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근데 계속 상사로 남을 겁니까?”
라틀 중사가 꼬치를 흔들며 말했다. 먹다 남은 고기 조각이 꼬치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라틀이 허탈하게 고기를 바라보다가 발로 쓱 차버렸다.
“위로 올라가도 쓸모없다는 걸 알잖아요. 계급장 달아줬다는 명분으로 우리한테 간섭할 수도 있고.”
“에이, 누가 상사님을 건드립니까. 역전 노장인데. 아, 노장은 아닌가요?”
“취했으면 곱게 꼬치나 뜯어요. 아까운 거 자꾸 흘리지 말고.”
밀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대원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술을 즐기던 부하들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평소에는 안 하다가 술 마시면 군기가 서더라.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게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낄낄 웃으며 다시 편하게 자세를 고치는 부하들이었다. 밀레나는 술병을 들고 한 잔씩 따라주었다.
“케스, 다친 건 어때?”
“길게 두 달 정도 요양 가면 싹 다 나을 거 같습니다.”
“전방에서 빼서 뒤로 보내줄까?”
“농담인 거 알면서 그렇게 받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전 여기가 좋습니다. 돈도 잘 나오고 지원도 좋고. 무엇보다 얼치기들이 없잖아요.”
케스가 씩 웃자 옆에 있던 부르델이 고개를 주억였다.
“화스텐에서 온 13소대 보셨죠? 게네들 전투 시작하자마자 진형 못 지키고 자기들끼리 칼질하는 거. 앞뒤 분간 못 하는 놈들이 마수보다 더 무섭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긴 좋죠. 성깔들이 다들 더럽지만, 그 더러운 성깔만큼 제 몫을 해주니까요.”
실력 없는 인격자보다 실력 좋은 개차반이 뒤에 있는 게 낫긴 해, 누군가가 작게 말했다.
“대장님.”
케스가 눈을 씰룩였다.
“왜?”
“저희 이제 어디로 갑니까? 이쪽은 대충 정리된 거 같은데.”
“그러게. 지원 요청도 없고 당분간은 휴식이려나?”
“대마수 쪽에서는 뭐 얘기 없답니까?”
“그쪽으로 발령 내줘?”
“저야 대장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죠.”
케스의 말에 주변 부하들이 시원스레 웃었다.
“대장님은 결혼 생각 없습니까?”
“생각 있으시면 여기 케스 데려가시죠. 사람 하나 구해준다는 느낌으로.”
밀레나는 옅게 미소 지으며 부하들 곁에 앉았다.
“너희들은 내가 여자로 보여?”
“저희야 안 보이죠. 누가 대장님을 여자로 봅니까. 근데 케스 이 녀석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케스 옆에 앉은 부하가 케스의 등을 거세게 쳤다. 취하긴 취한 모양이다, 이런 말도 꺼내는 걸 보면.
지긋지긋한 소든 남쪽 숲을 떠나는 날이니 이해는 된다.
“결혼이라. 하긴 해야겠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네요.”
“좋잖아? 가정을 꾸리는 거. 내가 받은 사랑을, 배움을 물려주고 싶은 욕구는 다들 갖고 있지 않아?”
그 말에 대부분의 부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은 되레 지옥일 수 있다고 혀를 내찼지만.
“말이 나온 김에, 만나시는 분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던데요. 대장님은 쉬는 날에도 훈련하고 있고, 훈련을 안 하는 날에는 항상 어울리는 그분들하고 계시고.”
항상 어울리는 그분들.
아마 샬롯과 제니를 말하는 것이리라.
저만치 떨어져 있던 라틀이 곁에 다가와 앉았다.
“이런 얘기에 흥미 있어요?”
밀레나가 물었다.
“원래 아저씨들이 사랑 얘기 더 좋아합니다. 모르셨나 보네요.”
낄낄 웃던 라틀이 진득하게 바라봤다.
“그래서 진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겁니까? 있으면 저 자식 단념하게 말씀해 주시죠. 나이도 찬 놈이 상사병 걸리는 거, 전 못 봅니다. 애잔해서.”
부하들이 케스를 바라보며 풋, 웃었다. 케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매력적인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수컷의 본능 아닙니까? 전 잘 보이고 싶습니다.”
케스가 말했다.
“케스 정도면 나쁘지 않지.”
