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알베르트가 회색 날개를 접으며 우아하게 착지했다. 몸에 부착된 작은 가방이 좌우로 살짝 흔들리다가 멈췄다.
“괜찮아.”
밀레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술잔을 들고 있던 놈들이 손에 병기를 쥔 채 알베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수 아니야. 생긴 건 사납게 생겼지만…….”
대화 도중에 알베르트가 다가와 날렵한 부리로 손을 쪼려 했다. 밀레나는 손을 등 뒤로 감추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마수는 아니야. 그러니 그 칼 내려놓고 마시던 거나 마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케스가 물었다.
“어. 신경 쓰지 말고 놀아.”
부하들이 팔을 늘어트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알베르트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꽥꽥 울면서 날개를 퍼덕거렸다.
“너도 좀 얌전히 있어. 하여간 성격이 못돼 먹었어.”
꼬치를 하나 들고 와 알베르트 입 앞에 내밀었다. 부리로 고기를 쪼는 동안 회색 새의 몸통을 쓰다듬었다.
먹을 때는 꽤 얌전했다.
“총무님께서 보내신 건가.”
몸통에 달린 가방에 손을 뻗었다. 안에는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편지를 꺼내기 무섭게 알베르트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꼬치가 있는 모닥불 쪽으로 향했다.
“뭐, 뭐야!”
“야야!”
돼지고기 꼬치를 입에 한가득 문 알베르트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라틀이 곁으로 다가왔다.
“저거 대체 뭡니까?”
“전령. 말 더럽게 안 듣는 전령.”
“예?”
“그런 게 있어요.”
멀거니 하늘만 바라보는 부하들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 한 후, 나무에 기대 편지 봉투를 열었다.
-간만에 알베르트가 와서 편지 띄웁니다. 잘 지내고 있죠?
“네, 잘 지내고 있죠.”
어딘가에 있을 칼리고 총무를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딴 길로 안 새고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이걸 받을 때쯤에는 그쪽으로 손님이 갈 겁니다. 작전 마무리하고 철수 준비 중일 테지만, 잠깐만 시간 내서 그 양반들 안내해 줘요.
내용을 읽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총무는 작전을 어떻게 알고 있으며, 철수 준비 중이라는 것까지 어떻게 파악했을까.
먼 곳에서도 이쪽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니, 역시나 무서운 사람이다.
전달할 내용이 끝나자마자, 긴 사담이 시작됐다. 알아봤자 하등 쓸모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이 편지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쯤 읽다가 편지지를 접었다.
나중에, 정말 심심해 죽기 직전에 꺼내 볼 것이다.
“그나저나 손님?”
소든 남쪽 숲. 웨틱 도시 남부에 위치한 곳으로, 대륙의 최남단이자 좁디좁은 인간의 활동 영역이었다.
소든 숲 남쪽으로도 이름 없는 산맥이 이어지지만, 그 누구도 발을 들인 적이 없다.
태고의 미개척지.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 거대한 균열이 곳곳에 생겨 산맥 초입으로 가는 것도 어렵게 됐다.
이런 곳을 방문할 손님이 누가 있지?
“퍼밀리어입니까?”
“살아생전 그렇게 생긴 새는 처음 봅니다.”
모닥불 근처로 돌아오니 부하들이 한마디씩 꺼냈다. 밀레나는 대강 둘러댄 후 박수를 두 번 쳐서 시선을 모았다.
“오후 1시에 철수할 거니까 그때까지 준비 끝내. 선발조는 코른, 헤이튼, 솔. 셋이 맡는다.”
“예.”
“헤더 트랙은 로브가 운전하고 거병은 트레일러에 실어서 운반해.”
“한 기 정도는 기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배터리 여유분이 어떻게 되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투엘 한 기를…….”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밀레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딱 잡아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가 오고 있었다.
뒤이어 라틀도 고개를 틀었다.
혼자 느낀 게 아니니 뭔가 있는 게 확실했다.
“마수일까요?”
