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연질 파이프 속을 내달리던 액상 근육이 연푸른빛을 내며 발광을 시작했다.
“임계치를 넘어섰습니다. 골리앗의 피가 기화합니다.”
연질 파이프가 부풀어 올랐다. 버니어의 눈금을 확인했다. 아직은 허용 범위 내였다.
“회전 속도를 3p 더 올려.”
벨솔은 수석 연구원에게 말하고 거병을 바라보았다. 외장갑을 전부 떼어내고 탈로스 상태인 거병. 드러난 파이프가 혈관처럼 꿈틀거렸다.
조금만 더 버텨주면 좋을 텐데, 벨솔은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D28 연결부에 손상이 보입니다.”
“L26 연결부도 상태가 안 좋습니다. 2.3 크랙입니다.”
안 좋은 보고가 연이어 올라왔다.
벨솔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실험 중단. 작동 중지하고 애들 식혀.”
공급되던 마나가 끊겼다. 빛을 내며 기화하던 골리앗의 피도 얌전해졌다.
벨솔은 입가를 가리며 거병 곁으로 향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가동 시간이 10분을 넘기면 파이프가 버티질 못합니다. 기화 상태에서 에너지 전달과 효율은 최고치에 달하지만, 아무래도 보급화는 힘들 것 같습니다.”
수석 연구원이 긴 막대기로 연질 파이프를 툭 건드렸다. 파이프 외피가 늘어진 살점처럼 출렁거렸다. 탄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상태로 계속 가동하면 어떻게 될까?”
벨솔은 보호 장갑을 끼며 물었다.
“연질 파이프가 찢어지진 않겠지만, 연결부에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이탈될 가능성도 있겠지?”
“최악의 상황이죠. 기화 상태의 골리앗이 대기 중에 뿌려지면 외장갑 안쪽이 전부 녹아내릴 겁니다.”
벨솔은 장갑을 낀 손으로 연질 파이프의 연결부를 당겨보았다. 헐거워진 조임쇠가 너무나도 쉽게 풀려 나왔다.
“연성을 낮추는 쪽으로 개량하면 어떨까.”
“아시겠지만, 그렇게 하면 연질 파이프가 터질 겁니다. 아니, 깨지겠죠. 연성을 이 이상 낮출 수 없습니다. 차라리 기화를 포기하는 게…….”
“현실적인 조언은 고맙지만 우린 계속 도전해야 해. 여긴 그러라고 만들어준 곳이니까.”
“하지만 지원을 받는 이상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듭니다.”
벨솔은 수석 연구원에게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늙은 아줌마 대신해서 사람들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겠네. 나한테는 말을 못 하니 널 갈구나 보지?”
“눈치를 좀 줄 뿐이죠. 가끔 선생님의 안부도 물어보고요. 그리고 갈군다는 단어는 애들 앞에서 쓸 만한 게 아닙니다.”
벨솔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음에 돈 문제로 뭐라 하는 놈 있으면 내 방으로 보내. 젊은 친구들 상대로 악쓰지 말고, 내 앞에서 직접 말하라고.”
“그렇게 전하면 약속이 있다고 하면서 바로 돌아가겠죠.”
연결구를 계속 살피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른기침이 나왔다.
“좀 쉬시는 게…….”
수석 연구원이 물을 건네며 말했다.
“이 나이 되면 기침 같은 건 그냥 나와. 내일모레면 예순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내일모레가 좀 기네요. 예순이 되시려면 아직 한참 남으셨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더라. 나도 내가 쉰이 넘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무엇보다 이 나이 되면 은퇴해서 느긋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연구소 안이라니.”
“선생님께서는 일흔이 되셔도 이곳에 계실 겁니다.”
“악담도 그런 악담이 없네.”
수석 연구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기록 중인 다른 연구원들을 가리켰다.
“저 친구들 보세요. 젊다고 해서 꼭 체력이 좋은 건 아니더라고요. 얼마 전에 견학 온 애들 중 지원서를 낸 놈은 한 명뿐입니다.”
“한 명이나 있어?”
벨솔은 장갑을 벗고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펜으로 묶어놓은 머리를 풀며 휴게실로 향했다. 뒤따라 온 수석 연구원이 지원서라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드리안 도시에서 온 친구네.”
“오라클 쪽 연을 타고 들어왔는데, 나름 깡다구가 있어 보입니다.”