밀레나는 케스를 흘겨봤다. 장난기가 반쯤 섞여 있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정말입니까?”
“내가 직접 가르쳐보고 굴려보고 뽑은 사람들이야. 성격들이 조금 모나긴 했어도 모자란 인간은 없어. 케스 너도 멋지고 좋은 남자고.”
케스 양옆에 앉은 부하들이 어깨로 케스를 툭툭 쳤다.
“그렇다면…….”
케스가 말을 잇기 전에 밀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뭡니까? 뭐든 물어만 보세요. 저 대답할 준비 끝났습니다.”
“흔히 말하잖아. 목숨을 건다고.”
“예?”
어리둥절해하는 케스를 향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잘 벼려낸 날 위로 모닥불의 주홍 불빛이 미끄러졌다.
“날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저는 언제든 준비돼 있습니다!”
당차게 말하는 케스였다. 케스 양옆에 앉은 부하들이 소리 죽여 웃었다.
“그래? 정말 그게 가능해?”
“대장님을 위해서라면!”
“그렇단 말이지.”
밀레나는 슬쩍 일어났다. 단검으로 케스의 목을 겨누고 그대로 한 걸음씩 뗐다.
젖은 땅에서 발이 떨어질 때마다 케스의 웃음은 짙어졌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이내 단검이 목젖 코앞에 온 순간, 케스는 웃지 못했다.
“대, 대장님?”
“정말 목숨을 걸 수 있어?”
단검이 살갗에 닿는 순간 케스가 상체를 뒤로 뺐다. 동시에 케스 역시 단검을 뽑아 들었다.
훈련된 전사답게 검 끝에 담긴 진의를 파악한 것이다.
“대장님.”
케스가 긴장된 목소리를 꺼냈다.
그때였다. 다른 부하들이 크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케스를 가리켰다.
“저 새끼 바짝 쫀 거 봐라.”
“야야, 누가 보면 진짜 찌르는 줄 알겠다. 적당히 버텼으면 점수 좀 땄을 텐데.”
“나 같았으면 목을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검 치워. 잔뜩 쫄아서 칼 뽑아 든 거 봐라.”
동료들의 조롱에 케스도 얼빠진 웃음을 그려냈다.
밀레나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풋, 웃었다.
“뭐야. 목숨 걸 수 있다면서 바로 내빼네?”
“목숨도 쓸모 있는 순간에 걸어야죠. 개죽음은 싫습니다.”
“맞아. 개죽음은 안 돼. 너희들, 개죽음은 피해라. 죽고 나면 다 소용없어. 가족들도 너희 목숨값보단 살아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으니까.”
고기 탄다, 밀레나는 모닥불에 꽂혀 있는 꼬치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애꿎은 일에 목숨 걸지 마. 사는 게 최고야.”
“맞습니다! 사는 게 최고죠.”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밀레나는 마음껏 마시라고 말한 뒤 자리를 비켜줬다.
취기가 오른다. 뜨뜻해진 숨을 바람에 실려 보내며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진짜 찌르려고 하셨죠?”
라틀이 술잔을 들고 옆에 붙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애들은 몰라도 저는 알아봤습니다. 상사님 옆에서 몇 년을 버텨왔는데 그걸 모를까요.”
밀레나는 잔을 받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중에 스콜라식으로 훈련을 더 시키겠습니다. 살기를 잡아내는 능력들이 모자라요. 마수만 상대해서 그런지 예민한 감각이 부족하죠.”
라틀의 말에 밀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우리 애들,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마수 사냥 하는 데 부족함은 없습니다만, 나중을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지죠.”
“나중까지 생각해요?”
“생각해야죠. 마수 토벌이 언젠가 끝나고 나면, 저희는 결국 사람에게 칼을 써야 할 겁니다. 영토 전쟁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요.”
“달갑지 않은 미래네요.”
밀레나는 라틀이 가져온 구운 아몬드 쪽으로 손을 뻗었다. 라틀이 재빨리 아몬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라틀이 웃었다.
“제가 챙겨온 겁니다. 드시고 싶으시면 상사님이 직접 가져오십쇼.”
“상관 대하는 태도가 0점인 거 아시죠?”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놈 구해다가 옆에 두셔도 됩니다. 근데 저만 한 놈이 있을까요?”
“없죠. 없으니까 이런 구박을 받으면서 중사님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거고요.”
