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기다란 혀가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허옇게 솟아난 돌기에 눈을 찌푸리며 젖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날개 달린 두꺼비가 다시금 날아오르려 했다. 거리를 벌릴 생각인가.
가하란은 왼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붉게 달아오른 날이 놈의 눈을 관통했다.
긴 비명이 이어졌다. 길게 내뺀 혀를 사방으로 휘두르는 마수였다.
오른손에 손도끼를 쥐고 의족에 부착된 배터리를 분사했다. 몸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채찍처럼 휘두르는 혀 사이로 파고들어 놈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가냘픈 날개가 부르르 떨리다가 꺾였다. 주변을 할퀴던 혀도 축 늘어졌다.
“이것 좀 옮겨줘.”
후방에서 대기하던 르 7, 8호가 재빠르게 다가와 죽은 마수를 싣고 사라졌다.
단검에 묻은 체액을 닦아내고 날을 유심히 살폈다. ‘외력’이 붙들어놓은 마나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17초.”
지속 시간이 늘었지만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다. 칼날에 들러붙어 있는 외력이 속삭였다.
-붙잡아, 붙잡아, 붙잡아.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자 칼날에 있던 하얀 알갱이들도 사라졌다.
불가사의한 힘.
가하란은 윈테가 한 말을 떠올렸다.
“외력은 계가 생성해낸 힘입니다. 신의 손이 닿은 힘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뒤섞이며 새로운 형태가 된 거죠. 시작과 끝인 마나와는 별개의 힘. 그러면서도 마나와 친밀한 힘.”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 격납고로 돌아갔다.
“몸풀기는 끝났나요?”
윈테였다. 루루를 공중에 띄운 채 놀아주고 있었다.
“적당히 풀었어요.”
“그러면 시작해 보죠.”
기계 인형이 옮겨둔 마수 사체가 떠오르더니, 한순간 분해됐다. 고깃덩이는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지고 마나가 담긴 뼈 한 조각만 공중에 남았다.
“1시간 내로 끝낼 수 있겠죠?”
“최선을 다해볼게요.”
7m 정도 떨어진 거리에 마수의 뼈가 있었다. 가하란은 착안을 열고 곧게 뻗어나가는 단단한 줄을 상상했다.
마나와는 다른, 인식한 후에는 보다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외력이 오른손 끝에서 뻗어 나왔다.
흰 알갱이들이 일렬로 늘어서며 이미지한 대로 줄을 만들어갈 때였다.
눈동자를 살짝 내렸다. 왼쪽 발밑에서 느낌이 왔다. 감지한 순간 몸을 움직였다.
파악!
왼발이 위치한 곳에서 돌로 된 창이 튀어나왔다. 멍청히 서 있었으면 발등이 꿰뚫렸을 것이다.
집중력이 분산됐다. 신경을 빼앗기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외력이 구심력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수의 뼈를 향해 나아가던 힘이 약해진다. 토대를 다시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손끝에서 멀어진 외력은 포기하고 몸과 가까운 외력에 집중했다.
기초 공사는 튼실하게 해놨다. 손끝에 밀집한 외력은 잠깐 한눈을 팔아도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세를 다시 잡고 착안으로 주변을 살폈다. 윈테가 힘을 쓰는 순간, 정보의 변화가 감지된다.
알아챈 순간 움직이면 피할 수 있다. 윈테는 회피 불가능한 공격은 하지 않으니까.
윈테 주변에 선들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온다.
이번엔 등 뒤였다.
보이지 않는 공기의 칼이 떨어져 내렸다. 살짝만 움직여서 피하기에는 범위가 넓었다.
어쩔 수 없이 바닥을 굴렀다. 땅이 깊게 파이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긴장감에 입안이 말라갔다.
피하는 것에 전념하면 외력을 다루지 못한다. 외력에 집중하면 몸이 굼떠진다.
반박자 늦게 대응하는 순간, 아찔한 격통이 몸을 때릴 것이다.
윈테는 공격을 도중에 거두지 않는다. ‘안전한 훈련은 의미가 없다’는 참으로 대단한 논리에 의해…….
푸욱!
발밑이 꺼졌다.
잡생각 할 겨를도 없었다.
몸을 살짝 띄우며 윈테를 바라봤다. 느긋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찻잔은 언제 가져온 걸까.
“1시간 내로 끝낼 수 있는 거 맞겠죠?”
“좀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대답할 여유가 있나 보군요.”
아차 싶었다.
공격의 간격이 더욱 짧아졌다. 정보 변화를 잠깐이라도 놓치게 되면 침상에 누워 끙끙 앓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되리라.
왼쪽 손목에 감은 시동키를 가동했다. 거병이 아닌 기계인형 르에 연결된 시동키.
7, 8호가 격납고 안쪽에서 뒤뚱거리며 나왔다. 목표에 다가갈 수 없다면 가지고 오면 된다.
르 7호가 팔을 길게 뻗어 허공에 뜬 마수 뼈를 붙잡았다. 윈테는 방해하지 않았다. 허용하겠다는 뜻이다.
손끝에 맺힌 외력을 유지한 채, 첫눈 맞은 개처럼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기계인형을 조종했다.
열감으로 휩싸인 착안보다 머리 안쪽이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중심을 잠시 놓쳤고, 대가는 호되게 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몸이 반으로 접혔다. 복부를 가격한 흙으로 된 손이 가루가 돼 사라지고 있었다.
멍울처럼 맺힌 탁한 숨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만둘까요?”
하마터면 예, 라고 대답할 뻔했다.