“연구생 자질 중에 깡다구가 들어가는 게 맞나 싶은데.”
“여긴 그게 있어야 하는 곳이니까요. 선생님께서 방침을 바꾸시면 고상한 친구들로 잔뜩 데려올 수 있습니다. 저도 그게 편하고요.”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는 건 다른 곳도 많잖아. 여긴 다르게 가야지.”
지원서에 사인을 휘갈기고 책상 끝으로 밀었다. 수원 연구원이 지원서를 받아 갔다.
“타리움 산하 연구소 중 한 곳에서 교류회를 신청해 왔습니다.”
“가는 거, 아니면 오는 거.”
“그쪽에서 이곳으로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받아줘. 온 김에 심부름 좀 시키고. 우린 언제나 인력난이잖아?”
“그러실 것 같아서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해 놨습니다. 오면 액상 근육 배합실에 넣어서 굴려야겠습니다.”
“나보다 더 악질이야.”
수석 연구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고마워.”
“‘체시’에 주입된 골리앗의 피를 회수해 왔습니다.”
“경화도는 어때?”
“예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습니다. 1.58이었으니까요.”
“전담반한테 수고 좀 하라고 해. 액상 근육 교체하면서 연질 파이프 상태 꼭 확인하라고 전하고. 학회장님이 타신 거병에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걱정 놓으세요. 이번에는 저도 같이 갑니다.”
“너 없으면 이 연구소 누가 굴리고.”
“선생님께서 하셔야죠. 아니면 잠시 쉬시는 것도 좋고요.”
“너, 일부러 가는구나?”
“휴식도 중요한 법입니다.”
벨솔은 낮게 웃었다.
“그래. 유능한 조수의 말은 들어야지. 타리움 중앙회로 가는 건가?”
“네. 체시는 그쪽에 있으니까요.”
“느긋하게 다녀와. 애들도 긴장 풀게 해주고. 기화 버전에 매달리느라 다들 지쳤을 테니.”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수석 연구원을 바라봤다.
“그 외 다른 건?”
“없습니다. 아, 약 챙겨 드시는 거 잊지 마시고요.”
“내가 결혼을 했으면 너만 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아들뻘한테 잔소리 듣는 건 썩 좋은 느낌이 아니야.”
“저도 선생님께 이런 말씀 드리기 싫습니다. 하지만 안 드시니까요. 실험도 좋지만, 자기 몸도 돌보셔야죠. 선생님은 둔의 보물입니다. 멋대로 아프시면 안 돼요.”
“그런 끔찍한 표현은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선생님 대신해서 나간 수많은 자리에서 배워 왔습니다. 다들 그러더군요. 벨솔 교수님은 둔의 보물이니 곁에서 잘 보좌하고…….”
벨솔은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약 잘 챙겨 먹고 잘 쉴 테니 그 거지 같은 소리 그만해.”
“선생님께서 이리도 쉽게 제 말을 들어 주시다니. 이 방법을 종종 이용해야겠습니다.”
쉬세요, 라고 말하며 돌아서던 수석 연구원이 물끄러미 휴게실 구석을 바라봤다.
“쟤는 또 왜 저럴까요?”
벨솔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라라가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 채 하늘을 향해 헛손질하고 있었다.
“가끔 저래. 뭘 보고 있는 건지, 아니, 보고 있기나 한 건지.”
“그러고 보니 루루라는 애랑 같이 있었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그거 벌써 몇 년 전이지? 7, 8년 된 거 같은데.”
오랜만에 그 이름이 떠오른다.
가하란.
“루루는 어디로 간 거죠?”
“모르겠어. 연구실에 있다가 어떤 애가 데려갔는데, 그 뒤로 못 보게 됐으니까.”
“애가 데려가요? 훔친 겁니까?”
“아니. 말이 잘못 나왔네. 루루가 따라갔어.”
“그 사람한테 돌려달라고 하면…….”
“죽었어.”
아, 하고 고개를 주억이는 수석 연구원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흔해빠진 세상. 놀라워할 일도 애도할 일도 아닌 일.
“자기 고향이었던 숲으로 돌아간 건지, 아니면 다른 사람 손에서 크고 있는 건지.”
“라라는 루루를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요?”
“오늘따라 감정적이네.”
“제가 사람은 몰라도 동물은 감성적으로 대하거든요.”
“보통은 반대 아니야? 아니지. 차라리 동물이 낫나?”
