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제국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보단 심하지 않겠죠. 저런 것들이 국경 너머에서도 난리 치고 있다고 생각하면…….”
진절머리 난다는 듯 고개를 세게 젓는 텐조였다.
“연합 왕국은 예전부터 도시화했었죠?”
“예, 뭐. 왕정 형태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가 도시제를 따랐죠.”
“그렇다면 이곳도 시의회가 있을 텐데, 왜 내버려 두는 거죠? 권력가가 뒤를 봐준다고 한들 대다수의 시민이 반발하면…….”
“여긴 좀 특수한 상황이거든요. 집결 수도에서 이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길드에 넘겼어요. 이 땅을 다스리는 건 왕정도, 시의회도 아니에요. 돈을 가진 자들이죠.”
돈을 가진 자들.
이익을 좇는 사람은 무엇이든 한다. 마수 포용자들을 방치하는 게 득이 된다는 건가?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네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니요. 정이 있고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어긋난 위상 속에서는 모든 게 명료했다.
생존.
그 하나에 집중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모든 게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외부인의 어쭙잖은 조언으로 해결된 사안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제국으로 넘어가기 힘든 상황인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텐조의 물음에 가하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작정 국경을 넘을 수도 없었다. 마수가 한두 마리라면 가볍게 사냥하고 넘어가겠지만, 국경을 틀어막고 있는 건 수천 마리의 마수 군집이었다.
“극소수는 국경을 넘었다고 했죠?”
“유능한 랍파의 도움을 받아 넘어오는 사람이 몇 있긴 합니다만, 추천할 방법은 아니에요. 대부분 죽으니까요.”
“이곳에 오래 있을 순 없어요. 돌아가서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요.”
“고향 분들이 그리우시겠죠.”
“예, 무척이나.”
흐릿해져 가는 얼굴들을 잊지 않기 위해 밤마다 되뇌었다. 되뇔 때마다 그리움이 몸을 뒤덮었으나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 번. 국경을 세 번이나 넘고도 무사히 귀환한 랍파가 마을에 머물고 있어요.”
“말씀하신 유능한 랍파군요.”
“예. 젊지만 뛰어난 랍파죠. 하지만 그를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아요. 많은 사람이 그에게 부탁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죠.”
“그래도 일단 만나 봐야겠어요. 지금 찾아가면 볼 수 있나요?”
“지금은 자리를 비웠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대마수 주변을 탐사하고 돌아오거든요.”
“언제쯤 돌아올까요?”
“사흘 후면 아마 돌아올 겁니다. 보통 보름 정도 나갔다 들어오니, 이번에도 비슷하겠죠.”
사흘.
수년을 다른 위상에서 버텨왔다. 고작 사흘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하란은 텐조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뭔가 묻고 싶은데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편하게 말하세요.”
“티가 났나요?”
“네.”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아까 가하란 씨가 한 말이 자꾸 떠올라서요.”
“제가 한 말이요?”
“틈에서 보낸 시간이 끔찍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말했죠.”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라면 저도 입을 닫고 있으려 했는데, 가하란 씨가 그렇게 말하니 호기심이 생겨서요.”
텐조가 숨을 살짝 머금은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하란 씨는 그곳에 얼마나 있었던 거죠?”
“신기 12년. 그게 그라운드 제로를 기점으로 새롭게 제창된 역법이라는 거죠?”
“네.”
“그라운드 제로부터 5년, 음…… 제가 틈에 갇힌 건 7년에서 8년 정도 되는 것 같네요. 7, 8년. 이렇게 숫자로 확인하니 뭔가 허탈하네요.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짧았던 것 같기도 하고…….”
위상에서 겪었던 일들이 강렬한 이미지로 변해 머릿속을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잘 버텼구나, 버티고 살아 돌아왔구나. 괜스레 미소가 나온다.
“돌아온 자들이 말하길, 위상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어요.”
“네. 기괴한 곳이었죠.”
