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갑작스러운 작동 중지. 어쩌면…….
“올의 주요 시스템 중 일부가 소실됐을 수도 있어. 붕괴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알 수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염두에 둬야겠지.”
하늘석으로 돌아와 대책을 논의했다. 올이 갑작스럽게 정지한 것도 위상 붕괴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회로 수리는 힘들 것이다.
-작업을 중단하는 건가?
“아니. 해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위상을 열려면 올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붕괴. 이곳에 종속된 난 소멸을 피할 수 없군.
“그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눈앞에 들이닥치니 느낌이 달라. 충동적인 행동이 왜 벌어지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르 3호가 움직였다. 통제실로 향하는 로키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담담한 로키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본류의 로키와 이곳의 로키.
같지만 전혀 다른 개체.
기계도 인간과 똑같았다. 환경이란 요소가 많은 걸 바꿔버린다. 본류에 있는 로키도 대화를 통해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유단의 몸을 빼앗은 로키는 선을 아득히 넘어버렸다.
덴스의 죽음은 시작일 것이다. 로키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으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사용할 터였다.
그게 생명 하나로 끝날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목숨이 사라지게 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진행한다. 이건 기계다운 면일까요, 아니면 인간다운 면일까요? 로키는 기계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또 다른 지성체라 불러야 할까요?”
윈테가 말했다.
“인간도, 기계도 아닌 그저 로키의 성격이겠죠.”
가하란은 감각기를 끼며 통제실로 걸어갔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 시스템 복구에 총력을 기울여야겠어요. 훈련은 중지할게요.”
“그렇게 해요. 전 주변 정리와 좀 더 먼 곳까지 살펴보겠습니다. 붕괴 징조를 발견하면 알려드리죠.”
“부탁드리겠습니다.”
윈테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통제실 중앙에 앉아 지난 2년간 수없이 뜯어본 회로를 다시금 불러냈다.
-위상이 사라지고 나면 넌 어떻게 되는 거지?
“위상과 위상 사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어. 이곳은 그렇게 변할 테고 난 텅 빈 곳을 방황하게 되겠지.”
-소멸하는 게 차라리 낫겠군.
“그럴지도.”
-4A252S 5층. 29283번. 거기서 시작하면 된다. 난 다른 레이어를 확인할 테니.
이제 말은 필요 없었다.
회로를 감별할 눈과 조정할 손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전 단자 반응을 확인해 볼게요.
마운이 작게 속삭였다.
물고 늘어진다고 해서 결과가 나오는 작업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상을 반복한다. 설령 멸망이 목전에 도달했더라도.
때론 변칙보다는 꾸준함이 진리로 가는 길이다. 케케묵은 격언을 되새김질하며 손가락을 놀렸다.
* * *
“사라졌어요.”
윈테가 가져온 소식이었다.
“하늘석을 기준으로 큰 원을 그리면 이해가 쉽겠군요.”
허공에 나타난 적색 원 바깥을 윈테가 가리켰다.
“반경 40km. 그 바깥은 이미 사라졌어요. 지금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요.”
-하늘석이 중심이라는 건…….
로키의 기계 안구가 가하란을 향했다.
“그간 가하란이 경험해온 바에 의하면, 가하란이 위상의 중심점이겠죠. 외부부터 서서히 소멸해 결국 가하란이 딛고 서 있는 한 줌의 토지까지 사라지고 나면…… 그 뒤는 아무것도 없겠죠.”
윈테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완전히 소멸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은 거죠?”
“확인한바, 이대로라면 일주일 정도? 더 앞당겨질 수도 있고 미뤄질 수도 있어요.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으니까요.”
윈테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경계면이 생겨났다. 처음 생성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었다.
“올은 위상 연결이 가능했다고 했죠?”
“네. 비트가 안쪽을 가로지르며 다른 곳과 연결됐어요.”
“나도 비트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그러니 착안의 사용자인 가하란과 이해자인 올만이 위상 연결을 제대로 이뤄낼 수 있겠죠. 가하란, 이곳으로 왔을 때는 어떤 방법을 사용했죠?”
