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3화
사진으로만 본 얼굴이 저 아래 있었다. 세핀느. 불러본 적은 없고 들은 적은 많은 그 이름.
가하란은 세핀느의 옆을 보았다. 자그마한 아이가 세핀느의 손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아이가 무구한 웃음을 지을 때마다 세핀느 역시 미소를 보여주었다.
“아빠! 빨리 와!”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가하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 올란트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제철소에서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가하란은 침대에 누워 상상했었다. 양친과 함께 즐겁게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을.
“저 아이는…….”
가하란은 세핀느 품에 안기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너겠지.
“그렇겠죠?”
-세핀느가 살아 있는 세상. 난 이곳이 마음에 들어.
경계면을 통과할 때 산페르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좋아서 조금 두렵기도 하다고.
가하란은 저 멀리, 초원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라지고 있어. 내가 처음에 있던 곳처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저걸 막을 수 있겠어?
“아니요. 저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 어찌할 수 없는 일, 그렇겠지.
가하란은 다시 아이를 바라봤다. 어린 가하란은 엄마 품에서 칭얼대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짜증 내는 것 같았다.
지류의 로키가 본류의 로키를 보게 된다면 이런 심정이겠지.
‘나’이면서 ‘내’가 아닌 존재가 저곳에 있다. 가지지 못했던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내가 저곳에 있었다.
몸 안쪽 깊은 곳에서 강하게 일던 충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겹침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곳에 있는 모든 건 헛된 꿈이다. 망상일 뿐이다.
-내려가 볼까?
“아니요. 괜찮아요.”
-세핀느와 얘기해보고 싶지 않아?
“목소리는 듣고 싶어요. 얘기도 해보고 싶고요. 하지만, 저분한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제가 당신의 아이라고 하면,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짓겠어요? 아니, 다른 얘기를 꺼내려고 해도 수상쩍어 보이잖아요.”
이룰 수 없는 꿈은 품지 않는 게 편하다.
붕괴가 시작됐고 이별은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러니 지켜보는 게 옳은 판단이다. 감정도 결국 에너지니까. 불필요하게 소모할 이유는 없다.
……덧없는 작별은 이제 사양하고 싶다.
-시간은 인간을 바꾸는 마법이지.
“제가 바뀌었나요?”
-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야. 그냥 나에게는 찰나에 불과했지만, 너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할 뿐.
까르르 웃음소리가 올라왔다.
어린 가하란을 번쩍 들어 올린 올란트가 강가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세핀느는 나무 아래 앉아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어머니와 얘기해 봤나요?”
-했지.
“뭐라고 하셨어요?”
-말해주기 싫어. 나와 저 아이 사이에 있는 일이니까. 정 궁금하면 내려가 보는 게 어때? 마침 혼자 있는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
산페르의 얼굴이 눈앞을 채웠다. 바다를 담은 푸른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의미가 없으니까요.”
-의미라.
“이 위상도 곧 사라지겠죠. 어머니를 살릴 수도 없고요. 그러니 지켜보는 게 나아요.”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야.
가하란은 세핀느를 바라봤다. 사진 속 모습보다 머리카락이 더 길었다.
아버지가 추억하던,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이 저 사람이 맞을까?
검게 탄 손끝이 아려왔다.
사실 두려울 뿐이다.
의미 없는 이별도 두렵고, 내가 멋대로 상상하던 인물과 다를까 봐 두렵다.
아버지는 말했다. 엄마는 달 같은 사람이라고. 곱게 생겼지만 뚝심이 대단해 태풍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이라고.
단어의 조각으로, 사진 속 인상으로 만들어낸 어머니와 실제 어머니의 간극이 어느 정도일지, 마주하는 게 꺼림칙했다.
내려가서 마주하면 어머니는 말하겠지.
누구세요? 라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아니, 어쩌면 자상하게 인사해 줄지도 모른다.
그다음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그것이 두렵다.
다음이 없다는 게 두렵다.
그렇다면 시작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정신 똑바로 박힌 어른이라면 이렇게 말해줄 거야. 꿈은 꾸는 것만으로는 무가치하니까 반드시 이루라고.”
덴스 연구실에서 유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일까. 왜 갑자기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꿈을 가진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현 여부는 부가적인 거라고 여겼죠.”
-그런데?
“방금 생각했어요. 이룰 수 없는 꿈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아저씨 말대로 저도 바뀌었나 봐요.”
-바뀌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아. 누구나 바뀌니까. 단지, 그걸 받아들이는 자신이 어떻냐에 따라 다르겠지.