가하란은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함축해 전했다. 발설할 수 없는 사건들은 도려냈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들과 이름 모를 옛 왕국, 거기에 반복되는 시간. 말로만 들으면 흥미롭지만 직접 경험하면 정말…….”
텐조가 뒷말을 삼켰다.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는 배려심이 느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생각하던 텐조가 시계를 바라봤다.
“차만 대접하고 정작 중요한 식사를 내오지 않았네요.”
“밥까지 얻어먹는 건…….”
“귀중한 경험을 편하게 들은 대가입니다. 그리고, 배고프지 않나요?”
“사실 허기져서 혼났어요.”
“이곳 음식은 익숙할 겁니다. 제국의 요리법이 대중화됐거든요.”
텐조가 주방으로 향할 때였다.
가하란은 창밖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 집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다급한 표정의 릴리가 문을 벌컥 열었다.
“이거! 이거!”
릴리가 푸란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하란 오빠,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뭘 어떻게 하다니?”
“뭘 어떻게 했길래 언니가 심각한 얼굴로 나한테 뭐라고 하냐구!”
릴리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가락이 향한 곳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보기 좋게 탄 얼굴과 청색 멜빵바지. 옷차림을 보자마자 어릴 때 만난 제철소 사람들이 기억났다.
그때 본 작업복과 비슷한데.
성큼성큼 다가온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텐조와도 안면이 있는지 거리낌이 없었다.
“그쪽인가요?”
여자가 물었다. 동시에 묶고 있던 머리를 풀었는데, 올린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건 얇은 드라이버였다.
가하란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걸 느끼며 여자를 바라봤다.
본 얼굴이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내려앉아 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한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으니까.
“저기요?”
여자가 다시금 물었다. 신중을 기하는 눈빛이다. 동시에 살짝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가하란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입가를 슬며시 훔쳤다. 반가움에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언니, 이 오빠야. 이 오빠가 푸란을 고쳐줬어. 근데 대체 무슨 일이야? 고친 게 아니야? 잘못된 거야?”
여자가 곁에 있는 릴리의 어깨를 다독였다.
“제대로 고친 거 맞아. 너무 제대로 고쳐서 좀 문제지만.”
여자가 다시금 가하란을 바라봤다.
“대충 들었어요. 돌아온 자라고. 마법 공학, 기계 쪽에 꽤 박식하신 거 같은데.”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모르지도 않죠.”
가하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상대는 날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눈치채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긴 실종은 곧 사망을 의미하니까.
죽은 사람을, 그것도 8년 전 어린 시절의 얼굴만 봤던 사람을 어떻게 떠올릴까.
게다가.
가하란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많이 변했을 것이다. 마수와 사투하며 세월을 보냈다. 둔에서 편히 있었을 때는 볼살이 차올랐는데, 지금은 살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거기에 손만큼은 아니지만 얼굴에도 옅은 화상 자국이 생겼을 것이다. 살점이 뭉개지진 않았으나 변색이 있을 테지.
현재의 모습에서 8년 전 어린 가하란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장난기가 고개를 쳐들었다. 안도감에서 비롯된 여유 덕분이리라.
“근데 무슨 일이시죠?”
모른 척하며 입을 열었다.
“푸란의 회로를 뜯어봤죠?”
“네.”
“신호 제어를 걸어놨는데, 그걸 푸셨더라고요.”
“제어해두신 거군요. 전 오류가 난 줄 알고 복구해둔 건데.”
“프로텍트를 걸어놨어요. 간단한 거지만 단기간에 풀 정도는 아니죠. 어떻게 보호 장치를 거둬내고 회로에 개입한 거죠?”
“보였어요.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네요.”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좋아요. 실력이 대단하신가 보네요. 아, 제 말투가 공격적으로 들렸다면 사과할게요. 살짝 화가 나긴 했지만, 그쪽에게 화난 건 아니에요.”
텐조가 컵을 가져와 여자에게 내밀었다.
