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07화 (407/558)

제407화

“들어와요.”

텐조가 문을 열며 말했다. 가하란은 비스듬히 열린 문 앞에 서서 잠시 집을 바라봤다.

창의 모양이 둔과는 사뭇 달랐다. 개방형이 아니라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도 그렇고, 창문에 문양이 새겨진 것도 신기했다.

밖을 본다는 용도에 충실하려면 유리에 문양 같은 건 새기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제국에서 온 사람들은 다들 창문을 보고 어리둥절해하죠. 저렇게 빗금을 쳐 놓으면 안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아, 네.”

“안으로 들어와 봐요.”

텐조를 따라 집으로 들어섰다.

“어때요?”

텐조가 창문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작게 감탄했다. 밖에서 봤을 땐 어지러운 문양이 새겨져 있어 불투명하게 느껴졌던 창문이, 안쪽에서는 더없이 투명했다.

“어떤 원리죠?”

창문을 안팎에서 확인했다. 얇은 유리에 무슨 장치를 해놓은 걸까.

“솔직히 말하면 저도 잘 몰라요. 공예가의 솜씨니까요.”

“마법 같네요.”

“장인의 손길은 마법과 다를 바 없죠. 앉아요.”

가하란은 의자에 앉으며 슬쩍슬쩍 집안 구조와 가구를 살폈다. 방을 나누는 벽, 화로를 둔 주방, 침실과 손님맞이용 공간.

“집 안쪽은 비슷하죠?”

텐조가 잔을 내밀었다. 두 손으로 감싸 쥐어도 될 만한 크기의 잔. 유약 처리를 한 매끄러운 잔은 꽤 고가품처럼 보였다.

“잔이 크네요.”

“우린 이게 평균이에요. 뭘 마시든 머그잔에 따라 마시죠.”

“머그잔.”

“제국의 찻잔은 아담하죠?”

“예. 크기가 큰 것도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에요. 맥주잔은 이것보다 크긴 하지만.”

안에 담긴 음료를 바라봤다.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향을 맡아본 다음 바로 마셨다.

시큼한 맛이 먼저 반겨주고 뒤에 단맛이 혀를 어루만졌다. 떨떠름한 풋과일 맛이 마지막까지 입안에 남았다.

“맛있네요.”

“하하, 제국 사람들을 몇 번 만나봤는데 제가 준 차를 단숨에 마신 건 가하란 씨가 처음이에요. 다들 색깔이 이상하다며 눈치만 봤거든요.”

“요리를 배운 적이 있어요. 그분께서 색다른 건 일단 입에 넣어보라고 가르쳐 주셨죠.”

“박력이 넘치는 분이네요.”

양의 긴 울음소리가 창문을 통해 넘어왔다. 가하란은 냉차를 홀짝이며 창밖을 보았다.

의복 양식마저 비슷한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몇몇 특이한 점만 제외하면 제국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비슷하죠?”

텐조가 말했다.

“네. 이야기로만 들었을 땐 많이 다를 줄 알았어요.”

“여긴 국경 지대라 문화가 많이 섞였어요. 제국과 교류가 많다 보니 영향을 받게 됐죠.”

“그랬군요.”

“전쟁이 한창일 때는 마을의 배타성이 짙어져 제국의 제 자만 들려도 기겁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옛일이 됐죠. 그 길었던 전쟁조차 과거가 됐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고, 전쟁 같은 건 애들 장난처럼 보일 일도 일어났고.”

텐조의 말을 들으며 거리에 생겨난 균열을 바라봤다. 연합 왕국 역시 그라운드 제로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를 봤을 것이다.

“물론 저도 윗분들한테 들은 얘기지만요. 전쟁이야 우리가 코흘리개 때 끝나 버렸으니, 그 참혹함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저도 얘기로만 들어봤어요.”

가하란은 머그잔을 기울이다가 눈을 깜빡였다. 몇 모금 안 마신 것 같았는데, 텅 비어 있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너무 염치없이 받아먹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네요.”

“주변에서 흔히 나는 과일을 발효시킨 거라 마음껏 마셔도 돼요. 게다가 그 말괄량이를 잡아 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대접해야죠.”

