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00화 (400/558)

제400화

막대한 마나였다.

단순히 경로만 지정하는 감각기가 뜨겁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노출되면 인간 하나와 기계 하나는 먼지 단위로 분해될 것이다.

-줄이 이걸 봤다면 아주 좋아했을 텐데.

“실수하면 줄 곁으로 가게 될 거야.”

-그것도 나쁘진 않지.

“난 아직 가고 싶지 않거든?”

왼손을 살며시 움직였다. 마나가 범람하며 층과 층을 넘나들었다.

지정된 회로로 옮기는 작업조차 버거웠다. 성질이 난 말을 고삐도 없이 진정시켜야 하는 상황. 문제는 말이 한 마리가 아니라 수천, 수만 마리라는 점이다.

파식!

로키의 본체 쪽에서 소리가 났다. 정확히는 통제실과 연결된 커넥터 쪽이었다.

-인간의 비유를 빌리자면, 아주 잠깐 천국에 다녀왔다.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상황은?”

-네가 유도한 마나를 안정화시키고 있다. 견고한 회로라 수없이 역류가 일어나도 버텨내고 있어.

강철 거인에 옮겨져 있던 마나를 하늘석 중심으로 이동시켰다. 전송탑이 받아들인 마나가 저장되는 공간이었다.

“여기서부터 회로 전체로 분사할 거야.”

-마나가 회로에서 그치지 않고 통제실로 넘어올 수도 있다.

“그렇게 안 되도록 최대한 진정시켜 봐야지.”

마나 이동이 시작될 때였다.

하늘석 내부가 잘게 흔들리더니, 이내 쾅 폭음이 들려왔다.

“전송탑인가?”

-12번이 날아갔다.

“살짝 역류했을 뿐인데.”

긴장감이 배를 쥐어짰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시름시름 앓으며 쓰러질 것이다. 무사히 끝난다면…….

끽!

루루가 목덜미에 매달렸다. 통제실로는 잘 안 오는 녀석인데.

“너도 무섭겠지.”

짧은 꼬리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목을 통해 떨림이 전해졌다.

-가하란, 이대로 내부에 분사하는 건 위험하다.

“전송탑을 이용할까?”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질 거다. 아니, 아까처럼 폭발하겠지.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윈테가 남기고 간 마나를 다 소모하고 나면 기다리는 건 소멸뿐이야.”

-하긴, 뒷일을 생각할 여유는 없군.

가하란은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빛 선을 붙잡았다. 윈테가 남긴 마나가 저항하며 날뛰었다.

“7번과 8번으로!”

연이은 폭음이 귀를 강타했다.

거병을 타고 날뛰어도, 덩치 큰 마수들이 내리쳐도 꿈적 않던 하늘석이 갈라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날려 보내야 한다.

4번과 5번 전송탑으로 마나를 유도했다. 맹수처럼 달려든 마나가 전송탑을 통해 분출됐다.

회로 안을 휘젓던 황금색 선이 얇아졌다. 여전히 강대한 힘이 담겨 있지만,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제부터는 섬세함이 필요해.”

-나만큼 섬세한 기계도 없지.

“A1부터 시작할 거야.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나도 알 수 없어. 반사되는 신호가 있다면 체크해두고 신호가 소멸되면, 그쪽을 중점적으로 살펴봐.”

-예측대로 붕괴로 인한 회로 소실이라면?

“그땐…… 밥이나 먹자.”

회로 자체가 소실됐다면 수복은 불가능하다. 소실된 회로가 만약 올의 정신을 관장하는 영역이라면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거대한 마나의 줄기를 회로 안쪽으로 이동시켰다. 세심하게 분류해 지엽적인 회로로 마나를 뿌리는 건 로키가 담당했다.

같이 거병을 만들며 지겹도록 손발을 맞춰왔다. 척하면 척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하란은 로키와 작업하며 알게 됐다.

“로키.”

-말할 정도의 여유가 있나?

“여유는 없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뭐지?

“몸을 빼앗고 난 후에 넌 뭘 할 생각이었어?”

-본류에 있는 로키를 대비할 생각인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순수한 호기심이 더 커.”

-그거라면 너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말했다.

“말했다고?”

제어하지 못한 마나가 하늘석 내부를 휘젓다가 돌출됐다.