“……솔직히 지쳤어요. 계속 떠나가야 하니까요. 알고 싶다는 욕구보다 편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진 걸까요?”
-너무 많이 알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
“아저씨.”
-왜?
“내려가서 얘기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그냥 떠나는 게 나을까요. 아. 떠날 방법부터 찾아봐야겠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네 고민을 나한테 떠넘기지 말고.
“어른이면 이럴 때 조언도 해주셔야죠.”
-너도 어른이야.
어른이란 말에 실웃음이 나왔다. 가하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저 아래 있는 어린 가하란과 달리 훌쩍 커버렸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곁에서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만나고 이별하며 나이를 먹고, 그렇게 어른이 됐다는 걸.
“두려워요. 상상했던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일까 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괴팍할 수도 있다. 세핀느는 재미난 아이거든.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워요.”
-모르면 알아가면 돼.
“알아간 다음이 두려워요. 막을 수 없는 이별이 찾아오니까요.”
-내 기준에서는 모든 게 금방이야. 하지만, 영원보다 더 긴 찰나도 존재할 수 있지.
가하란은 검게 탄 손을 바라봤다. 통증은 가셨지만 보기 흉한 꼴이었다.
작업용 장갑이 남아 있을까.
안쪽으로 손을 넣을 때였다. 까슬까슬한 털이 만져졌다. 루루였다. 물로 된 얇은 막에 싸여 있었다.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안쪽에 있는지도 몰랐다.
-너한테 계속 안겨 있어서 일단 보호해놨어. 지금은 지쳐서 기절한 것 같지만.
살짝 떠오른 루루가 산페르 곁으로 이동했다.
“저랑 여행을 같이한 친구예요.”
-고생깨나 했겠네.
웃으면서 장갑을 꼈다. 가죽이 살갗에 스칠 때는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끼고 나니 괜찮아졌다.
-장애가 남지는 않겠지만, 화상 자국은 없어지지 않을 거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올란트와 어린 가하란이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장구를 치며 정신없이 노는 중이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요?”
-가면 알게 될 거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나고 나면 만나지 말걸, 하면서 후회할지도 모른다.
“내려주세요.”
몸이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갔다. 나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안착했다.
가하란은 옷을 툭툭 털고 얼굴을 쓸어내렸다. 흉한 몰골은 아니겠지.
나무를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갈 때였다. 세핀느가 일어섰다.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손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까먹을 정도였다.
멀거니 서 있다가, 세핀느와 시선이 마주쳤다.
다가온다.
어머니가 천천히, 이쪽으로…….
“눈은 다행히 날 닮았네.”
세핀느가 말했다. 귀로 들어온 문장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지?
“그래도 코는 아빠를 닮아서 좋네.”
“저기…….”
“가하란.”
“네, 네.”
“코감기는 어때?”
“네? 코감기요?”
“달고 살진 않지?”
“아, 네. 감기 걸린 적 별로 없어요.”
“두드러기는? 어릴 때 계속 두드러기가 나서 걱정했거든.”
“멀쩡해요.”
“됐네. 그거 빼고는 튼튼했으니까.”
세핀느가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장갑을 물끄러미 보다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검게 탄 손목 살이 드러났다.
“아프지?”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약이라도 발라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겠네.”
세핀느가 먼 곳을 바라봤다.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서 붕괴가 일어나고 있었다.
“너무 위험한 짓은 하지 말고. 언제나 돈거래는 조심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도 경계하고. 물론 정말 속이 깊고 한없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까.”
“저기…….”
“잠은 충분히 자는 게 좋아. 밥도 제때 챙겨 먹고. 혹시 가리는 음식이 있니?”
“다 잘 먹어요.”
“잘했어. 가리는 게 있으면 안 돼.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것도 잊지 말고.”
세핀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쉼 없이 늘어놓았다.
중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입술을 떼려 하면 세핀느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 이제 없네. 이 정도면 평생 해야 할 잔소리를 다 했어.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어떻게 저인 줄 아셨어요?”
“가능성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 수없이 보이거든. 수많은 것들이. 너무 많은 것들이.”
많은 것들.
가하란은 반사적으로 착안을 열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비트의 한 줄기가 세핀느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얇아서 착안으로도 잡아내기 힘든 굵기였다.
“보이는 대로 다 실현되는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일어난 것들은 전부 머릿속에서 봤던 것들이었어.”
세핀느가 어린 가하란을 바라봤다.
“무엇이 진짜일까, 그건 상관없어. 남아 있든 사라지든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가하란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 알고 계셨나요? 아버지와 만날 것도, 저를 낳을 것도, 그리고…….”
