 친화력이 대단하니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저도 낄게요!”
밀레나는 검을 뽑아 들며 다가섰다. 옛 총수임을 밝혔는지, 부대원들의 눈빛에 경외심이 깃들어 있었다.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전신을 뒤흔들던 마나 파장을 경험했으니 의심 따윈 가당치도 않다.
“오래전에 저도 마수 전담팀을 이끌며 미개척지 주변을 정리하고 다녔죠.”
랜더가 검을 늘어트렸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닌 마수를 사냥하듯 합을 맞춰보세요. 그게 여러분한테 도움이 될 테니.”
몇몇이 정말 그래도 되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밀레나는 후, 짧게 숨을 토해내고 말했다.
“작정하고 덤벼도 옷깃 하나 못 건드릴 거야. 그러니까 뒤 생각하지 말고 덤벼.”
벽을 경험해 보는 것도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부대원들은 압도적인 무력감이 무엇인지,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대처 불가능한 마수와 마주했을 때 얼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총수님, 예의 따윈 잊고 가겠습니다.”
협회장이 아닌 옛 제국 기사의 총수.
부대원들이 산개해 랜더를 포위했다. 뒤를 생각지 말라는 소리에 부대원들도 사냥용 장비를 꺼내 들었다.
원거리 지원용 장비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물품들. 대형 마수의 신체를 구속하기 위한 마법 공학품이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케스가 뒤에 섰다.
“한 번 당해봤을 뿐인데, 깨달았습니다.”
“뭘?”
“저분을 어찌할 수 없다는걸.”
“잘 배웠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망설일 필요는 없어.”
“그래도 한 방 먹이면 술자리 안줏거리로 그만 한 게 없겠죠?”
“평생의 안줏거리지.”
부대원들 눈이 호승심으로 번들거렸다. 몇몇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부디 저 마음이 꺾이지 않은 채 기절할 수 있길.
“마지막까지 버티는 놈한테 내가 크게 한턱낸다!”
밀레나가 외쳤다.
“대장님과 외출도 가능합니까?”
케스가 말했다.
“아니, 그건 싫어. 그리고 애초에 불가능할 테니까 꿈 깨.”
“최선을 다해볼 겁니다.”
1분대가 움직였다. 케스가 최전방에 서서 랜더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털썩, 시간을 끌며 상대 정보를 끌어내야 할 케스가 제자리에 꼬꾸라졌다.
“기세는 좋네요.”
랜더가 검을 털며 말했다.
순간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살기를 느꼈다. 거대 마수를 눈앞에 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입술을 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가자.”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 * *
밀레나는 투레질하는 말을 달랜 후 헤더 트럭에서 떨어졌다. 트럭이 속도를 올리며 앞서 나갔다.
트레일러에 실린 거병들을 지켜보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에헤이, 이 사람들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잘 들어봐.”
구치 주변에 부대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구치 아저씨를 따르고 있었다.
“저게 구치 씨의 힘이죠.”
나란히 말을 몰고 있는 랜더가 말했다.
“힘이요?”
“경계심을 무너트리는 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저씨는 정치가를 했으면 아주 크게 됐을 거 같아요.”
“칼리고 씨가 진지하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구치 씨를 의회에 집어넣어 보겠다고. 제국이 망하지 않았다면 추진됐겠죠.”
눈웃음 짓는 랜더였는데, 농담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다들 많이 배웠을 거예요.”
“역할 분담이 확실한 팀은 위기 상황에 대처가 용이하죠. 그런 면에서 밀레나 양의 대원들은 훌륭했어요.”
“훌륭하지만 결국 협회장님을 잡진 못했죠. 건드리지조차 못했고.”
“잡혔어야 했나요?”
“아니요.”
작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협회장님.”
“네.”
“혹시 가하란이란 아이를 기억하시나요?”
“잊을 수가 없죠. 밀레나 양이 찾고 있는 사람인데. 저 역시 어릴 때 한 번 봤고.”
“시신 없는 사고. 협회장님께서는 틈새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그랬죠.”
“그렇게 8년이 지났고, 전 사실 포기했어요. 죽었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아니라는 얼굴이군요.”
“헛된 희망일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찾아보려고요.”
밀레나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냥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에게.”
“떠날 생각인가요?”
“국경을 넘으려고요.”
“도와드릴까요?”
도움이란 말에 고개가 홱 돌아갔다. 랜더의 잔잔한 눈동자가 보인다.
