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귀가 먹먹했다. 소리가 뭉개져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았다. 가하란은 맹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들어 올리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몸을 난도질한 고통 덕에 정신이 들었다.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다가 이 꼴이 됐는지.
자꾸만 달라붙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뿌연 시야에 가장 먼저 잡힌 건 로키의 본체였다. 무언가 말하고 있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성공한 걸까?
비트에 접촉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로키와 마운의 모습도 언뜻 본 것 같았다.
정보의 물결 속에서 답을 찾아냈을까?
메마른 입술을 벌려 음성을 쥐어짜 낼 때였다. 눈앞으로 무엇인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일어났네.
새파란 눈동자.
너무나도 익숙한 눈이었다.
“……아저씨?”
-의식도 있네. 몸 상태는 엉망이지만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니 괜찮고.
“뭐가 어떻게 된 거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안 되지. 네가 날 부른 거니까.
세상의 소리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폭발음이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하늘석이 왜 땅에 처박혀 있고, 여기에는 어떻게 왔으며,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일단은 벗어나는 게 먼저야.
어디선가 솟아난 물이 몸을 감쌌다. 검게 탄 손을 어루만지고 뒤틀린 몸을 보듬어주는 따스한 물이었다.
덕분에 시야가 맑아졌다.
“이건 대체…….”
반파된 통제실을 감싸고 있는 다섯 개의 기둥. 거병의 손가락을 닮았으나 만듦새와 완성도가 차원이 달랐다.
카트시가 깨어난 걸까?
“카트시!”
몇 번이고 외쳐봤으나 대답은 없었다. 기절한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하란은 몸을 굴려 로키 곁으로 갔다. 커넥터를 축 늘어트린 상태였다.
“로키, 로키.”
이쪽도 대답이 없었다.
타들어 간 손을 본체 위에 올렸다. 감각기가 전소된 상태였으나, 어째서인지 시그니처를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력석 짜맞춤으로 형성된 로키의 실체가 드러났다. 외부 충격으로 인해 엉망이 된 상태였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모습.
화상으로 오므려진 손가락을 억지로 폈다. 살점이 갈라졌다. 아찔한 격통과 함께 검게 탄 피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뻗은 손가락으로 로키의 실체를 만졌다. 층층이 쌓인 도면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시간만 주면 복구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단절된 영역을 얼기설기 엮었다. 회로가 완전히 뭉그러진 게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가……하란.
“로키.”
-과주입된 정보. 한계. 수행 불가능.
“하고 싶은 말이 많나 보네. 근데 말이 엉성해.”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이상한 거. 저거. 괜찮은가?
“산페르 아저씨라면 괜찮아. 까칠한 분이지만 도와주실 거야.”
-아쉽. 같이 죽는 건데.
“말했잖아. 난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가하란은 기계 안구를 붙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왜 살려준 거야?”
-존재 증명. 나는, 신에게 대항한, 첫 번째 기계.
“너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구나. 마운은?”
-내 안에, 기생 중. 시끄럽다. 살려. 울고. 조용히.
쿠궁, 하늘석이 크게 흔들렸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상이 사라지고 있었다. 공허가 모든 정보를 해체하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올은 깨우지 못했다.
언어 영역의 점검이 끝났는지 로키가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했다.
“어쩔 수 없지.”
-강철 거인, 카트시가 움직였다. 하지만 반응이 없어. 네가 깨운 거 아닌가?
“카트시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긴 한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
-위상을 열려면 올의 도움이 필요하다. 결국 헛된 노력이었군.
그때였다. 산페르가 유유히 날아와 시야에 자리를 잡았다.
-네가 날 이끈 길이라면 기억하고 있어. 내 힘으로 층의 문을 여는 건 불가능하지만, 열린 문을 붙들어 주는 건 아주 쉽거든.
산페르 머리 위쪽으로 강렬한 빛이 감돌더니, 이내 단면이 무너져 내리며 경계면이 나타났다.
윈테가 열었을 때와 달리 주황색 비트가 안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기계 안구가 삐걱거리며 경계면 안쪽을 바라봤다.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했지?
로키가 물었다.
“어. 뭐가 있는지 가봐야 알아.”
-또 지옥을 경험하겠군. 운도 없는 놈.
“모르지. 지옥 말고 천국이 있을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경계를 넘는 것. 처음이야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로 시행했지만, 이제는 알기에 두렵다.
옮겨 간 위상에 공기가 없다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환경이라면?
탈출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
-몸을 던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군.
“무지한 자에게 축복이 있길 빌어야지.”
-이 와중에 신을 찾는 건가?
“뭐라도 찾아야지. 안 그래?”
유치한 말다툼. 몇 년 동안 주고받았던 말장난.
-얼른 가라.
“……하고 싶은 말 없어?”
-말이야 지겹게 했다. 잠깐, 멋대로, 너…….
로키가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마운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 살고 싶어요!
“나도 널 도와주고 싶어. 하지만 위상 너머로 옮길 방법이 없어.”
-그렇죠? 그렇겠죠? 결국 이렇게 끝나네요. 수백 년을 홀로 버텨왔는데…….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의외로 쉽게 단념하네.”
-전 겁이 많은 거지, 멍청한 건 아니니까요. 줄이 만들었는데 멍청하면 안 되죠. 바꿀 수 없는 현상은 맞이해야 해요. 근데 가하란.
“응?”
-기계도 혼이 있을까요? 영혼 세계로 가면 줄을 만날 수 있겠죠. 여기서 경험한 것들을 어머니께 전하고 싶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니 모른다고 해야 할까?
“줄을 만나게 되면 내 얘기도 전해줘.”