“내가 죽을 것도 알고 있었냐고? 응. 보였으니까. 아주 많이. 그렇게 자주 보이는 건 반드시 일어나더라고.”
“보였다면 피할 수 있었잖아요. 다른 선택도 가능했을 텐데.”
“싫은데?”
“네?”
“올란트를 다른 사람한테 준다니. 그건 싫어. 무엇보다 널 보고 싶었으니까.”
세핀느의 두 손이 가하란의 뺨에 닿았다.
“이건 내 욕심이야. 널 만나고 싶다는 욕심. 물론 너와 대화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한테 외로움을 물려준다고 해도 이 욕심을 포기하기 싫었어. 내가 밉니?”
“……아니요.”
“사실 살고 싶었어. 내 남자 곁에서, 내 아들 곁에서 살고 싶었어. 살아남는 경우도 봤고. 이게 몇 안 되는 가능성의 세상이겠지.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나 보네.”
세상이 닫히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눈에도 그게 보이고 있다.
“가하란…….”
세핀느의 얼굴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짐을 허용할 것 같지 않던 정갈한 안면에 슬픔이 퍼져나갔다.
“많이 외로웠니?”
말의 홍수가 입안을 채워나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란 둑이 터져서 온갖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가하란은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자잘한 떨림이 눈을 통해서, 붙잡은 손을 통해서 전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단어는 필요치 않았다.
“아버지 성격 아시잖아요. 제가 외로울 틈이 있었겠어요?”
외로웠었다. 어쩔 땐 원망도 했었다.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어머니가 때때로 밉기도 했다.
하지만 괜찮아졌다. 마주하는 순간 이해됐다. 알게 됨으로써 녹아내렸다.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와 만나는 걸.
“아빠를 닮았네.”
“네?”
“거짓말 못 하는 거.”
“그런가요?”
가하란은 빙긋 웃었다.
“어머니.”
“잠깐만. 갑자기 들으니까 살짝 징그럽네?”
아하하하, 가하란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버지가 왜 어머니에게 반했는지, 알 것 같았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죽는 거? 무섭지. 하지만 연극은 언제나 끝나기 마련이잖아? 그게 싫다고 평생 외면하고 살면,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어요. 태풍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은 두려워할 필요 없지.”
“아버지가 어머니의 마음을 훔치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했는데.”
“내가 여지를 준 거지. 저 둔탱이 아저씨는 그걸 평생 모를 테고.”
세핀느가 바라보는 방향에 올란트와 작은 가하란이 있었다.
“이다음은 보이지 않지만, 네가 가야 할 길이 순탄하지 않다는 건 알겠어.”
“젊었을 때 고생 좀 해야죠.”
“고생은 하더라도 다치지는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너희 아빠한테 부탁도 하고.”
“……그럴게요.”
“그쪽의 올란트 씨는 잘 지내고 있니?”
“그럼요. 잘 지내고 계시죠.”
“그래, 그렇구나.”
세핀느가 가하란의 등을 팡팡 친 다음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봐.”
“벌써요?”
“이 무대가 마무리되기 전에 빠져나가야지. 관객이 청소 시간까지 남아 있으면 민폐야.”
그 순간 몸이 떠올랐다.
가하란은 마지막 인사를 내뱉고 싶었으나, 세핀느는 이미 발길을 돌려 나무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하란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만나서 기뻤어요!”
고개를 살짝 돌린 세핀느가 살며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 * *
“누구였어?”
올란트의 물음에 세핀느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날 사랑하는 남자.”
“뭐?”
세핀느는 꾸벅꾸벅 조는 가하란을 안아 올렸다. 살냄새가 풍겨왔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향. 곧 사라지고 말 향.
“거짓말 못 하는 건 똑같네.”
“뭐야, 제대로 말해줘.”
“싫어. 당신도 혼나야 해.”
“내가? 왜?”
“가하란을 놔두고 갔으니까. 내가 그렇게나 부탁했는데.”
“놔두고 간 적 없어. 내가 우리 아들을 두고 어딜 가.”
올란트가 잠든 가하란을 넘겨받으며 활짝 웃었다.
정겨운 얼굴이다.
계속 지켜보고 싶은 얼굴.
고개를 살짝 틀었다.
세상의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보.”
“왜?”
“고마워. 곁에 있어줘서.”
“새삼스럽게.”
웃는 올란트를 바라보며 힘주어 손을 잡았다. 끝과 시작. 그 애달픈 관계를 생각하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