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2화
“루인!”
-네.
“너도 듣고 있지? 카트시 목소리를.”
-네, 감각 장치를 통해 전달되고 있어요.
밀레나는 고정 클립을 떼어내고 카트시를 안아 들었다.
“왜 이렇게 오래 자!”
-기억 단절이 이뤄졌는데, 오래 잤나 보네요. 얼마나 잔 거죠?
“7년? 아니, 8년? 너무 길었어. 날짜를 제대로 셀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시간관념으로 따지면 정말 긴 시간 동안 자고 있었네요. 근데, 밀레나. 일어나자마자 부탁할 게 생겼는데.
“말해봐.”
-눈을 달아주세요. 안 보이니까 답답하네요. 다른 감각 장치는 저와 연결된 친구를 통해 공유 중인데 내부 시각 장치에는 보안이 설정돼 있네요. 강탈할 수도 있지만 이 친구가 싫어할 것 같으니.
밀레나는 곧바로 체임버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른 거병을 점검 중인 기술자를 붙잡아 기계 안구를 넘겨받았다.
“루인의 시각 장치에 이상이 생긴 건가요? 인지 통합 오류라면 지금 점검하는 게…….”
“괜찮아. 루인은 멀쩡해.”
체임버에 올라탔다. 커넥터 끝단을 붙잡고 기계 안구에 연결했다. 축 늘어졌던 커넥터가 금방 살아 있는 뱀처럼 흐느적거리며 움직였다.
-오, 선명도가 좋네요. 전달되는 정보량도 기존 것보다 8.7배 정도 늘어났고요. 기술이 꽤 발달했나 봐요.
“너 잠들어 있는 동안 많은 게 바뀌긴 했지.”
-아쉽네요. 변화를 지켜보는 게 제 취미 중 하나인데.
기계 안구가 밀레나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기억 단자에 있는 얼굴하고 확실히 다르네요. 이럴 때 성숙해졌다고 표현해야겠죠? 근데 음식은 고루 씹어야겠어요. 측두 하악의 불균형이…….
“일어나자마자 하는 소리가 잔소리야?”
-밀레나는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으니까요.
“내가? 아닐걸.”
밀레나는 검지를 튕겨 기계 안구를 툭 때렸다.
-근데 밀레나.
“응?”
-가하란은요?
“…….”
단절된 시간만큼 깊숙하게 밀려들었던 반가움이, 아주 빠른 속도로 발끝을 통해 빠져나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카트시는 특별한 기계라지만, 정말로 인간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개념적인 측면에서는 인간보다 월등한 이해력을 발휘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밀레나?
“가하란은 말이지…….”
-네. 가하란은요?
“아주 먼 곳으로 떠났어.”
-먼 곳이요? 당장 만날 수 없는 곳인가 보네요. 도시를 벗어났나요?
“아니. 도시보다 더 먼 곳이야.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보다 먼 곳.”
-그래서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저한테 해줄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못 만나.”
-네?
“죽었으니까.”
죽었다.
몇 번이고 되뇐 말. 꺼낼 때마다 아픈 말.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은데 얄궂게도 하게 되는 말.
밀레나는 손을 뻗어 카트시의 본체를 만졌다.
엔엔은 말했다. 카트시가 잠든 건 보안 책임자인 가하란의 부재 때문이라고.
가하란을 떠나보내고 몇 년간은 계속 기다렸다. 카트시가 눈을 뜨길, 눈을 뜨고 가하란이 살아 있다고 말해주길.
하지만 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실종자가 사망자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이해를 거쳐 체념에 이르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죽었다고요? 가하란이요?
“그래.”
-아닐걸요.
기계 안구가 바짝 다가왔다.
-제 보안 장치는 아주 특별해요. 제 껍질을 깨트릴 수 있는 건 줄과 가하란, 둘 뿐이죠. 제가 깨어났다는 건 둘 중 한 명이 신호를 보냈다는 뜻인데, 줄일 리 없으니 절 깨운 건 가하란이겠죠.
