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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06화 (406/558)

제406화

여덟 살 정도 되었을까.

시선이 마주치자 여자아이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았다.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그게 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사람이 뚝 떨어졌으니 놀랐을 것이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잠깐 고민할 때였다.

여자아이가 한 걸음 다가왔다. 표정이 자세히 보인다. 커다랗게 뜬 눈에 차오른 건 겁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거 맞죠?”

“그게…….”

“‘돌아온 자’ 맞죠? 그런 거죠?”

“돌아온 자?”

여자아이는 신기한 물건 구경하듯 가하란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처음 봤어요.”

“처음 봐?”

“네, 소문으로는 몇 번 들었거든요.”

눈앞에서 멈춰 선 아이가 걱정스레 되물었다.

“아픈 곳은 없어요? 돌아온 자들은 다들 아프다던데.”

“조금 다치긴 했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그보다…….”

가하란은 입을 닫고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미세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곧이어 수풀을 뚫고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얼굴로 날아든 그것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푸란!”

아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푸란?”

가하란은 손아귀에서 바둥거리는 기계를 바라봤다. 사족 보행 기계. 밋밋한 몸체와 2중 관절로 된 다리.

“푸란을 놔줘요.”

“이 기계 이름이 푸란이구나.”

마찰음을 내며 파닥거리는 기계를 내려놓았다. 좌우로 비틀거리던 기계가 금방 중심을 회복하고 여자아이 옆으로 갔다.

“가끔 멋대로 달려 나가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에요.”

여자아이 곁을 맴돌던 기계가 움찔하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뒤집어놓은 거북처럼 다리를 휘저을 뿐 일어서지 못했다.

“또 이러네.”

아이가 기계를 안아 들었다.

“혹시 네가 만든 거니?”

“아니요. 선물 받은 거예요.”

붙임성이 좋은 애였다. 처음 본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고. 나도 어렸을 때 이랬던가?

멋쩍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요?”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

“아! 이제 막 돌아왔으니 모르겠네요. 여긴 운타예요. 작은 마을이죠. 조금 답답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곳이에요.”

아이가 기계를 살짝 흔들었다. 기운 넘치게 움직이던 기계가 서서히 느려지더니, 이내 멈춰버렸다.

“운타?”

“아, 멈춰버렸네. 점점 더 빨리 멈추는 거 같아요.”

“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원래 기계는 오래 쓸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나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가하란은 귀 뒤쪽을 긁적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잠깐 봐도 될까?”

“고칠 수 있어요?”

“일단 봐볼게. 대신 내 질문에 대답해줄래?”

“좋아요.”

기계를 넘겨받았다. 시그니처를 불러와 회로를 살폈다. 단순하게 짜인 구조라 깊게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와아! 이거 뭐예요? 만져도 돼요?”

“만져도 돼…… 이미 만지고 있네.”

눈앞에 펼쳐진 선을 콕콕 건드리는 아이였다.

“예뻐요. 어떻게 만드는 거예요?”

“시그니처라고, 마법 공학을 배우게 된다면 알게 될 거야.”

“들어본 적 있는 거 같아요.”

가하란은 어긋난 회로를 매만졌다. 배터리 문제는 아니라 쉽게 고칠 수 있었다.

“운타라고 했지? 처음 들어보는 곳인데, 둔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야?”

“둔이요? 그게 어딘데요?”

“둔을 몰라?”

“네, 잘 모르겠는데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설마 또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건가? 하지만 바닥에 난 균열은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났다는 증거인데?

“둔, 둔, 둔…… 아! 아저씨들이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으면 옛 성도는 어때? 성도는 들어봤을 테니까.”

“성도요? 그게 뭐예요?”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봤다. 갸웃거리는 고개.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제국에 발 딛고 살았던 사람 중에 성도를 모르는 이가 있나?

아니지. 아이가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 태어났다면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면 돌아온 자가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돌아온 자요? 음, 아저씨들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상한 곳에 빨려 들어갔다가 운 좋게 돌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 꽤 있니?”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일반인들 입에 오를 정도면 위상 균열에 휩쓸린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 중 무사히 복귀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부상을 안고 되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산페르가 겪었다는 기괴한 위상에 떨어졌으면, 귀환은커녕 생존조차 못 했을 테니까.

“여기.”

푸란이란 이름의 기계를 돌려주며 아이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검지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걸로 신호를 주고받나 보네.”

“네. 이걸 끼고 있어야 푸란이 절 찾을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것도 잠깐 봐도 될까?”

아이는 망설임 없이 반지를 빼서 줬다. 빼앗아 갈 거라는 의심은 조금도 안 하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구김살이 없는 애였다.

“안정화를 시켜놨어. 이제 막 달려들지 않을 거야.”

“정말요?”

반지를 돌려줬다. 아이가 푸란과 함께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진짜로 얌전해진 거 같아요.”

가하란은 손을 털며 주변을 살폈다. 정면으로는 닦인 길이 보이고 뒤쪽으로는 빼곡한 숲이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우와아!”

아이가 소리쳤다. 양손에 루루가 들려 있었다.

“얘는 뭐예요?”

“내 친구.”

“이렇게 작고 귀여운 동물은 처음 봐요.”

“흔한 원숭이는 아니지.”

아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가 이리저리 만져도 얌전히 있는 루루였다.

아이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면 주변 일대는 안전하다는 뜻이다. 마을도 가까이 있을 터였다.

“릴리!”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반응했다. 몸을 홱 돌리더니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어찌나 재빠른지 넋 놓고 바라보게 될 정도였다.

