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이제는 안다.
농사는 오만한 인간이 하늘에 대항하는 무모한 작업임을.
“비 좀 와라.”
필렌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농사일은 직관적이나 결과물이 나오는 과정은 복잡했다. 복잡성을 가중하는 건 하늘의 지분이 크고.
“괜찮을 거요. 우기가 늦춰진다고 해도 이것들은 버텨낼 테니.”
“너무 늦으면 손쓸 수 없는 거 아닐까요?”
“그땐 땅이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놓으시게.”
노련한 농부의 조언을 듣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 건 왜일까.
모든 건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만반의 준비를 마쳐도 허사가 된다.
만남에도 때가 있고, 일에도 때가 있으며, 이별에도 때가 있다.
때가 어긋나면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몰려온다.
“넌 언제쯤이면 움직일래.”
필렌은 챙이 넓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동쪽을 바라봤다. 시야가 닿지 않는 그곳에, 대마수가 있다.
그것이 움직이는 때는 언제일까?
우리는 그때를 맞출 수 있을까?
“영감님, 피곤하면 들어가 쉬세요. 그러다 쓰러지시겠네.”
꾸벅꾸벅 조는 노년의 농부를 향해 말했다.
“이 정도로 쓰러질 거였으면 옛적에 묘지로 들어갔지요, 허허.”
“농 한번 살벌하게 하시네요.”
내리찍는 햇빛을 손날로 막아내며 먼 곳을 바라볼 때였다. 멀리서 뛰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시퍼런 멜빵바지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건 얀스 혼자니까.
옆에는 웬 남자가 붙어 있었다.
“비일하고 드디어 갈라서게? 잘 생각했다. 티격태격하는 것도 질릴 때지.”
“그 인간이 질리긴 하지만 떼어낼 만큼은 아니에요. 그보다, 소개할 사람이 있어요.”
“나한테?”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단련된 인간이었다. 오른쪽 다리가 의족인 것도 가까이서 본 뒤에야 알아차렸다.
전투에 특화된 인간은 특유의 냄새를 뿌리는데, 앞의 남자는 지독할 정도로 향이 강했다.
군인?
아니, 전문 사냥꾼이겠지. 용병일 수도 있고.
얼굴에 옅은 흉터가 보였는데 화상이 원인인 것 같았다. 말끔한 인상이 옅은 흉에 가려진다.
“제국에서 온 사람이에요.”
얀스가 말했다.
“제국? 최근에 넘어온 건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경칭이 필요한 상대였다면 얀스가 미리 언급했을 것이다. 뭐, 언급한다고 해서 말을 높일 생각은 없지만.
“네, 방금 넘어왔어요.”
왜 이 남자를 데려왔을까, 이유를 고민할 때였다.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무엇이 걸리는지 짚어낼 수 없다는 게 찜찜할 뿐이다.
뭐지?
남자를 뜯어봤다.
낯익은 얼굴은 아니었다.
아니, 잠깐만.
필렌은 얀스를 바라봤다.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아니. 하지만…….”
“우리 대장님, 눈썰미 하난 기가 막히니까 알아보시겠죠?”
남자가 옅게 웃었다.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 잘 지내고 있을지, 아니, 분명 잘 지내고 있을 딸과 비슷한 연령대.
이토록 젊은 친구를 알고 있을 리 없다. 분명 그러할 텐데, 이성이 아닌 감정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외치고 있었다.
너는 이 아이를 안다고.
전신을 훑고 다시금 남자의 눈을 바라봤을 때였다. 탁한 하늘색 눈동자.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올란트. 너, 설마!”
“아버지를 기억하고 계시네요.”
“……가하란.”
필렌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다가섰다. 육안은 청년을 훑고 있으나, 머리는 과거를 되짚고 있었다.
‘서쪽의 불청객’과 조우한 날, 가하란은 폭발에 휘말렸다. 어떤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딸을 살리고 소멸해 버렸다.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죽음이었다. 현장에서 봤기에 알 수 있었다.
딸이 가하란의 죽음을 부정하고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말했을 때 필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였다면 현실을 직시하라고 다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딸의 눈을 보는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딸에게는 희망이 필요해 보였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이해하고 납득할 때까지 버틸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처음으로 딸에게 거짓말을 했다.
살아 있을 거라고.
그 애는 분명 살아 있을 거라고.
“필렌 님?”
“……살아 있었구나.”
“예. 어찌어찌 살아서 돌아왔어요.”
“내가 틀린 거였어. 그래, 내가 틀린 거였구나. 틀려서…… 정말 다행이야.”
딸을 안듯 가하란을 안았다. 자그마했던 꼬마가 이렇게나 커버렸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네.”
떨어져서 다시금 얼굴을 확인했다. 인식하고 보니 옛날 얼굴이 조금 남아 있었다.
“훤칠해졌네.”
“그런가요?”
가하란은 머쓱하게 웃으며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필렌의 눈에 장갑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장갑이 덮지 못한 손목이 보였다.
“그 손은…….”
“조금 다쳤어요.”
“봐봐.”
괜찮아요, 라며 손을 뒤로 빼는 가하란이었다. 뒤로 숨긴 손을 앞으로 빼내 조심스럽게 장갑을 벗겨냈다.
얀스의 눈이 커졌다. 이건 확인 못 한 모양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니?”
“살기 위해 노력한 증거예요. 보기 흉하지만 아프지는 않아요.”
가하란은 도로 장갑을 꼈다.
얀스가 조용히 말했다. 가하란이 돌아온 자라고.
그 긴 시간을, 어긋난 틈을 전전하며 버텨낸 건가?
“다른 곳은?”
“멀쩡해요. 건강해서 탈일 정도로.”
여유로운 미소였다. 치기 어린 모습은 전혀 없었다.