“카트시.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넌 완벽하게 격리된 상태였어. 그 어디에도 연결돼 있지 않았고.”
회로에 간섭하려면 ‘어딘가’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 마나를 매개 삼든, 툴을 매개 삼든 상호 교류가 이뤄지려면 연결이 중요했다.
카트시는 루인에 부착돼 있을 뿐 따로 신호를 받은 적이 없다.
“네가 깨어나서 정말 기뻐. 하지만 네가 일어난 건…… 아마 다른 사람 때문일 거야.”
협회장이 방출한 방대한 마나가 카트시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어떠한 기계적 오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트시를 깨운 건 가하란이 아니다.
눈앞에 없는 상대가 어떻게 유사 정령을 일깨우겠는가.
밀레나는 기계 안구를 바라봤다.
바스러진 희망을 주워 담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살아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질 나쁜 농담처럼 변해버렸다.
누군가가 다가와 가하란이 살아 있다고 속삭이면, 밀레나는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의심하고 이내 화를 낼 것이다.
그의 죽음을 이용하려 들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들었어요.
“들었다니?”
-꿈에서요. 꿈에서 가하란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하란은 날 부르고 있었어요.
밀레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기계와 꿈.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라고 생각했다. 카트시가 의식을 지닌, 감정을 이해한 기계라는 건 안다. 여타 유사 정령과도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꿈은 별개의 내용이었다.
기계는 꿈을 꿀 수 있는가?
멈춘 회로 상태에서 꿈을 꾼다면, 그건 기계가 아니라…….
-아무튼 걱정할 필요 없어요. 가하란은 살아 있어요. 살아서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대륙 어디에서도 가하란의 흔적을 찾지 못했어. 내 주변에 그 아이의 그림자는 없었어. 근데도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거야?”
-네. 제가 눈을 떴다는 게 그 증거예요.
“오류일 가능성은? 기계는 결함을 품고 있잖아.”
-그럴 리 없어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제가 인지하지 못한 어떤 영역에서 확신이 차오르고 있거든요. 밀레나 말대로 전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에요. 줄의 손에 탄생한 기계일 뿐이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닌 듯해요. 무언가가 있어요. 기억 단자 저 밑에, 저도 이제야 발견한 봉쇄된 기억 조각이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워요. 내가 모르는 날 발견한 기분이니까요. 의도적으로 가려진 인식의 저편. 아마 열쇠는 가하란이 쥐고 있을 거예요.
“……정말 믿는 거야? 가하란이 살아 있다고?”
그 질문에 카트시는 후후, 소리 죽여 웃었다.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믿음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사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죠.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난…….”
-밀레나는 어째서 그렇게 부정하죠?
“8년이란 시간이 내가 안고 있던 희망을 다 녹여 버렸으니까.”
-지친 건가요?
“그럴지도.”
-그래서 안 찾을 건가요?
“끝에 아무것도 없을까 봐 두려워.”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무너지고 추스르고 다시 무너지고. 8년간 수없이 반복한 끝에 평정이란 걸 되찾았다.
이번에 또 허물어진다면 밀레나란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두 다리로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남은 인생 따위야 별 상관없었다.
내뱉은 대로, 줄기차게 찾은 끝에 명백한 죽음을 재확인하게 될까 봐 싫은 것이다.
겨우 가슴에 묻었는데 그걸 헤집고, 확인조차 할 수 없는 허구의 시체를 또 끄집어내야 한다는 게 두려운 것이다.
메마른 한숨이 나왔다. 눈물 같은 건 맺히지도 않았다. 예전에 다 쏟아 냈으니까.
-밀레나.
차가운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기계 안구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전 감정을 이해하지만, 제 판단 근거는 감정이 아니에요. 현상을 기반으로 한 해석으로 정확한 값을 내죠. 가하란은 살아 있어요.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니 찾아요. 아쉽게도 전 손발이 없거든요. 그러니, 밀레나가 찾아줘요.