말괄량이. 함께 집으로 온 릴리는 가볼 데가 있다며 푸란과 함께 사라졌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같았다.

“답답하실 텐데 장갑 벗으시죠. 날씨도 덥고.”

텐조가 가하란의 손을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지랖일 수도 있는데, 혹시 무슨 이유라도?”

“화상을 심하게 입어서요. 보기 흉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가하란은 멋쩍게 웃으면서 장갑을 벗었다. 쭈글쭈글하게 오그라든 피부가 드러났다. 제대로 살펴보는 건 가하란도 처음이었다.

“…….”

텐조가 입을 살며시 다무는 게 보였다.

“보기에는 이래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어요. 그나마 다행이죠.”

“틈에서 생긴 상처인가요?”

“네. 손은 이 모양이 됐지만 얻은 것도 많아요. 영광의 상처죠.”

하하, 하고 웃었지만 텐조는 웃지 않았다. 머쓱해져서 애꿎은 차만 들이켰다.

“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네요.”

“네?”

“가하란 씨는 운이 좋아서 별 고생 없이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먼저 사과하는 텐조였다. 올곧은 사람이구나.

“운이 좋은 건 맞아요. 좋았으니 이렇게 돌아왔죠.”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군요. 틈에서 겪은 일은 정말 끔찍했을 텐데.”

“끔찍하지만은 않았어요.”

텐조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무슨 말이냐는 듯이.

“다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분명 많았죠. 절망적일 때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마냥 끔찍했던 건 아니에요. 이런 말이 좀 웃기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거기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었어요.”

“사람 사는 곳이요?”

“네.”

가하란은 다른 위상에서 만난 이들을 떠올렸다. 인간종은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덕분에 많은 걸 깨달았다. 많은 걸 잃었음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건 그들 덕분이었다.

강철에 깃든 영혼들.

끽!

상의 안쪽에 매달려 있던 루루가 튀어나왔다. 천장 구석으로 가더니 벽에 밀착해 연신 소리를 냈다. 새로운 안식처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원숭이를 몇 번 보긴 했지만, 저렇게 작은 건 처음 보네요.”

“특이한 친구죠.”

“음식을 줘도 될까요?”

“그럼요. 아주 좋아할 거예요.”

텐조가 작은 과일 하나를 들어 올렸다. 루루가 잽싸게 내려와 과일을 쥐고 다시 천장 깊숙한 곳에 붙었다.

“영리하네요.”

“약은 친구죠.”

가하란은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손님 대접 받은 김에 몇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그럼요. 아는 선에서 대답해 드리죠.”

“우선 대마수. 그건 왜 생긴 거죠?”

대마수란 말에 텐조가 인상을 썼다.

“1년 반 정도 된 것 같네요. 전조도 없었어요. 어느 날 국경 쪽으로 마수들이 몰려들었죠.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주민들도 피난을 준비했고요.”

가하란은 산맥처럼 보이던 마수를 떠올렸다. 무엇이 그것들을 뭉치게 했을까.

“다행히 밀고 들어오지는 않았어요. 둥지를 지키는 어미 새처럼 국경 지대에 접근하는 자들만 공격할 뿐이었죠.”

“1년 넘게 계속 한 자리를 고수했다는 건가요?”

“네. 덕분에 제국과의 교류도 완전히 끊겼어요. 간혹 마수 떼를 피해서 넘어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극소수죠. 대규모 상단 같은 건 아예 꿈도 꿀 수 없는 상태고요.”

타격대가 꾸려져 공격을 감행한 적도 있다고 하지만, 마땅한 성과가 없기에 최근에는 관망만 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미친놈들 때문에…… 아, 미안해요. 손님 앞에서 격한 말을 했네요.”

“상관없어요. 그보다 미친놈들이라뇨?”

“반마법공학 결성회. 그리고 마수 포용자들. 그놈들이 난리 치는 통에 일이 복잡해졌어요. 세상이 어지러워지다 보니 그런 놈들이 득세하네요.”

“둔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긴 했죠. 하지만 공감을 얻지 못해 금방 사라졌었는데.”