라틀이 말하며 수신호를 보냈다. 부하들이 일제히 일어나 대열을 갖췄다.
“잠깐만.”
설마?
밀레나는 단검을 든 채 숲 쪽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은은한 빛이 보였다.
“……다들 괜찮아. 손님이야.”
긴장한 부하들에게 말한 후 정면을 바라봤다. 유등에 의지해 숲을 빠져나온 두 사람.
“그 친구 말대로 정말 밀레나가 있네.”
그 친구, 칼리고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밀레나는 반갑게 웃으며 구치 앞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그리고…….”
뒤쪽에 있는 협회장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랜만이네요, 밀레나 양.”
랜더가 말했다.
“두 분 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뭐 좀 확인하려고 왔어. 신경 쓰이는 얘기가 몇 개 있었거든.”
구치가 대답해 주었다.
“총무님께 연락은 받았어요.”
밀레나는 편지를 꺼내 보였다. 구치가 편지지를 보자마자 웃었다.
“알베르트가 고생했겠네. 근데 저 뒤에 있는 분들은…….”
“부대원들이에요.”
“한창 즐기는 중인 것 같은데, 우리가 방해했나 보네.”
부대원들은 경계심을 풀었으나 관찰의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하긴, 궁금할 것이다.
밤중에 소든 숲을, 그것도 단둘이 가로질러 왔으니까. 거병을 대동한 부대조차 야간 이동은 안 하는 게 소든 숲이었다.
“퍼질러 앉아서 술 한잔하고 싶지만, 먼저 확인해 봐야 할 게 있어서. 밀레나, 혹시 이상한 거 못 봤어? 아니면 느끼거나.”
“이상한 거요?”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네. 말 그대로 이상한 거니까. 어때? 감 잡히는 거 있어?”
협회장과 구치가 동시에 움직였다는 건 협회 쪽 업무라는 뜻이다.
“외계와 관련된 건가요?”
“아직은 몰라. 그걸 알아보려고 온 거고.”
“마수 퇴치 중 특이한 보고를 받은 적은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역시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나.”
“미개척지로 진입하시게요? 그쪽은 정말로 위험…….”
말을 내뱉으려다가 도로 삼켰다.
협회장의 곁에 있는데 무엇이 위험하겠는가. 오히려 그쪽에 사는 마수들이 위험할 것이다.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보고 안 한 특이 사항이 있는지. 마수 관련된 것만 보고하기에 누락된 것이 있을 수도 있어요.”
라틀에게 다가가 말했다. 임무 도중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뭔가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 전부 알아보라고.
부대원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몇몇 부하가 정찰 도중 본 것들을 말했다. 작은 불빛이 보였다, 유령 같은 게 느껴졌다, 오한이 들었다 등등.
정말 쓸데없는 것들이지만 혹시 몰라 취합한 후 구치에게 전했다.
“위험 지역에서 흔히들 겪는 현상이긴 한데.”
“스트레스 때문에 종종 이상한 걸 보니까요.”
“작은 불빛. 랜더, 일단 가보는 게 낫겠지?”
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요. 주술사의 예언이 때때로 엇나가긴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랜더가 웃으면서 옆을 지나쳤다.
쉬지 않고 바로 이동할 생각인 듯했다.
“바로 가시게요?”
“예. 끝내고 쉬는 게 아무래도 편하거든요.”
랜더가 모닥불 옆을 지나가며 부하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부하들 역시 눈을 껌뻑이며 인사했다.
표정에 ‘누구지?’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밀레나는 마실 것을 챙겨 구치 옆에 섰다.
“제가 도울 일 없을까요?”
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구치가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곳 책임자한테 일을 부탁할 수는 없지. 이쪽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협회 쪽 일에 도움이 못 되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각자 맡은 바 일을 다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나나 저 친구나 허탕 치는 게 대부분이야. 기분 좋은 허탕이지. 별문제 없다는 뜻이니까.”