구석에서 해괴한 몸짓을 하던 라라가 벨솔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거기 내 옷 좀 줄래?”
수석 연구원이 건넨 옷으로 라라의 몸 전체를 감쌌다. 발작하듯 움직일 땐 이렇게 천으로 감싸 빛을 차단하는 게 좋았다.
“원숭이 수명은 어느 정도 되죠?”
“잘 몰라. 근데 얘네는 일반적인 원숭이와는 다른 거 같아. 근 10년이 넘게 곁에서 지켜봤는데, 변화가 없어. 어쩌면 우리보다 오래 살아 왔는지도 모르지.”
“수집가들이 탐내겠군요.”
“그래서 내가 데리고 있지. 박제돼 벽에 걸리는 거, 난 보고 싶지 않아.”
난리를 치던 라라가 얌전해졌다.
“나가 보겠습니다.”
“수고 좀 해.”
수석 연구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벨솔은 옷을 살짝 들쳐 라라를 살폈다. 자그마한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라라의 이마를 간질이며 말했다.
* * *
몸을 경유해 거대한 힘이 옮겨진다. 몸이 휘청거리고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이 뒤를 따랐다.
-버틸 수 있겠어?
“아마도요!”
가하란은 비명에 가깝게 소리를 질렀다. 산페르가 전달한 힘이 카트시로 흘러 들어갔다. 비트를 붙잡았을 때와 달리 둔중한 고통이 전신을 때렸다.
-좌표를 고정했어요. 위상 균열을 열게요.
카트시의 말과 동시에 가지처럼 뻗어나간 비트가 맹렬한 빛을 뿌렸다.
-연결을 풀어요!
가하란은 착안을 닫고 산페르와 카트시를 잇던 선을 손에서 놓았다.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바닥에 쓰러지려 하는 걸 산페르가 받아주었다.
물의 막이 전신을 감쌌다. 몸을 사정없이 후려치던 충격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맷집이 좋아졌네.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마차에 치여도 멀쩡할걸요?”
그 옛날, 타챠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산의 전사는 절벽에서 떨어지고 바위를 구르고 가시덤불 속을 헤엄쳐 가는 것으로 몸을 단련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공감하고 있었다.
가죽은 질겨지고, 고통은 무뎌진다. 외력으로 마나를 덧씌우면 어지간한 충격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간이 비트에 접촉하고도 살아남는 걸 보다니. 신이 봤다면 기뻐했을 거예요. 자신에게서 벗어난 자가 또 한 명 나타났다고.
“나중에 만나게 되면 보여 드려야겠네.”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잇몸이 허물어지며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통증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더니 이 꼴이다.
몸보다 입안 상태가 더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게 위상의 경계면이라는 거네. 안원의 출입구와 비슷하면서도 달라.
산페르가 경계면 앞에 섰다. 반짝이는 입구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닫히기 전에 가죠.”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비트 옆에 섰다. 기절할 듯이 울부짖던 루루는 지쳤는지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루루에게서 발견한 한 가닥의 선.
그게 올바른 좌표가 되어줬을지, 이제 알아볼 차례였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우린 곧 다시 보겠네요.
“응. 조만간 보게 될 거야.”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넌 똑똑하니까 금방 알아듣겠지. 지금처럼.”
카트시를 기점 삼아 가지처럼 뻗어나가던 비트가 소멸했다.
-위상이 사라지고 있어요. 인사는 여기까지 하죠.
“이번이 마지막이길 빌어줘.”
-원숭이에게서 건네받은 정보가 옳다면, 이 반대편에 있는 건 신이 본래 창조했던 계일 거예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경계면 앞에 섰다. 산페르가 어깨에 붙었다.
“갈게요.”
비트에 살짝 손을 얹었다. 정보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손이 뜨거운 정도에서 그쳤다.
“이따가 봐.”
가하란은 카트시를 향해 말했다.
-그래요. 이따가 봐요.
고개를 끄덕인 후 경계면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몸이 아래로 쑥 꺼지다가, 위로 솟구쳤다. 비트에 의지해 제멋대로 바뀌는 방향을 다잡았다.
이윽고.
반대편 입구로 나왔다.
“…….”
가하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대지를 난자한 균열이었다.
그라운드 제로가 남긴 상처.
맥이 탁 풀리는 한숨과 함께 주저앉았다.
“돌아온 건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누, 누구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