“구박까지야.”
라틀이 슬그머니 아몬드를 꺼냈다.
“이럴 줄 알았어. 저 놀리는 맛에 하루를 버티는 거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상사님을 보고 있으면, 제 귀여운 딸들이 생각나거든요.”
“결혼한 후부터 얼굴 한번 안 비춘다는 그 딸들이요?”
“잘살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죠. 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라틀이 아몬드를 으적으적 씹으며 물었다.
“근데 왜 그러신 겁니까? 장난치고는 진심인 것 같았는데.”
“글쎄요.”
“얘기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넘어가도 됩니다. 저희가 뭐 서로 속사정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저희가 뭐 그런 끈끈한 상하 관계도 아니고…….”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밀레나는 달과 멀찌감치 떠 있는 작은 별을 바라봤다.
흐릿하다. 몇 년 사이에 정말 얼굴이 흐릿해져 버렸다.
가하란.
너 어떻게 생겼었니?
“중사님은 남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나요?”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죠. 가족이라면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몸이 움직일 것 같기도 하고.”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니라면요?”
“그러면…… 못 움직이겠죠. 전 그 정도로 호인이 아니라서.”
“그렇겠죠? 그게 당연한 거겠죠? 목숨을 건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쉽게 입으로 내뱉지만, 실상 눈앞에 닥쳤을 때 몇이나 생명을 담보로 움직일 수 있겠어요?”
“욕 나올 정도로 어려운 일이겠죠.”
“근데 그걸 걔는 했어요. 망설이지도 않고. 전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어요.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었거든요. 근데 걔가 자기 멋대로, 절 살려내고 떠나 버렸어요.”
“…….”
라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요. 근데 이상하죠? 분명 떠나보내기로, 이제 인정하고 다 털어내기로 했는데 그게 안 돼요. 제가 이렇게나 뒤끝이 긴 여자인 줄 몰랐어요.”
“뭐, 누구나 잊지 못하는 게 있죠. 저도 그렇고, 저기 있는 애들도 그렇겠고.”
한 마디 툭 던지고 웃어주는 라틀이었다.
“남의 사연을 듣고도 그게 끝이에요?”
“구구절절 위로해 봤자 통하겠어요? 아니면 진짜 해드려요?”
“한 마디도 안 지네요.”
“전 지려고 상사님 밑에 있는 게 아니니까요.”
밀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쌓여 있는 마수 사체가 보인다.
“중사님은 왜 이 일을 계속하세요?”
“돈 많이 주니까요. 명성도 쌓을 수 있고. 말이 나온 김에 상사님은 왜 계속하십니까? 귀족이 사라졌다고 한들 상사님의 가문 정도면 어디서든 환영받을 텐데. 게다가 최전방에서 날뛰지 않아도 될 만큼 재력도 되실 테고.”
밀레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오랫동안 붙어 다녔는데 이런 얘기한 적이 없었네요.”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뭡니까? 왜 마수 사냥에 목숨 걸고 계세요?”
“싫거든요, 마수가.”
“마수 좋아하는 인간이 어디 있다고. 이유가 그것이에요?”
“네. 내 앞에서 그 애를 앗아간 것들. 전 남겨두고 싶지 않아요. 시답잖은 복수극이죠.”
“복수극도 좋죠. 뭐가 됐던 이유가 있으면 된 겁니다.”
라틀이 술병을 내밀었다. 밀레나는 손을 내저었다.
“취하면 다 잊힙니다.”
“그래서 안 취하려고요. 안 잊으려고.”
라틀이 일어서서 엉성한 군례를 올렸다.
“중사 라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애들 좀 챙겨줘요.”
“그럼요. 내 새끼들, 아니, 상사님 새끼들 잘 챙겨야죠.”
이놈들아!
시끄럽게 외치면서 부하들 사이에 자리를 잡는 라틀이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남은 아몬드를 씹었다. 둔으로 돌아가면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해야지. 욕조에 종일 빠져 있는 것도 괜찮겠고, 제니를 도와 서류 더미에서 나뒹구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소한 맛 뒤에 따라오는 견과류 특유의 쌉싸름함이 혀끝에 내려앉을 때였다.
밀레나는 눈을 좁혔다.
검은 하늘을 가르며 회색 새가 내려오고 있었다.
“알베르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