여기서 네, 라고 말하면 랜더는 움직여 줄 것이다. 대마수가 차단해 놓은 국경을 뚫고 단숨에 연합 도시로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편리하고 쉽게.
“아니요. 협회장님의 도움은 안 받을게요.”
“왜죠?”
“제가 이룩한 세계는 제 손으로 해결해야죠.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협회장님의 도움은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칼리고 씨가 무슨 얘기를 했나 보군요.”
“꼭 그것만은 아니에요.”
밀레나는 트레일러에 누워 있는 루인을 바라봤다. 그 안에 있는 카트시를 생각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거든요. 타인이 아닌 우리가.”
수많은 것들을 생략한 말이건만, 랜더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말해줘요. 필렌에게 잔소리 듣는 건 싫거든요.”
“더더욱 부탁할 수 없게 됐네요. 아, 국경을 넘어 연합 도시로 가게 된다면 어머니를 만나게 될 텐데, 뭔가 전할 말씀이 있으신가요?”
“아프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그거면 됐습니다.”
“정말 그거면 되나요?”
“네. 나머진 직접 만나서 얘기할 테니까요. 오랜 친구에게서 듣는 얘기는 넘길 수 없는 즐거움이죠.”
“……전 아직도 안 믿겨요. 어머니와 협회장님이 친우라는 게.”
“저도 가끔은 그렇습니다.”
랜더가 검집을 풀어냈다.
불편하신 건가, 잠깐 지켜볼 때였다. 랜더가 검집을 내밀었다.
“…….”
밀레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맡겨둘게요.”
“이, 이걸요?”
마에스트로 안두카프의 마지막 작품. 이전에 한 번 쥐어본 적이 있는, 협회장만이 다룰 수 있는 전용 검이었다.
“돌아오면 그때 돌려주세요.”
“아니, 이건…… 너무 부담스러운데요.”
“그러니 더더욱 살아서 돌려줘야겠죠?”
어서 받으라는 듯 손을 튕기는 랜더였다. 어쩔 수 없이 검집을 넘겨받았다.
손안에 차오르는 무게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실제로는 가벼운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계속 다루다 보면 그럭저럭 쓸 만해질 겁니다. 명공의 작품은 그런 녀석이니까요.”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역시나 불편했다. 무게 밸런스부터 검병의 모양까지. 모두 협회장을 위해 맞춰진 거니까.
이미 완성된 검인데, 계속 쓴다고 내 손에 맞게 변할까?
“진실을 좇는 건 때론 괴로울 수도 있어요.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멈춰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리고…… 제 경험에 의하면, 그 끝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밀레나는 랜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아니, 저 눈빛은 수없이 봐왔다. 엄마가 아빠 사진을 볼 때 짓는 얼굴이다.
“금방 돌려드릴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랜더가 웃으면서 정면을 바라봤다.
* * *
유단은 잠든 프레나를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물을 마시고 옷을 챙겨 입는데, 프레나가 방에서 나왔다.
“가게?”
“어.”
프레나가 다가와 가볍게 안았다.
“언제든 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프레나, 섭섭하지 않아?”
“전혀. 난 이해하고 있어. 오빠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는 것도 내 안전을 위해서라는 걸. 난 오빠만 곁에 있어 주면 그걸로 만족해.”
“고마워.”
입맞춤한 후 밖으로 나왔다.
다루기 쉬운 인간.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밀레나와의 접점을 위해 계속 곁에 두고 있지만, 곧 필요 없어지게 될 것이다.
오후의 나른한 공기를 마시며 걷고 있을 때였다. 검지에 낀 반지가 신호를 보냈다.
유단은 곧바로 개인 실험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체시는 어지간한 일로는 호출하지 않는다.
-그래, 넌 느끼지 못했구나. 인간의 몸이니 어쩔 수 없겠지.
의자에 앉으며 체시를 바라봤다.
-열렸어. 아주 잠깐이지만.
“뭐가?”
-연결망이. 아니, 연결망보다 상위 개념이었어. 모체라고 표현해야 할까?
“……연결망이 열렸다? 누가?”
-모르겠어. 하지만 길이 잠깐 열린 건 확실해. 그리고 가능성은 두 가지. 첫 번째 마운. 그리고.
“카트시.”
유단은 자신과 함께 줄의 실험실에서 사라진 카트시를 떠올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