아이가 나무 위로 몸을 감춘 직후, 남자가 나타났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또래로 보인다.

“누구시죠?”

아이와 달리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인 반응이라 도리어 안심이 된다.

“푸란을 왜…….”

남자의 시선이 발치에 있는 기계에 닿아 있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아이, 릴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해 살 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릴리라면 위에 있습니다. 저는…… 돌아온 자라고 설명할 수 있겠네요.”

손가락을 치켜들자마자 위에서 릴 리가 소리쳤다.

“말하면 어떡해요! 눈치도 없이!”

“눈치가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이분이 널 찾는 거 같으니까.”

“에이, 나랑 마음이 맞는 오빠인 줄 알았는데.”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나무 위를 바라봤다.

“릴리! 멋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했지! 여긴 위험하다고.”

“위험한 게 아니라,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거겠지. 대마수는 여기에 관심 없어! 진짜 다들 겁만 잔뜩 먹고.”

대마수?

가하란은 오가는 대화 속에서 자료를 수집했다. 릴리와 실랑이를 벌이던 남자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 밑으로 향했다.

“당장 안 내려오면 푸란하고 못 놀게 할 거야.”

“치사하게 그럴 거야? 텐조 오빠는 나만 괴롭혀.”

“네가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 얼른 내려와. 정말 화내기 전에.”

화낸다는 말에 릴리가 다람쥐처럼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자! 내려왔으니까 화내면 안 돼.”

“……내가 정말 너 때문에 못 산다.”

텐조라 불린 남자가 릴리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한숨을 짓고는 손을 거뒀다.

“제 동생이 귀찮게 굴었나요?”

텐조가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요. 오히려 절 도와줬습니다. 착한 애예요.”

“착하긴요. 말썽 그 자체인 애인데. 그보다 돌아온 자라면…….”

“저도 막 들은 단어라 제대로 쓴 건지 모르겠네요. 릴리는 저 같은 사람을 돌아온 자라고 표현하던데.”

“정말 틈에 갇혔다가 돌아온 건가요?”

틈. 민 교수가 사용했던 단어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정보가 많은 걸까.

“네. 방금 이곳으로 돌아왔어요. 제대로 돌아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돌아온 자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말하죠. 제대로 왔는지 모르겠다고. 안심해도 돼요. 여긴 ‘원토’니까.”

“원토요?”

“기준이 되는 땅. 똑똑한 분들이 말한 거니까 맞겠죠. 틈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귀환해야 할 올바른 땅이 여기라고 해요.”

무엇 하나 확인할 수 없는, 말뿐인 정보지만 그래도 긴장감이 풀린다.

“근데 멀쩡하네요. 제가 본 돌아온 자들은 다들 큰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행운이 따랐어요.”

행운이란 두 글자에 담아낼 수 없는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진짜 반짝이는 하늘에서 떨어졌어. 되게 신기했다니까?”

릴리가 옆에서 말했다.

“저기, 텐조 씨.”

“예.”

“오늘이 며칠인지, 연도까지 포함해서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곳이 둔하고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도…….”

“7월 13일이요. 연도는 신기(新紀)로 12년.”

“신기요?”

“그라운드 제로를 기점으로 바뀐 역법이요. 신기원. 혹시 그 전에 틈으로 옮겨진 건가요?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긴 한데.”

“아니요. 전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 휘말렸어요.”

“근데도 몰라요? 이상하네.”

갸우뚱거리던 텐조가 아, 하며 눈을 씰룩였다.

“방금 둔이라고 했죠?”

“예.”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겠네요. 둔에서 사셨다면.”

“그게 무슨…….”

말하던 도중 가하란도 깨달았다.

낯선 역법, 둔과 성도를 모르는 릴리, 그리고 텐조의 반응.

“여긴 옛 제국이 아니군요.”

“네. 옛 제국에 맞춰서 표현하자면, 여긴 옛 연합 왕국의 영토죠. 지금은 연합 도시지만.”

가하란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국경을 넘어버렸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유명무실해진 국경이라지만, 어쨌든 말로만 들어보던 연합 왕국에 발을 디딘 것이다.

“제가 옛 제국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곤란해질까요?”

“아니요, 아니요. 요즘은 그런 거에 예민한 사람 없어요. 살기 팍팍해진 시대고, 대마수가 난리 치기 전까지는 교류도 잦았으니까요. 오히려 제국 사람이라 하면 관심을 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근데 대마수가 뭐죠? 릴리도 아까 말하던데.”

“그라운드 제로 직후에 이곳을 떠났다면, 모를 만하겠군요.”

텐조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으니 직접 보시죠.”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진 시선이 저 먼 곳으로 향했다. 이글거리는 태양 밑, 야트막한 산맥이 보였다.

“저게 왜…….”

“잘 보세요.”

그때였다. 산맥이 꿈틀댔다.

가하란은 곧바로 착안을 열었다.

복잡하게 엉킨 선들이 무자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건 산이 아니다. 저건…….

“마수들의 집합체. 위테와 드픈, 벨론을 거쳐 길게 이어진 끔찍한 군단이죠. 아, 이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볼로스 근처에요.”

국경 지대 볼로스.

아버지가 목숨을 거두신 곳.

“저게 다 마수인가요?”

“네. 1년, 아니 2년 정도 됐을 겁니다. 저게 국경을 갈라놨어요. 끔찍한 모습이죠.”

셀 수 없이 많은 마수가 서로 몸을 비비며 움직이고 있었다. 쌓이고 쌓여 산맥처럼 보일 정도면, 대체 몇 마리란 말인가?

가하란은 멍하니 ‘대마수’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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