필렌은 다시금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건 그 옛날 꼬마가 아니라,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 생환한 전사라는 걸.
“밥.”
“네?”
“밥 먹자. 그래, 밥부터 먹어야지. 영감님! 저 먼저 갈게요.”
길게 하품한 농부가 챙을 살짝 들어 올렸다.
“들어가시려고?”
“예. 귀한 손님이 왔어요.”
“밭보다 중요한 손님인가요?”
“그럼요. 비교할 수 없죠.”
그때였다. 툭 하고 물방울이 콧잔등을 때렸다. 필렌은 고개를 들었다.
구름 사이로 쨍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햇볕 중간중간에 빗물이 스며 있었다.
“여우비네요.”
가하란이 말했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기도 하지.”
필렌은 웃으면서 말했다.
* * *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 얀스가 움직이자 가하란도 따라 일어섰다.
“앉아 있어. 손님이 어딜 도우려고.”
얀스가 가하란의 어깨를 눌렀다.
가하란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필렌은 잔을 손에 쥐며 말했다. 식사하면서 가하란의 얘기를 들었다. 지난 8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꽤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전부 다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머나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시간을 되짚으며 여행해 온 가하란이었다.
그 긴 시간을 홀로 이겨냈구나.
“더 듣고 싶지만 이쪽 얘기도 궁금하겠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정확한 상황. 참 어려운 말이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지 않아? 아니면 내 착각인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가하란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말했다.
“밀레나 누나는 무사한가요?”
“최근 2년간은 소식을 접하지 못했지만, 확신할 수 있어.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바쁘게 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걸?”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그걸 설명하라면 동부의 정황부터 얘기해야겠네. 아, 여기서는 제국을 동부라 불러. 제국이라 칭하는 사람도 많지만, 공식적으로는 멸망해 버렸으니까.”
필렌은 떠나기 직전까지의 정세를 요약해서 설명했다.
냉기가 가득했던 주스가 미지근해질 때쯤 이야기가 끝났다.
“타리움과 오라클.”
가하란이 되뇌었다.
“동부는 타리움의 주도하에 움직이고 있어. 기간산업의 핵심 모델을 제작한 둔, 그 둔을 품은 타리움은 옛 황실에 필적할 정도의 권력을 쥐었지.”
“그 타리움의 수장이…….”
“딱히 수장이라 할 만한 사람은 없어. 하지만 타리움이 발족할 때 성명을 낸 다섯 도시의 시장이 대표 격이라 할 수 있지. 음, 좀 더 세세하게 말하자면 시장 둘과 학회장. 이렇게 셋이 타리움의 얼굴이야.”
필렌은 동부의 대표자들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아르드헨. 욕심 많은 옛 황제답게 기어이 그 자리까지 올라갔어. 아르드헨하고는 안면이 있지?”
협회 가입을 제안했다고 이전에 들었다. 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아리엘 시장. 이 친구도 아르드헨 못지않게 욕심이 많지. 아니, 어떤 면에서는 한술 더 떠. 티안가의 핏줄답게 밀어붙이는 능력이 대단해. 아, 티안이라고 하면 잘 모르겠구나. 중앙 군부에서 힘깨나 쓰던 가문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들은 적 있어요. 루드 팩토리에 사업을 제안했었거든요. 밀레나 누나, 그리고 율 누나하고도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고요.”
“연이 또 그렇게 닿아 있네. 나중에 보게 되면 내 이름을 팔아. 오래된 친구의 딸이니까 내 이름을 대면 너에게 도움을 줄 거야.”
“마음만 받아둘게요.”
필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잔을 쥐었다. 말을 계속했더니 목 안이 까끌까끌했다.
미지근해진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 * *
가하란은 너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왼쪽 옆구리에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끼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진짜 못 알아보겠네. 내 기억 속에 있는 꼬마하고는 전혀 달라.”
가하란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인상은 확실하게 남아 있었다.
“비일 형.”
“나 기억하는구나!”
“네. 잘생겼던 형으로 기억해요.”
“생겼던?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네?”
비일이 크게 웃었다. 어릴 때 봤던 유쾌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제야 돌아왔다는 게 체감된다.
“아빠! 놔! 놔아!”
옆구리에 있던 아이가 발버둥 쳤다. 바닥에 내려온 아이는 가하란을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구야?”
“나는 가하란. 넌?”
“알려주기 싫은데.”
배시시 웃으면서 비일 뒤로 숨는 아이였다.
“우리 딸. 이름은 딜라. 숫기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애지.”
비일이 딜라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손을 내밀었다.
“네 얘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주 들었어. 기분이 어때? 죽었다가 되살아났잖아.”
“무척이나 좋아요.”
“그래, 좋으면 된 거야. 지금이 가장 중요하니까.”
비일이 딜라를 다시 옆구리에 꼈다.
“얘기 중이었던 것 같은데, 마저 하세요. 전 얘 좀 씻기고 올 테니까.”
이따가 보자며 집을 나서는 비일이었다.
“정신없지? 쟤는 나이를 먹어도 저래.”
얀스가 옆에 앉으며 말했다.
“예전 생각나고 좋은데요?”
“근데 남편하고는 언제 알게 된 거야?”
“어릴 때요. 연구실에서 만났어요.”
덴스 교수의 연구실.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토마타를 앞에 두고 고심하던 덴스와 아버지, 거병에 대해 말해주던 비일, 그리고…….
“아, 마저 이야기해야지. 두 시장에 이어서 현 타리움을 대표하는 얼굴.”
필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걸물이 태어나는 법이지. 그 친구 덕분에 동부가 안정화될 수 있었으니까. 유단 학회장. 대마법사 마스터 아낙스에 이어 세상을 구할 두 번째 구세주라 불리는 친구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