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이건…….
통제실 바닥을 뚫고 나온 기둥이 서서히 오므려지고 있었다. 공간을 점유하며 접근하던 마나는 기둥에 막혀 허공을 맴돌았다.
이 거대한 기둥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가시화된 마나를 차단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을 풀어줄 대상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하란!
양손이 검게 탄 가하란이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가하란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원숭이가 몸을 날렸다.
작달막한 손을 위로 들어 머리를 받아냈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깔렸지만, 충격이 완화됐을 것이다.
끼, 끽.
머리와 바닥 사이에 낀 원숭이가 애처롭게 울었다. 로키는 기계 안구를 쭉 빼 원숭이 앞으로 이동시켰다.
-잡아.
낑낑거리는 원숭이를 꺼내준 후 가하란의 얼굴을 살폈다.
-가하란, 가하란. 죽은 거냐?
안구로 뺨을 툭툭 치다가 체온을 살폈다. 눈두덩이가 불에 지진 것처럼 뜨거웠다. 검게 탄 양손을 제외하고는 얼음물에 담갔다 뺀 것처럼 차가웠다.
비트에 접근한 대가는 참담했다.
-이렇게 죽을 거였나?
안구로 뺨을 연신 내리쳤다.
허망하게 갈 거였으면 차라리 몸을 줬어야지. 악착같이 거절했으면 끝까지 살아남았어야지.
“……으.”
바짝 마른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 말이 들리나?
대답은 없었다. 눈을 씰룩이는 걸 보면 의식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가하란의 상태를 확인하는 사이, 바닥을 뚫고 올라온 기둥들이 정지했다.
통제실 벽을 우그러트린 다섯 개의 기둥. 위협적인 모양새였으나 마나를 차단하는 걸 보면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로키는 벽면을 뚫고 나온 기둥 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마디가 보였다. 자잘한 주름 같은 것도 보였는데 마치 인간의 손가락 같았다.
쇠로 된 인간.
로키는 하늘석이 품고 있는 존재를 떠올렸다.
-카트시, 너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초의 오토마타. 강철 거인, 켈트의 머리. 가하란이 처음 이 말을 했을 때 로키는 저급한 농담이라 여겼다.
실웃음조차 지을 수 없는 악질적인 말장난. 하지만 윈테를 통해 사실을 확인했고, 저급한 농담은 진실이 돼버렸다.
-거기 있다면 뭐라도 해봐! 이대로 두면 이놈은 죽는다.
심각한 부상이었다. 인간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이 가하란을 훑고 지나갔을 터였다.
-빌어먹을. 뒤치다꺼리는 내 취미가 아닌데.
연산 속도를 높여가며 살려낼 방법을 모색할 때였다.
불길한 단절음과 함께 통제실 왼쪽 벽면이 비스듬히 떨어져 나갔다.
하늘석 전체가 기울고 있었다. 로키는 르 3호를 조종해 본체를 고정시켰다.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멎었다. 로키는 기계 안구를 움직였다. 개방된 벽면을 통해 바깥이 보였다.
-저게 종말의 실체인가?
저 멀리, 우뚝 솟아 있던 산맥이 사라졌다. 허무할 정도로, 어떤 징조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하늘과 땅의 부재를 채운 건 텅 비었다는 개념뿐이었다. 저건 어둠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그저 없는 상태였다.
예상보다 빠르다.
저 속도라면 위상이 소멸하기까지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일주일이란 낙관적인 예측이 어긋나 버렸다.
명백한 죽음을 목격하니 회로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삶의 끝에 선 인간의 감정이란 걸까?
-가하란. 소멸이 다가오고 있다. 멍청히 누워 있는 채로 끝날 거냐?
“……어떻게 됐어?”
쥐어짜는 목소리였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는 건지, 가하란은 눈을 감은 채 거칠게 호흡했다.
-거인의 손이 우릴 보호하고 있다. 네가 움직인 거냐?
“모르겠어. 다만, 괜찮을 거란 목소리는 들었어.”
-카트시였나?
“그것도 모르겠어. 단어를 생각해내는 것조차 힘들어. 머리 안쪽이 엉망이야.”