“넌…… 잔인한 기계야.”
-몰랐어요? 기계는 본래 그래요.
“나한테 또다시 희망을 주는 거야?”
-원했던 거잖아요.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하하하,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넌 정말 제멋대로야. 멋대로 잠들고, 멋대로 일어나서 이젠 나보고 망자를 찾아내래.”
-망자가 아니에요. 살아 있는 사람이지.
살아 있는 사람.
밀레나는 품 안쪽에 손을 넣었다. 색 바랜 스카프가 손에 들려 나왔다.
아예 못 쓰게 될까 차마 쓰진 못하고 계속 들고만 다니던 스카프.
뒷머리를 한껏 그러모아 스카프로 묶었다.
“수고비는 두둑하게 받을 거야.”
-저한테 받지 말고 가하란한테 받으세요.
“싫어. 너한테 받을 거야.”
모래 알갱이 같은 희망 한 톨.
기어이 다시 주워 담아 품어버렸다.
“근데 어디서 그 애를 찾아야 하지? 지난 몇 년간 안 찾아본 곳이 없어.”
-대륙을 전부 뒤졌다고 했죠?
“어.”
-그 대륙이란 것에 제국 너머 연합 왕국도 포함돼 있나요?
“아니. 거긴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가하란은 둔 서부에서 일어난 마수 폭발에 휘말려 사라졌다. 연합 도시 쪽은 살펴볼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어보죠.
“뭐?”
-이곳에는 없다고 밀레나가 말했잖아요. 전 밀레나의 집념을 믿어요. 없다면 없다는 거겠죠. 그러니 국경 너머로 가야 해요.
“……정말 대책 없구나.”
대마수를 피해 국경을 넘는다.
지독하게 위험하지만,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 녀석한테 부탁하면 방도를 마련해 주리라.
“국경을 넘으려면 시간이 필요해.”
-지금 당장 출발하자는 건 아니니까요. 저 나름대로 조사해야 할 것도 있고.
“조사?”
-제가 깨어났다는 건 신호를 받았다는 뜻이죠. 근데 밀레나 말대로 전 독립된 상태였어요. 이런 저에게 신호를 보낼 방법은…… 딱 하나 있죠.
“그게 뭔데?”
-연결망. 가하란이 연결망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살린 걸지도 몰라요. 게다가 중장거리 통신 체계를 확립한 상태겠죠. 그러니 곁에 없음에도 제가 일어난 거고요.
“연결망?”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해 줄게요. 지금은 마나를 통한 의식 전달 방식 정도로 이해해 주세요.
기계 안구가 체임버 밖을 바라봤다.
-근데 그 꼬질꼬질한 늑대는 어디 있죠?
“엔엔 님이라면 근래 보지 못했어. 정기적으로 연락이 오곤 하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어.”
-그 늑대도 찾아요. 도움을 받아야 하니까. 야만적이긴 하지만, 실력은 우수하니까요.
“……엔엔 님이 왜 너만 보면 혀를 찼는지 이해할 것 같다.”
-제 우수함을 시기 질투한 거죠!
밀레나가 소리 내어 웃을 때였다.
-대규모 마나 방출을 감지했어요.
루인이 말했다.
먼 곳에서 또다시 폭음이 들려왔다. 소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체임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부대원들도 다들 긴장한 채 숲을 보고 있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속삭였다.
“벌써 확인하고 오시는 길인가.”
숲의 어둠을 가르며, 랜더와 구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잠깐만.”
카트시에게 말한 후 랜더에게 다가갔다.
“다 확인하신 건가요?”
“낌새만 보고 왔는데, 별문제는 없는 것 같아 일단 돌아왔어요.”
“다행이네요.”
밀레나는 곁눈질로 부하들을 바라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구치가 부대원 쪽을 쓱 보며 말했다.
“저 친구들, 자네한테 관심이 많은 거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