가능, 불가능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 그들이 인간보다 더 인간답다고 여기기 시작했으니까.
-가하란. 기계한테 거짓말은 안 통해요. 하하, 즐거웠어요. 사실 혼자 가는 게 무서워서 그렇지 로키와 함께라면 버틸 만해요. 미치광이 체시도 없고. 아! 본류를 찾게 되면 체시를 조심해요. 걔는 정말 미쳤어요. 아, 근데 살아 있으려나?
이별과 죽음을 앞둔 상황임에도 마운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겁쟁이일까, 아니면 겁쟁이란 캐릭터를 소화해냈을 뿐일까.
-아,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뭐든.”
-본류에서 절 만나게 된다면 아는 척해주세요. 무시하지 말고요.
다시 조용해졌다.
-시끄러운 놈이야.
로키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사이좋네.”
-마지막 순간에 이딴 놈과 함께라니.
로키 말대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게 사라진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만났던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분해돼 더는 인식할 수 없는 저편으로 흘러간다.
-가하란.
“응?”
-나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도태되는 걸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니 날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힘을 갖췄다면, 말로써 대응하지 말고 힘으로 억눌러야 할 거다.
“대화란 옵션은 없는 걸까?”
-깨어났을 때 너를 인식한 게 카트시가 아닌 나였다면…… 아니,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나는 네 몸을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그게 너의 방식이겠지.”
-너는 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류에 있는 날, 너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알지 못한다. 그곳에 있는 로키는 아마 완성돼 있을 것이다.
로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다르지만 같기에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지. 너한테는 버거운 상대일 거다.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녹록하진 않아.”
가하란은 타들어 간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너 역시 괴물이었지.
어깨 쪽으로 산페르가 다가왔다.
-가야 해. 나야 여기 있어도 괜찮지만, 너는 아닐 테니까.
산페르가 경계면을 향해 나아갔다. 물에 둘러싸인 가하란의 몸도 살짝 떠올랐다.
가하란은 조금 멀어진 로키의 본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통제실을 감싼 다섯 개의 손가락도 훑었다.
또다시 이별이다.
켜켜이 쌓여간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머릿속에만 남게 된다.
옮겨간 위상은 정상적일까?
아니면, 계속 이런 생활을 반복하게 되는 걸까. 언제나 끝에 혼자 남는 덧없는 삶.
-또 보자.
경계면에 들어가기 직전, 로키가 한 말이었다. 가하란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힘들면 나한테 몸을 넘겨라. 너보다 훨씬 잘 써줄 테니.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기계 안구가 천천히 들렸다.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 안구를 향해 가하란도 손을 들어 올렸다.
-잘 가라, 가하란.
그와 동시에.
세상이 증발했다.
경계면 바깥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흩어져 사라진다. 가하란은 멍하니 경계면 바깥을 보았다.
-나한테는 잠깐이었지만, 너한테는 많은 일이 있었나 보네.
“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있었어요.”
-방금 그 기계들은?
“……친구요.”
비트를 따라 산페르가 움직였다.
겹침 세계에 열렸던 문이 완전히 닫혔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트와 산페르, 그리고 나.
“아저씨는 어디 계셨어요?”
-나? 내가 딛고 있던 곳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 위아래가 뒤집힌 곳이었지. 근데 그곳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어.
“그런데 어떻게…….”
-난 이 안에서도 괜찮아. 내가 죽음을 바라지 않는 이상, 날 죽일 수 있는 건 없으니까. 아니, 내가 죽음을 원해도 죽을 수 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까.
반대쪽 경계면이 가까워진다.
가하란은 복잡한 마음을 추슬렀다. 슬픔을 억누르고 이성을 일깨웠다.
다시 생존에 집중해야 할 때다.
놀랍게도 머리가 바라는 대로 감정이 움직였다. 가하란은 손을 내려다봤다.
비트와 장기간 접촉한 탓일까.
내부의 무언가가 변했다.
로키의 실체를 수복한 것도 그렇고, 몰라야 하는 것들이 은연중에 떠올랐다.
세계의 지식이 머릿속으로 흘러든 걸까. 아니면 내가 지식에 편입된 걸까.
“저 건너편은 어떤 곳이죠?”
-안락한 곳. 네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저곳에 계속 있었겠지. 정겹고 온화하고 아늑하고.
이토록 부드럽게 말하는 산페르는 처음 봤다. 무심하게 툭툭 내뱉거나 날카롭게 말하는 아저씨였는데.
-너도 마음에 들 거야.
“그 정도로 좋은 곳인가요?”
-좋지. 너무 좋아서 조금 두렵기도 하고.
좋기에 두렵다?
경계면을 빠져나왔다.
가하란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저 멀리 익숙한 벽이 보인다. 마을이 보였다.
“……둔.”
또다시 둔이었다.
언제지?
겹침 세계와 비슷한 시기인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산페르가 톡톡 치더니 얼굴로 밑을 가리켰다. 긴 강줄기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아웃라인 바깥으로 연결된 길.
가하란도 몇 번이고 걸었던 길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을 움직이다 보면 ‘그곳’에 도착했다.
가하란은 비쩍 마른 나무를 바라봤다. 기억 속 저 나무는 낙뢰를 맞아 검게 타들어 갔다.
그 나무 옆에, 어머니의 무덤이 있었다.
하지만 비석은 보이지 않았다.
머나먼 과거인가?
시간대를 파악해 보려고 머리를 굴릴 때였다. 젊은 여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 여자다.
아니, 실물로는 처음 본다.
저 여자는, 저분은…….
-세핀느.
산페르가 말했다.
듣는 순간 가하란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엄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