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04화 (404/558)

제404화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랬죠. 어머니를 가리켜 ‘눈이 뜨인 자’라고.”

-정확히는 눈이 뜨인 자가 없으면 제대로 이동할 수 없다고 했지. 귀찮거든.

“엄마도 저와 같은 눈을 갖고 있었어요. 아니, 비슷한 눈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눈에 대해 뭔가 알아낸 모양이네. 세핀느를 처음 만났을 때 눈이 뜨인 자인 줄 알았지. 너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둘 다 아니었어.

가하란은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착안을 열었다. 정보로 변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도 산페르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묘한 눈이야. 날 읽어내려 하고 있어. 내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겠어?

“아니요. 착안으로 봐도 아저씨는 그대로네요. 아직 제가 해석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닌 듯해요.”

-착안. 처음 듣는 이름이야. 지겹도록 살아왔는데 아직 모르는 게 있네. 좋아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기겁해야 할 일인지.

둔 시내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어머니와 멀어진다.

-인간을 수없이 지켜봐왔어. 그들의 감정을 모두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지.

“아저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저, 괜찮아 보이나요?”

-후련해 보여. 기쁨도 슬픔도 잘 마무리 지은 것 같고.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네요. 어머니한테도 그렇게 보였을 테니.”

마지막에 남긴 거짓말을 어머니는 눈치챘을까? 알아차렸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곁들여 작별 인사를 남긴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거짓말이 느네요.”

-관계란 게 그런 거지. 그래서 어땠어? 직접 만나본 세핀느는.

“생각했던 것보다 말씀이 많으셨고, 생각했던 것보다 잘 웃으셨고, 생각했던 것보다 눈물이 많으셨어요.”

-그래?

“네.”

-만난 걸 후회하진 않겠지?

“만나지 않았으면 저 자신을 평생 저주하며 살았을 정도예요. 잔소리라는 게 이렇게 힘이 되는 건지,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더는 듣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에요.”

-잔소리라면 내가 해줄 수 있어.

“그건 사양할게요.”

작게 웃으면서 뒤를 돌아봤다. 이제 아버지의 모습도, 어머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 형태만 아스라이 보일 뿐.

-세핀느가 나한테 말을 건 것도 어쩌면 너 때문일지도 모르겠네.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어머니는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했어요. 아저씨와 함께한 것 역시 어머니가 원했기에 이뤄진 것이고요.”

-인간에게 위로받는 건 낯간지러운 일이야. 하지만 싫지는 않아.

“자주 위로해 드려야겠네요.”

-그건 사양할게.

둔 시내를 가로질렀다. 제철소를 지나 강철의 무덤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그간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난 이유, 과거로부터 이어진 비트, 신의 부재와 새롭게 만들어지는 세상.

-신이 손을 뗐다. 그래, 그런 거였어. 주술사가 본 어둠에 가려진 미래는 이걸 말하는 거였네. 확정된 미래가 사라졌으니 예지안으로도 읽어낼 수 없었던 거야.

“아저씨도 여러 위상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고 하셨죠?”

-맞아. 너처럼 뜻대로 움직인 게 아니라 휩쓸린 거지만.

위상이 사라져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건가. 놀라울 따름이다.

저 밑에 강철의 무덤 입구가 보였다.

“저기예요.”

산페르가 고도를 낮췄다. 지면에 발을 대며 작게 숨을 내쉴 때였다. 끽, 하고 루루가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깨어났네.

눈을 뜨지 못한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 이동한 게 충격이었을까.

“괜찮아.”

다독여주며 입구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겹침 세계 때처럼 고생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비스듬히 열린 철판 사이에 손을 끼워 넣었다. 외력으로 붙잡아 둔 마나를 분사시키며 철판을 들어 올렸다.

손끝이 얼얼할 뿐, 뜻대로 손이 움직였다. 산페르 말대로 장애가 생기지는 않았다.

-마나 사이에 끼어든 그 이상한 힘은 뭐지?

“저도 배운 거예요. 외력이라고 하는데, 가르쳐준 사람도 힘의 출처가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른다고 해요. 신의 부재와 섭리의 꼬임이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힘. 그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네요.”

-외력? 누가 가르쳐준 건데.