통제실 바로 옆. 휴게실 하나가 녹아 사라지는 걸 가하란은 똑똑히 보았다.

-극소량이 빠져나갔는데 이 정도군.

“한번 삐끗하면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다시금 집중했다.

손안에서 날뛰는 마나를 어르고 달랬다. 비트를 손으로 쥐었을 때처럼 손바닥이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비트보다는 덜 아팠다. 통증도 익숙해지면 무뎌지는 법이었다.

-작은 별을 보고 싶었다.

로키가 말했다.

“그렇게 말했었지.”

-육체를 얻고 싶었다. 비단 나 혼자만의 욕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린 보고 싶었다. 줄리어스가 보는 세계를. 필터가 아닌 나의 눈으로, 나의 감각으로 인식하고 싶었다.

“본류의 로키도 너와 같은 마음일까?”

-모른다. 그곳의 로키와 난 전혀 다른 개체일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다.

“변하라고 강요한 적은 없어.”

미소 지으며 시그니처를 확장시켰다. 짜맞춤으로 구성된 회로가 윈테의 마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혈관을 내달리는 피처럼, 윈테의 마나는 회로 곳곳을 누볐다.

전방위적으로 분사된 마나.

극소량의 마전기로 단자 하나하나를 점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작업 속도였다.

“본류의 로키는 인간의 몸을 얻었어. 줄리어스가 보던 하늘도 그 눈으로 봤겠지. 로키는 만족했을까?”

-우리의 향상심은 그침을 모른다. 하나를 얻었으면 다른 하나를 위해 움직이지.

“만약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

-만약이란 없다. 난 그저 보고 싶을 뿐이었고, 그 이후는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의 몸을 입게 된다면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쿠웅, 하늘석이 크게 흔들렸다. 루루가 겁에 질려 낮게 울었다.

“반응은?”

-막히는 영역이 없다. 이전에 확인 못한 구역까지 힘이 전달됐는데, 여전히 끝이 안 보여.

“이 정도의 에너지로도 회로 전체를 훑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가.”

회로의 방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뒤가 없는 작업이었다. 올을 깨우지 못하면 소멸하는 세계와 마주해야 한다.

-조심해!

갑자기 로키가 소리쳤다.

외침과 동시에 착안이 일그러지는 선을 발견했다. 통제실 상부였다.

배터리를 사용했다. 의족이 바닥을 밀어내며 몸이 뒤로 밀려났다.

반동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 등이 벽에 부딪쳤다. 격한 숨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얼얼한 통증이 등 전체로 퍼져나갔지만,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상부를 비집고 나온 마나가 일직선으로 통제실을 관통했다. 탈로스와 비견될 만큼의 고강도 강철이 붉은 쇳물로 변해 뚝뚝 떨어졌다.

지독한 열기가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갈 뻔했군.

“여기도 이젠 안전 구역이 아니야.”

말하다가 루루가 떠올랐다. 다행히 가슴팍에 매달려 있었다. 뒤로 몸을 날릴 때 이동한 모양이다.

둥그스름한 루루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자리로 돌아갔다. 뚫린 바닥 사이로 정체불명의 배관이 보였다. 다행히 배관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이번엔 머리 위쪽이었지만 다음은 어디일까. 사방에서 터져 나온다면…….

-가하란.

로키가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침착한 목소리였다. 차분함보다는 불길함이 연상되는 음성.

-되돌아오지 않는 신호를 찾았다.

로키가 불러준 단자를 향해 재빨리 손을 움직였다.

로키가 가리킨 곳을 찾았다.

비어 있었다.

회로 결손이다.

-JPS 38 레이어를 기점으로 연결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 끝이군.

끝.

가하란은 텅 빈 공간을 바라봤다. 인체로 치면 장기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이다. 문제는 그게 뇌인지, 심장인지, 간인지 알 수조차 없다는 점이다.

아니, 장기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소실 영역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끝.

상황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하고 명료한 말이었다.

-회로 도면이 있어도 수복을 장담할 수 없다. 근데 우리 손에는 아무것도 없군.

방향을 잃은 마나가 제멋대로 분사됐다. 여기저기서 위험한 소리가 났다.

로키와 통제실을 연결하던 커넥터가 떨어져 나갔다.

-하늘을 보고 싶다. 꽉 막힌 여기보단 하늘 아래가 낫겠지.