텐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도 비슷했어요. 하지만 사건 몇 개가 그 정신 나간 놈들의 말에 힘을 실어줬죠. 소수지만 응집력이 대단해요. 기득권 중에서도 몇몇 세력에 가담해 있고요. 골치 아파요.”

“반마법공학은 그렇다 치고, 마수 포용자들은 공생을 주장 중인가요?”

“온건파라 하는 애들은 공생을 주장 중이고, 좀 더 나아간 미친놈들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이 마수라고 말하고 있어요.”

텐조가 혀를 찼다. 몇 달 전 있었던 일이라며 사건 하나를 말해줬는데, 꽤 충격적이었다.

“정말로 무장도 없이 단체로 대마수에 접근했다는 건가요?”

“네. 융화돼야 한다니 어쩌니. 어린애들까지 데리고 갔어요. 스무 명이 저 위험한 곳에 간 거죠.”

“근데…… 살아 돌아왔다?”

“예. 그때부터 문제가 심각해졌어요. 생환해 버렸으니까요. 아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대마수의 심장과 대화했다고, 그를 섬겨야 한다며 난리를 쳤는데……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지성이 있는 마수야 이미 경험해봤다.

하지만 대다수의 마수는 파괴적인 본능으로 인간을 살해, 혹은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다.

스무 명에 달하는 인간이 마수와 조우하고도 전원 생존해 왔다는 건, 마수의 공격성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대마수의 심장, 그게 원인이겠군요.”

“군집을 이룬 이유라고 하는데, 확실한 건 없어요. 미치광이들이 한 말을 믿을 순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주장도 있어요. ‘대마수에 접근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다.’”

“일종의 쇼라는 거군요?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한.”

그때였다. 확성기를 통해 증폭된 목소리가 거리에 퍼져나갔다.

-인간의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우린 진화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이겨냅시다, 진화의 사도를 영접합시다.

창밖을 보니 적색 깃발을 든 남자를 필두로 수십 명의 사람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양옆으로 갈라섰다.

“저놈들이에요.”

텐조가 말했다.

“치안대가 저지하지 않나요?”

“해산시키긴 할 겁니다. 하지만 또다시 모이겠죠. 저놈들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확성기를 든 남자가 다시 외쳤다.

-우린 다시 위대한 진화의 사도를 만나러 갈 것입니다. 영광된 순간을 경험하실 분들은 일주일 후 우리와 함께 성지로 떠납시다!

마수 포용자들이 방향을 바꿔 걸어 나갔다. 가하란은 그들의 얼굴을 살펴봤다.

성실한 신도처럼, 간증하는 신앙인처럼 무척이나 경건한 표정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고행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저들은 이 땅의 고통을 자신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죠.”

“진화의 사도, 마수를 통해서요?”

“예. 정말 정신 나간 놈들이죠.”

“일주일 뒤에 성지로 떠나겠다는 건…….”

“다시 대마수를 만나러 갈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관찰자가 붙겠죠. 쇼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판가름 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호기심과 작은 흥분을 담아 멀어져 가는 붉은 깃발을 바라봤다.

“기괴하네요.”

“무서운 건 저기에 동조하는 애들이 늘고 있다는 겁니다. 반마법공학 결성회도 은연중 저쪽에 힘을 싣고 있고요.”

깃발이 멀어져 갈 때였다.

좌판 앞에 서 있던 여자가 물동이를 들고나와 마수 포용자들에게 물을 뿌렸다.

“죽어! 이 악마 같은 놈들아. 마수 때문에 내 자식이 죽었어. 그 끔찍한 짐승들을 뭐? 진화의 사도?”

달려드는 여자를 정복 차림의 남자들이 막아섰다. 무장 상태가 일정한 걸 보면 정규군인 것 같았다.

시민을 지켜야 할 자들이 어째서…….

“말했죠? 뒤를 봐주는 놈들이 있다고. 이 마을도 점점 미쳐가고 있어요.”

여자가 통곡하며 땅에 주저앉자, 그제야 멀어지는 정규군이었다.

붉은 깃발이 사라졌다. 시민들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떠나 있는 동안 너무 많은 게 변했네요.”

입을 비집고 나온 말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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