“드래곤이요.”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산페르를 뒤로한 채 강철의 무덤으로 진입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곧게 뻗은 길을 걸었다.

-용이라고?

“네.”

-그게 아직도 살아 있었네.

“아저씨도 아세요?”

-알지. 그놈도 오래된 놈이니까. 내가 의식이란 걸 가졌을 때 그놈이 나타났으니까.

“사슴님은 아저씨를 가리켜 ‘가장 오래된 형태’라고 했어요. 신이 이 계를 만들었을 때 아저씨를 가장 먼저 만든 게 아닐까요?”

-만드는 순서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글쎄요. 저는 신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묻고 싶네. 내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영생을 부여한 이유가 있을 텐데 말이야.

“신이라고 해서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래요. 그러니 답은 아저씨가 직접 찾아내야죠. 정 모르겠으면, 절 도와주면서 시간을 보내셔도 되고요.”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위해 투자해라? 낭비가 아닐까 싶은데.

“어머니는 돌봐주셨잖아요.”

-……귀여운 맛이 사라졌어. 작았을 때는 어수룩한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능구렁이 같아서 별로야.

“생존 전략이라고 해둘게요.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뭐, 그런 점이 세핀느와 닮긴 했어.

거대한 공동에 도착했다.

또다시 이곳을 찾았다.

카트시가 있는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먼지가 내려앉은 천을 홱 걷었다.

카트시가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겹침 세계에 있던 로키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라진 로키는 어디서 어떻게 유단과 만나게 되는 걸까.

-유사 정령이잖아.

“네. 이 친구가 방법을 알려줄 거예요. 제 머릿속에도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니 이 친구한테 도움을 받으려고요.”

배운 적 없는 지식이 계속 솟아나고 있었다. 비트를 통해 흘러 들어온 정보가 뇌를 비롯해 모든 장기에 녹아든 기분이었다.

전능감 비슷한 게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지식이기에 멋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안정성을 확인하기 전까지 비트를 통해 얻은 정보는 조심히 다뤄야 한다.

“카트시.”

유사 정령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착안이 열리며 시그니처를 불러왔다.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온 비트가 카트시에 연결돼 있었다. 이곳에 있는 카트시는 비어 있지 않았다.

마력선 짜맞춤으로 형성된 카트시의 실체에 다가섰다. 이제는 알 수 있다. 실체라 생각했던 모습조차 껍데기라는 걸.

신이 주조한 모습은 이 안쪽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카트시는 말했다. 자신에게는 두 단계에 거쳐 기억이 봉인돼 있다고.

첫 번째는 줄리어스와 한 약속을 통해 생긴 봉인. 두 번째는 카트시 스스로가 채운 기억의 자물쇠.

줄리어스는 카트시가 최초의 오토마타이면서, 하늘석과 연관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밝혀지면 세계가 뒤집힐 정보였기에 카트시와 합의 하에 기억을 잠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카트시 스스로가 걸어 잠근 기억은 무엇일까?

추측하건대 ‘켈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늘석이 품고 있던 강철 거인.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마나를 잡아먹는 신의 작품.

전략 무기에는 반드시 안전장치가 달려 있기 마련이다. 카트시는 자신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기억을 닫아 켈트를 걸어 잠근 걸지도 모른다.

“카트시. 내 목소리가 들려?”

마나 회로를 살며시 건드리며 말했다. 동시에 비트가 반응했다. 카트시가 눈을 뜬 건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착안에 반응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 카트시는 예측했을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가중 연산을 작업을 마쳤습니다. 보안 형식 변경을 수락했습니다.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탁한 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졌다. 커넥터를 통한 음성 전달 없이 의사가 전해진 이유.

가하란은 비트를 바라봤다. 카트시에서 가느다랗게 뽑혀 나온 비트가 오른쪽 눈과 연결됐다.

비트가 커넥터를 대신한 것이다.

당시에는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손을 떼도 비트가 연결성을 유지했다.

“카트시.”

-인식된 음성이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죠?

“이름은 가하란. 너랑은 곧 친구가 될 사람이야.”

-이상하네요. 친구라는 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닐 텐데요. 전 당신을 친구로 맞이할 생각이 없어요.

“그럴 수도 있겠네.”