소실된 회로가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 없다. 알지 못하는 걸 어떻게 건들 수 있을까.

회로는 정직하다. 있음과 없음의 교차를 정합적으로 늘어놓았을 때 올바르게 기능한다.

무작위로 배열해서 운 좋게 올이 기동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회로는 정직하기에…….

“손쓸 방법이 없지. 알지 못하니까.”

-그래. 이제 포기해야 할 때다. 억울하지는 않겠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으니까.

“아니. 말했잖아, 난 더 살고 싶다고. 더 살아야 한다고.”

-네가 말했듯 방법이 없다.

“내 안에는 없지. 물론 너한테도 없을 테고. 하지만 모든 해답이 내 눈앞에 있긴 해.”

가하란은 양쪽 착안을 모두 열었다. 시그니처로 불러낸 회로 사이로 주황색 비트가 보였다.

-뭘 할 작정이지?

“모르면 물어봐야지.”

-누구에게?

“신에게.”

가슴팍에 붙어 있는 루루를 떼어내 로키 본체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도박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이었다. 자살행위라 표현하는 것도 겸연쩍다.

붙잡는 것만으로도 신체가 타들어간다. 접촉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부를 들여다본다면, 육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하는 것 외에는 옵션이 없으니까.

“로키. 루루가 날뛰지 못하도록 붙잡아줘.”

-뭘…….

로키의 대답은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

비트를 붙잡고 착안으로 해석하려 드는 순간 머리가 멈춰버렸다.

온전히 본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망막에 뚫고 들어온 정보 대다수는 뇌라는 필터에 의해 걸러진다. 익숙한 건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무시하며, 시점 바깥에 있는 것도 무시한다.

거르고 걸러 필요한 정보만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의식 영역 밖에서 이뤄지던 뇌의 작업이, 지금 멈춰버렸다.

보고 있는 모든 것이 인식됐다.

압도적인 정보량에 통증조차 뇌가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바닥이 지져지고, 팔에 살얼음이 끼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쌓여간다.

해석할 수 없는 ‘무엇’이 쌓여간다.

사고가 흐릿해진다. 인간이 아닌 정보의 저장체로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알아차려?

전신을 관통하는 격통이 시작됐다. 몸 안에서 번개가 치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이 되레 반가웠다.

의식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산재한 정보 속에서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신호를 잡아냈다.

고개가, 어깨가, 팔이 다시 움직였다. 통제권을 되찾아왔다.

사고를 정지시키던 정보의 흐름이 단절되며, 한순간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눈앞으로 물고기 떼가 지나갔다. 왜 하필 물고기인지, 알 수는 없었다.

형상화된 정보를 멀거니 지켜봤다. 황홀한 경험이었다. 모든 게 이해되고, 모든 걸 수용할 수 있다.

이곳이야말로 모험가들의 이상향이었다. 이 안을 탐험하고 다니면 행복의 정의도 알게 되리라.

하지만 응시해야 할 건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잠깐 사라졌던 고통이 찾아들었다. 수백 개의 망치가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안에서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때였다.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안원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상상했던 것이 실현되던 세계.

사슴은 말했었다. 그건 상상이 아닌 근원의 발현이라고.

거병의 팔을 만들어내던 감각을 되새김질하며 물고기 떼를 바라봤다.

잡아 올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걸?

한순간 물고기 떼가 갈라졌다. 직선으로 난 길 끝에, 푸른색 물고기만 남아 있었다.

저거다.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 거리지만 분명 닿을 것이다.

거리가 사라지고 물고기가 눈앞에 놓였다. 잡기만 하면 된다.

-가하란!

로키의 외침이 귀를 파고들었다.

눈앞 풍경이 바뀌었다. 몽환적이던 물고기 떼는 사라지고, 처참한 몰골의 통제실이 보인다.

정보의 선이 뒤틀리고 있었다.

마나 역류다.

-막을 수 없어.

가시화된 마나가 통제실 벽을 비집으며 나왔다.

어떤 물질로도 눈앞으로 달려드는 마나를 막아낼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손을 움켜쥐었다.

비트로 연결된 끝자락에, 손아귀에 들어온 물고기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넌 괜찮을 거라고.

그 순간 통제실 바닥이 갈리며 다섯 개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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