“누님, 열 내지 말고 물부터 마셔요. 그리고 제 손님이니까 막 대하지 말고요.”
“알아. 막 대할 생각 없어. 좀 놀라서 그런 거야.”
여자가 푸란을 손에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시그니처를 보여주실 수 있나요? 가능하다면 배우고 싶지만, 학파의 규율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구경이라도 시켜주세요. 대가는 지불할게요.”
“열정적이시네요.”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니에요. 처음 뵌 분한테 개인적인 얘기까지 꺼낼 필요는 없겠죠. 그래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 꼭 보고 싶은데.”
“어려울 건 없죠.”
가하란은 검지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으로 시그니처를 불러왔다.
“감각기를 항상 끼고 다니시나 봐요?”
여자가 장갑을 보며 물었다. 아무런 기능도 없는 장갑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선명하네요. 깔끔하고. 게다가 직관적이고요.”
공중에 생긴 선을 이리저리 살피는 여자였다.
“시그니처는 개인마다 다른 형태라 본다고 한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일 텐데요.”
“네, 그렇죠. 하지만 보이는 형태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게 꽤 많아요.”
시그니처를 거둬들였다. 여자가 고개를 주억이며 다가왔다.
“푸란의 회로가 아무리 단순하다고 해도 선 몇 개로 치환될 정도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쪽은 서너 개의 줄로 모든 걸 표현했죠. 정보 집약과 인지, 해석 능력. 대단하네요.”
릴리가 끼어들었다.
“이 오빠 천재야?”
“글쎄. 일단 노력가인 건 확실해.”
여자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불쾌했을 텐데, 잘 받아줘서 고마워요. 전 얀스예요. 거병 정비를 맡고 있죠. 이것도 인연인데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쪽의 공학론을 듣고 싶은데.”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거든요.”
“이쪽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실 테죠.”
곁에 있던 텐조가 말했다.
“이분, 틈에 빠지기 전에는 제국에 있었대요. 누님도 제국에서 건너왔으니 제국 상황을 들려주면 되겠네요.”
“제국 쪽에 있으셨구나. 제국이 망한 지도 오래됐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는 제국이란 말을 자주 쓰죠.”
얀스가 손을 내밀었다. 가하란은 가볍게 손을 쥐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느 지역에 있었나요?”
“둔에 있었어요.”
“정말요? 저도 그쪽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어요.”
“알아요.”
“…….”
알아요, 그 한마디에 얀스의 눈이 얇아졌다. 악수한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계심이 높아져 간다.
간만에 발동한 장난기도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한다.
“필렌 님하고 같이 오신 건가요?”
“……누구죠? 나를 알고 있나요?”
“아주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같이 몇 번 밥도 먹었어요. 직접 개조한 거병에도 타봤고. 그 거병 이름이 베타였나요? 아마 맞을 거예요.”
얀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위아래로 재빨리 움직이다가 이내 시선이 마주쳤다.
“……너 설마.”
“많이 변했죠? 8년이 길긴 기네요. 얀스 씨, 얀스 누나. 호칭도 뭐라고 해야 할까요? 그때도 번갈아 가며 썼던 거 같은데.”
얀스의 광대 쪽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뒤로 반걸음 물러났던 몸이 단숨에 가까워졌다.
“너 정말…….”
그때, 뒤쪽에 있던 릴리가 말했다.
“왜 그래? 언니, 가하란 오빠하고 아는 사이야?”
얀스의 동공이 확장됐다. 손을 내밀며 가하란의 어깨를 눌렀다.
“왜 이렇게 컸니?”
“그러게요.”
“정말 너 맞아?”
“네, 맞아요.”
“죽은 줄 알았어.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다행이네요. 잊고 살았다면 덜 괴로웠을 테니까요.”
그 말과 동시에 얀스의 표정이 무너졌다. 가하란은 살짝 당황하며 이어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냥 좋아서, 그냥 기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이 단순한 문장 안에 담긴 행복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