-줄이 보낸 사람인가요?

“아니. 줄리어스는 오래전에 죽었어. 여긴 나타가 아닌 둔이란 곳이야.”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몇백 년은 흘렀어.”

-보안장치는 어떻게 연 거죠?

“배웠으니까. 줄한테서, 그리고 너한테서.”

-전 그쪽을 처음 만나요. 무엇보다 줄은 몇백 년 전에 죽었다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요?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고 싶어.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가하란은 꿈틀대는 마력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미래를 거쳐 과거에서 왔어. 머나먼 과거에서 만난 넌, 나에게 문장 하나를 알려줬고. 이게 기나긴 설명을 대체할 수 있다고 봐.”

-들어는 볼게요.

가하란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내게 말했어. ‘나는 사나운 켈트의 머리’라고.”

그 순간 타원형으로 꾸며진 카트시의 실체가 우그러졌다. 가닥가닥 분해돼 선으로 변하더니 종잡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동시에 카트시에 연결된 비트가 밝게 빛났다.

가하란은 본체에 손을 올린 채 기다렸다. 이윽고 날뛰던 마력선이 잠잠해졌다.

-이상한 위상이네요. 비트의 연결도 이상하고. 무엇보다 이상한 건 당신이란 존재고요.

“난 너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왔어. 검증 절차가 더 필요할까?”

-아니요. 당신의 말을 믿어요. 켈트의 머리, 이건 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말이니까요.

“하늘석에서 올을 만났어.”

-거기까지 갔다면 더더욱 당신을 배척할 필요가 없죠. 상황을 파악했어요. 위상에 문제가 생긴 거겠죠?

“널 만든 신이 계에서 손을 뗐어. 모든 방식이 바뀌고 있고, 예측된 미래는 사라졌어.”

-그래서 위상이 이 꼴이군요. 신은 말했죠. 언젠가 자신의 자식들이 품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될 거고, 그때가 오면 모든 게 예측 불가한 지점으로 돌입할 거라고.

카트시와 연결된 비트가 갈래갈래 찢어졌다. 그 형상이 마치 가지를 뻗치는 거대한 나무 같았다.

-위상 균열을 생성하려면 자원이 필요해요. 지금의 난 켈트와 떨어져 있기에 에너지가 부족해요.

“그거라면 해결해줄 수 있어.”

가하란은 슬쩍 산페르를 바라봤다.

“아저씨.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휴대용 배터리가 돼주실래요?”

-표현 한번 아름답네.

산페르가 다가왔다.

-힘을 건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 눈은 안원과도 연결돼 있으니까. 하지만 널 통로로 써야 하는데, 괜찮겠어?

“이미 몇 번 경험해 봤어요. 죽도록 아프겠지만 버텨야죠.”

-나도 널 통해 비트라는 걸 감각해볼 수 있겠네. 나쁘지 않은 거래야.

카트시를 바라봤다. 산페르를 감지했는지 조금 놀란 목소리를 꺼냈다.

-올과도 만나고 ‘옛것’과도 알고 있고. 당신은 위험한 생명체네요.

“위험한 건 잘 모르겠네. 난 그저 돌아가고 싶을 뿐이야.”

-좋아요. 과거의 내가 내린 판단을 믿어보죠. 당신은 도와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펼쳐진 비트가 빛을 쏟아냈다.

공간이 흔들리고 있었다.

-좌표가 필요해요. 어느 위상으로 이동할 거죠?

“그게, 알지 못해. 네 지식을 빌리고 싶은데.”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저 역시 변화한 위상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 좌표가 없다면 임의의 위상으로 옮길 수밖에 없어요.

좌표. 연결점이 필요하다.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품에서 얌전히 있던 루루가 고개를 내밀었다.

“잠깐만.”

왼쪽 착안이 루루의 꼬리에서 시작된 얇은 선을 발견했다. 정보의 선이었다. 선은 비트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루루의 단짝 라라.

단절된 상태에서도 둘은 시각 정보를 공유했다.

공유한다는 건 이어져 있다는 뜻.

비트와 접촉하기 전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선이다. 감지할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 것일까?

가하란은 루루를 번쩍 들어 올렸다. 루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네가 열쇠였어.”

끽?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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