구치가 맑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무뚝뚝한 인상과 달리 정이 많으신 분이다.
“얼굴 보니 좋네. 나중에 또 보자고.”
손을 흔들며 랜더 뒤를 쫓는 구치였다.
“상사님께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 처음 봅니다.”
라틀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보였어요?”
“네. 어린애처럼 말이죠.”
“나름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네요. 저분 앞에 서면 여전히 긴장돼요.”
“예? 상사님이 긴장을요? 뭐 채권자라도 됩니까?”
“어떤 면에서는 채권자기도 하죠. 저분 덕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살게 됐으니까. 그게 빚이라면 빚일 수도 있겠죠.”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네요. 뭐, 그렇다 치고 저분들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요? 설마 숲을 넘으려는 건 아니겠죠?”
“산맥으로 가실 거예요.”
“예? 자살하러 갑니까?”
“아니요.”
“그럼 뜯어말려야죠. 애꿎은 사람 죽기 전에.”
밀레나는 숲으로 들어서는 랜더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다. 죽음이란 단어가 저 사람에게도 통할까?
“저분들은 괜찮아요. 오히려…….”
밀레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강대한 마나 파장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신체술로 몸을 다잡지 않았다면 휘청거렸을 것이다.
부하 중 몇몇은 속에 든 걸 게워내고 있었다. 라틀도 머리를 감싸 쥐며 남쪽 숲을 바라봤다.
뒤이어.
쿠웅, 둔중한 폭음이 들려왔다.
그것도 연이어서.
어둠이 내리깔린 숲이 빛으로 밝아졌다. 점멸하는 빛은 서서히 산맥을 향해 갔다.
폭음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설마 아까 두 사람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죠? 저분이 위험할 정도면, 걱정해 봤자 소용없어요. 세상이 끝날 테니까.”
라틀이 반쯤 풀린 눈으로 멀어지는 빛무리를 바라봤다.
“인간 맞습니까? 이런 마나 파장, 처음 겪어봅니다.”
“맞아요. 아니, 맞을 거예요. 아마도.”
밀레나는 얼이 빠져 있는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자리 정리하고 정비반은 따라와. 혹시 모르니까 헤더 트럭이랑 거병 확인해 보게.”
기동 중이 아니니 이상은 없겠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정비반과 각 거병의 기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밀레나도 전용기인 루인에게 다가갔다. 시동키를 두르고 체임버를 열었다.
“루인.”
-네.
“상태 어때?”
-고밀도 마나 활동이 감지됐으나 회로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운동 기능 짧게 점검해 줘. 혹시 모르니까.”
-알겠어요.
트레일러에서 내린 루인이 각 관절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회로 신호 체계에 문제가 생기면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니, 직접 움직이며 물리적인 점검을 해야 했다.
밀레나는 활짝 열어둔 체임버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협회장이 나서면 대마수도 금세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계 내부의 문제이기에 협회장은 나서지 않는다.
한때는 의문을 품었다.
힘을 갖고 있으니 올바르게 사용하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칼리고가 이렇게 되물었다.
‘세계가 온전히 개인의 역량으로 유지되는 거라면, 그 세계가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대마수 다음에는 랜더 씨한테 또 뭘 부탁할 거죠? 연합 도시를 지워달라고 할까요?’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많은 문제를 랜더에게 떠맡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표리 영역 건은 조합이 힘써 주고 있고.
외적인 문제에 이어 내적인 문제조차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 해결치 못한다면…….
-뭐죠? 뭐죠?
상념을 깨는 소리에 밀레나는 고개를 틀었다. 루인이 낸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체임버 왼쪽에 부착된 카트시를 바라봤다. 수년간 잠들어 있는, 한 번 깨어난 적이 있지만 그 뒤로 침묵했던 친구가…….
“카트시?”
환청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불러봤다.
그리고.
-밀레나? 여긴 어디죠? 기억이 모호한데.
“카트시!”
밀레나는 두 손을 뻗어 유사 정령을 붙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