가하란은 나타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간추려 설명했다.
“카트시가 매개물이 됐겠군요.”
“하늘석의 이동 경로도 중요했어요.”
“동일 위상을 살피기 위한 움직임이었을 거예요. 그때 간섭이 일어났고, 가하란은 그걸 이용했겠죠. 물론 확실한 건 아니에요. 하늘석의 위상 이동과 제가 하는 방식은 엄연히 다르니까.”
“결국 하늘석이 재기동해야 답이 생기겠군요.”
일주일.
가하란은 윈테에게 부탁했다. 소멸 중인 지역까지 데려가줄 수 있겠냐고.
“어렵지 않죠.”
윈테와 함께 격납고를 나섰다.
몸이 붕 떠올라 윈테 뒤쪽에 위치했다. 어, 하는 사이 풍경이 뒤바뀌고 있었다.
발밑에 놓인 숲들이 빠르게 뒤로 밀려난다.
“저깁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고 앞을 바라봤다.
멸망이란 단어가 어떤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지, 가하란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라지고 있다. 난생처음 보는 현상이었으나 이질적인 느낌은 없었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어둠 저편으로 스러져가는 게 당연해 보였다.
착안으로 소멸하는 곳을 바라봤다. 얼기설기 엮인 선들이 가닥가닥 해체돼 사방으로 흩뿌려지고 있었다.
에너지, 힘은 남아 있었다. 단지 구조가 붕괴할 뿐이었다.
“막을 수 없겠네요.”
보면 방도가 생각나지 않을까, 어설프게나마 가졌던 희망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붙들어 둘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태풍이 오면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고, 화산이 폭발하면 도망쳐야 한다.
도망칠 곳이 없다면?
“돌아가죠.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어요.”
“저는 사과나무를 심어야겠군요.”
“사과나무요?”
“어쩌다 들은 말이 있습니다. 멸망을 앞뒀으면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더군요. 아니지, 이런 뜻이 아니었나?”
해맑게 웃는 윈테였다. 죽음 같은 건 그저 결과 중 하나일 뿐이라는 듯이.
초탈한 위대한 존재와 달리, 나는 살고 싶었다. 아니, 살아야 했다.
아등바등 끝까지 발악해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어차피 세상의 끝이 도래했으니 막무가내로 나가볼까요?”
“생각해두신 수가 있나요?”
“있죠. 단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하지 않았을 뿐.”
“뭐라도 해보죠. 세상이 끝나기 전에.”
윈테와 함께 하늘석으로 돌아왔다. 로키와 마운에게 작업 현황을 들었다. 레이어 몇 개를 점검했으나 달라진 건 없다고 했다. 올은 여전히 침묵에 빠져 있었다.
“전송탑으로 가죠.”
1번 전송탑 앞에 섰다.
윈테가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위상 연결을 할 때도 손가락만 까딱거리던 양반이 크게 제스처를 취했다.
무언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
“제가 가하란을 돕기로 했을 때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신의 최후가 남긴 현상을 해석하는 재미. 다른 하나는…….”
윈테의 시선이 가하란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그 배지.”
“배지요?”
지닌 소지품 중에 배지는 단 하나였다. 끈 달린 배지를 꺼내 들었다. 얇게 뜬 눈을 형상화한 배지.
협회의 증표였다.
“이걸 아시나요?”
“아니. 그 물건 자체는 알지 못해. 하지만 거기에 깃든 냄새는 잘 알고 있지.”
말투가 달라졌다.
윈테가 고개를 들었다.
“잘 살고 있나 보네. 아니면 아직도 헤매는 중인가? 인간에게 있어 정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그리도 질기고 질긴 것일까.”
깃든 냄새.
배지는 협회의 증표임과 동시에 마도사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나침반이었다.
그렇다는 건…….
“퀼비언을 아시나요?”