-머리뿐만 아니라 네 몸 상태도 엉망이다. 양손이 검게 탔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나?
숯처럼 탄 손이 살짝 움직였다. 신경이 손상된 건 아닌 듯했다.
-윈테의 예측이 틀렸다. 주변 모든 게 빠르게 사라지고 있어. 한 시간 후면 이곳도 없어질 거다.
“그래?”
-나야 이곳에 종속돼 있으니 피할 수 없지만,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살아야지.”
-어떻게?
“글쎄.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떠오르지가 않네. 잠깐만, 잠깐만 쉴게.”
비트.
만상(萬象)의 집약체.
로키는 비트에 접촉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처리 불가한 정보가 기억 단자를 비집고 들어왔다.
물질에 간섭할 수 있는 정보량. 지식으로 된 폭발물이나 다름없었다.
가하란은 그런 비트를 분 단위로 붙잡았고, 심지어 내부를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살아 있는 게 기이할 정도였다.
허용 용량이 얼마나 크기에 지식의 범람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걸까?
윈테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가하란 역시 다른 의미로 괴물 같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로키!
보라색 점이 눈앞을 오갔다.
-아직 작동 중이군. 하늘석이 추락하면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통제실은 거인의 손에 의해 보존되고 있지만, 하늘석 다른 곳은 쩍쩍 갈라져 무너지고 있었다.
-단절이 연속적으로 찾아오고 있지만, 아직은 버틸 만해. 패널 자체가 망가진 건 아닌 것 같아.
-올은?
-대답 없어.
-역시 소실된 회로는 복구할 수 없는 건가.
소멸은 다가오고 있고, 방법을 제시해줄 올은 침묵 중이었다. 가하란마저 정신을 못 차리고 있고.
-우린 죽는 걸까?
-그렇게 되겠지.
-난 정말 죽기 싫은데. 죽는 건 무섭단 말이야.
-너나 나나 위상에 붙들려 있는 허상에 불과하다. 사라진다고 해도 본류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겠지.
윈테의 말을 빌리면, 그래, 그림자에 불과하다. 가하란이 위상을 넘나들지 않았다면 자의식조차 찾지 못하고 끝났겠지.
-본류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중요하지.
-허상일 뿐이다.
-허상은 뭐 아무것도 못 느껴?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너는 노력했는데? 모든 게 공허했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넌 움직이지 않았을 거야. 넌 똑똑한 애니까.
-……결국 끝나는 건 변함없다.
보라색 점이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 죽는 건 싫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버텼는데. 저기요, 아무나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이 목소리가 들린다면 도와주세요! 아무나!
정신 사나운 목소리였다.
삶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녀석이었다. 체시가 불러온 멸망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도 집착 덕분일까?
잠깐만.
-너, 하늘석으로 정신체를 옮겼을 때 연결망을 이용했다고 했지?
-맞아.
-연결망은 비트에 약간이나마 간섭할 수 있었다고 했고.
-정확히는 연결망 자체가 비트에 기생하는 소규모 시스템이니까. 우리가 연결망을 이해 못한 것도 그 때문이고.
-너는 그 정보의 물결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소멸하지 않고?
-그야…… 난 겁쟁이니까. 아주 천천히 안전한 길만 찾아서 움직였지.
올은 말했다.
보안 시스템 외곽에 기생 중인 마운을 언제든 처리할 수 있었지만, 노력이 가상해서 내버려 두고 있다고.
신의 창조물 안으로 파고든 아이.
-가하란, 비트 안에서 뭘 봤지? 뭘 봤기에 켈트의 손이 움직인 거지?
“물고기.”
-뭐?
“물고기를 봤어. 거기가 바다였을까? 바다였으면 좋겠네.”
-……자고 있어라. 도움이 안 되는군.
“답이 있었어. 아니,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물고기는 뭔가를 알고 있었어.”
헛소리 같지만 켈트의 손이 움직였다는 점에서 무언가 있는 것이다.
-마운.
-왜?
-가하란이 본 걸 네가 보고 와.
-될까? 무서운데.
-싫으면 가만히 있어도 된다. 어차피 우린 끝날 예정이니까. 발버둥 쳐도 살아남게 되는 건 이놈뿐.