“그런 이름이었던가? 모르겠네. 이름으로 부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놈은 나한테 그냥 그놈일 뿐이야. 때로는 그 새끼, 때로는 실험체, 때로는 ‘커피를 두 번째로 잘 타는 놈’이기도 했고.”
윈테의 눈동자가 황금빛에서 시작해 온갖 색을 거쳐 이내 은빛으로 변했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그놈은 잘 지내고 있고?”
“모르겠어요. 만나본 적이 없어서.”
“뭐 하고 사는지는 알고 있어? 여전히 헤매고 있나?”
“마도사에 관한 건 자세히 몰라요. 언제나 추모길을 걷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래? 아직도 찾고 있나 보네.”
그때였다.
착안이 갑작스럽게 열렸다.
무수한 선들이, 막대한 정보가, 계측할 수 없는 힘이 사방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마나를 때려 넣을 거야. 일종의 충격 요법이지. 난 마법 공학을 잘 모르지만, 잠들어 있는 놈을 깨울 땐 패는 게 제격이라고 알고 있어.”
“네?”
“어차피 방법이 없잖아. 마지막 수단을 써보자고. 신은 말했지. 오래된 TV는 때려야 잘 나온다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도 몰라!”
두드드, 하늘석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안구 전체가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눈을 감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럴 순 없었다.
목격은 중요했다. 이 정도 규모의 정보 이동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너도 상당히 미친놈이구나.”
“뭐라도…… 건져야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등으로 훔쳐내고 윈테와 몰려드는 힘을 바라봤다.
“하늘석 안쪽, 아마 켈트한테도 힘이 전해질 거다. 그 몸뚱이라면 한동안 내가 유도한 마나를 붙들어 두겠지. 그 사이 네가 방법을 찾아내. 회로 전체에 마나를 폭사하든, 한곳으로 뚫어버리든, 아니면…… 뭐, 알아서 해라.”
콰아앙!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최대한 버티다가 마지막 순간에 고개를 틀었다.
빛은 금방 사라졌다.
저릿한 눈으로 윈테가 있던 곳을 살폈다. 윈테는 졸립다는 듯 하품을 크게 하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순간 착안으로 확인한 건, 측량할 수 없는 정보의 선이 온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광경이었다.
“마지막까지 즐기시다 가신 건가.”
괜히 웃음이 나온다.
죽음이란 게 이토록 가볍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저럴 수도 있구나.
위대한 존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것이 윈테라는 생명체의 개성인 걸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통제실로 돌아와 감각기를 손에 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 마나 센서가 오작동을 일으킨 거 같은데.
“오작동 아니야. 윈테가 마지막 원동력을 남겨 주고 갔어.”
-드래곤이?
“뭐가 됐든 이걸로 길을 찾아봐야 해. 우리한테 남겨진 마지막 수단이야.”
시그니처를 불러왔다.
윈테의 힘이 관통하고 지나간 회로가 눈에 보였다.
마나 역류를 일으켜 회로가 불타 버리고도 남을 힘이었는데, 하늘석의 시스템은 버텨주었다.
신의 창조물.
놀라울 정도로 견고했다.
-어떻게 할 거지?
“저장된 힘을 회로 전체에 균등하게 뿌려볼 거야. 신호를 살피면 오류가 난 단자를 찾아낼 수 있겠지.”
-붕괴로 인해 완전히 소실된 상태라면? 신호 자체가 되돌아오지 않을 텐데.
“그땐…… 사과나무나 심어야지.”
-사과나무? 그게 무슨 뜻이지?
“나도 몰라.”
눈앞을 빼곡히 채운 선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보조를 부탁할게.”
-측정 불가한 마나가 흘러 들어왔다. 유도를 잘못하면 네 몸뚱이가 타버릴 거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널 믿어야지.”
-날 믿나?
“내 몸이 다 타버리면 빼앗을 육체가 사라지잖아? 그러니까 잘 부탁할게.”
-……그렇군.
가하란은 고개를 내렸다.
통제실 바닥.
강철 거인에게 전달된 윈테의 힘을 끌어당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