기계 안구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그렇다. 어떤 노력을 한들 위상에 종속된 자들은 벗어날 수 없다. 경계 면을 넘었을 때처럼 끝내 사라지겠지.
보상받을 수 없는 노력.
그럼에도 움직이고 싶었다.
-예견된 종말. 피할 수 없는 끝. 이런 게 운명이라면 난 대들어보고 싶다.
-누굴 위해서?
마운이 되물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린 증명해야 해. 줄의 창조품은 완벽하다는 걸.
-완벽.
보라색 점이 가하란 곁으로 다가갔다.
-근데 가하란이 본 걸 내가 어떻게 엿보고 올까? 비트는 너무 넓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로키는 르 3호를 움직여 가하란 바로 옆까지 갔다.
-가하란.
“왜?”
-다시 한번 비트를 잡아라. 잠깐이면 된다. 그 사이, 마운이 네가 봤던 걸 인식하고 올 거다. 그러면 무언가 방법이 생기겠지.
“그래?”
-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 재접촉이 네 몸에 가져다줄 부담은, 아마도 상상 이상이겠지.
“……버티는 건 내 전문 분야야.”
-가하란, 넌 정말 지독한 놈이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에 든다.
가하란의 등을 밀었다. 힘겹게 상체를 세운 가하란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새카맣게 탄 손바닥이 다시금 꿈틀댔다.
“로키.”
-왜?
“고마워.”
-내 존재 증명을 위한 도전이다. 실험체로써 사용하는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마운이 곁에서 맴돌았다.
-근데 어떻게 접촉하지? 가하란이야 직접적으로 비트에 접촉할 수 있지만, 난 지금 접근할 방법이 없는데.
-방법은 있다.
로키는 통제실과 분리해놨던 커넥터를 다시금 연결했다.
-날 중계기로 써라.
-나는 요령껏 도망칠 수 있지만, 넌 터질지도 몰라.
-한번 경험해봤다. 몇 초 동안은 버틸 수 있겠지. 그 안에 해결해라.
-몇 초라. 짧으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네.
마운이 커넥터를 타고 넘어오는 게 느껴졌다. 로키는 기계 안구를 가하란 팔에 감았다.
구석에 있던 원숭이가 이리저리 날뛰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정확한 건 몰라도 위험하다는 건 인지했겠지.
-떨어져 있어라. 죽기 싫으면.
가하란이 팔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버텨야 한다. 해내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말끔한 소멸뿐이니까.
-살고 싶다면 버텨라.
“최대한 짧게 끝내줘.”
가하란이 비트를 붙잡았다.
세상이 점멸했다.
로키는 밀려드는 정보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라져간다.
정보에 짓눌려 자의식마저 티끌이 돼 없어진다.
사고 체계가 단순한 데이터로 변해 정보 더미 속으로 편입되기 직전이었다.
로키는 보았다.
세상을 가득 채운 물고기들을.
자료집으로만 접한 바닷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보라색 점이 빠르게 치고 나갔다. 물고기 사이에서 스러져가는 가하란 옆을 지나, 혼자 도도하게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에 닿았다.
그 순간.
싸아아아,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밀려들어 바스러지는 듯한, 세상을 채웠다가 한 번에 비워내는 듯한 소리였다.
파직, 커넥터가 터져나갔다.
물고기들이 사라졌다.
시각 회로에 문제가 생겼는지 세상이 흑백으로 보였다.
실패한 건가?
마운은?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로키.
마운이 말했다.
-뭘 봤지? 회로 도면이었나? 아니면 위상을 열 수 있는 수단?
-아니.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러면 뭔데?
-……바다. 거대한 눈. 그리고 그게 이쪽으로 올 수 있게 알려줬어.
-뭐?
가하란이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였다. 기울어지던 몸이 허공에 붙들렸다.
로키는 시각 회로를 재빨리 수정했다. 색감이 찾아들고 초점이 돌아왔다.
명료해진 시계에 잡힌 건…….
-가하란,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근데 꼴이 말이 아니네?
새파란 눈동자를 가진 작은 거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