쇠 맛이 입에 감돌았다. 바닥을 구르며 연이은 공격을 피하고 혀 아래 고인 피를 뱉어냈다.
송곳니가 흔들리는 거 같은데.
달아오른 피를 게워내서 그런 걸까. 머리가 살짝 식었다. 외력은 형태를 잃지 않았고, 기계인형도 명령을 수행 중이었다.
끝이 보인다.
아껴뒀던 의족의 배터리를 사용하며 가속했다. 마수의 뼈와 거리를 좁혔다.
3m까지 접근했을 때 지면이 솟구쳤다. 석벽이 마수의 뼈를 가렸다.
외력이 벽을 관통하지 못했다. 윈테가 방해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생각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직선만이 답이 아니다. 곧게 뻗어간 외력을 하늘로 솟구치게 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외력이 마수 뼈와 연결됐다.
이제 마수 뼈에 남은 마나를 외력으로 끄집어내면 된다.
세밀하게 상상했다. 잡을 수 없는 마나를 외력으로 붙잡아 끄집어낸다.
콰드득.
뼈가 으스러지며 가시화된 마나가 대기 중으로 분사됐다. 초록빛 에너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가하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잊고 있던 통증이 올라왔다. 배를 감싸 쥐며 옆으로 누웠다.
“훌륭합니다.”
윈테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눈동자는 황금빛이었다.
“조악하지만 외부 마나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게 됐어요. 계속하다 보면 다른 접근법도 생겨날 겁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격하시던데.”
입에 고인 피를 다시 내뱉었다. 색이 검붉었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네?”
용.
시간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가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윈테가 다가와 배에 손바닥을 댔다. 가하란은 기겁하며 외쳤다.
“그거 안 하면 안 될까요?”
“빨리 낫는 게 좋죠.”
“그건!”
늦었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통증이 점차 줄어들었다. 입에 감돌던 비릿한 쇠 맛도 사라졌다.
그리고.
의욕도 사라졌다.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고, 움직이는 것도 싫다. 숨 쉬는 것도 가능하다면 그만두고 싶을 정도였다.
“차라리 아픈 게 나아요. 무기력한 건…… 아니, 됐어요. 다 귀찮아요.”
“조금만 참아요. 체력이 회복되면 괜찮아지니까.”
아.
그냥 자고 싶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 *
눈을 떠보니 호수였다.
가하란은 목을 주무르며 상체를 세웠다. 끔찍한 무력감은 사라진 후였다.
상처를 낫게 하는 마법.
편리한 마법 같지만, 상처 회복에 모든 기력을 쏟아붓기에 치료 중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윈테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상처는 치료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피시술자의 다양한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치료 행위라 치유 범주를 넘어서는 상처에 마법을 쓰면 그 순간 기력이 다해 사망한다고 한다.
“깼습니까?”
윈테가 다가왔다.
“여긴…….”
“부유석이 이 위를 지나갔을 때 공간 도약이 가능했을 겁니다.”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벨 프렌트가 발견한 방법.
“왜 하필 이곳인지, 짐작되나요?”
“어느 정도는요.”
윈테는 이렇게 말했었다.
‘저는 그림자조차 아니었어요. 내려가 보니 몸이 없더군요.’
이곳까지 데려와 얘기를 꺼냈다는 건, 이 아래 정신체가 아닌 본체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본체는…….
“제 몸은 정말 비효율적이죠. 육체를 일깨우려면 인간의 시간 기준 70년 정도가 소모됩니다. 일깨운다고 끝이 아니죠. 적응도 해야 하니 한 100년은 잡아야겠죠.”
기상하는 데 100년이 필요한 생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죠.”
“예?”
“만나고 싶다고 했잖아요, 드래곤을.”
윈테가 앞장섰다. 호수에 발을 담그자마자 물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가하란은 양옆으로 늘어선 물의 절벽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신을 친구라 부르는 존재.
제국은 용이 근처에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근처에 성도를 건설하지 않았겠지.
젖은 흙을 밟으며 밑으로 내려갔다.
깊게, 깊게.
하늘이 까마득하게 멀어 보인다고 생각이 들 때쯤, 윈테가 멈춰 섰다.
“이쪽으로.”
호수 밑에 동굴이 있었다.
가하란은 수십 m에 달하는 입구를 상상했다. 거대한 용이 드나들려면 분명 커야 할 테니.
하지만 윈테가 가리킨 동굴 입구는 3m 남짓했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천장이 발아래 있었다. 주변 풍경이 제멋대로 휘었다.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지, 땅으로 꺼지는지, 위로 솟구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등만 보고 따라와요.”
윈테의 안내 없이 이곳에 들어오면 죽는다.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기록 보관서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적어도 방향은 찾을 수 있었으니까.
휘몰아치던 풍경이 한순간 제자리를 찾았다.
정적이 감돌았다.
가하란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몸을 웅크린 거인이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질감.
하지만 눈앞에 있는 건 실존하는 용이 아니었다.
“……환상체군요.”
그림자의 그림자.
가하란은 윈테를 바라봤다.
환상체가 만들어낸 정신체. 독립 상태라 힘이 제약됐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본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시간이 없다고 했죠?”
“아, 네.”
“저걸 봐요.”
윈테가 거인의 발끝을 가리켰다. 흙으로 된 발이 약간 흐릿해진 상태였다.
“가하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경험해보지 못한 위상 분열 때문에 아주 단순한 걸 망각하고 있었죠.”
흐릿해지는 환상체.
가하란은 고개를 홱 돌려 윈테를 바라봤다.
“위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요.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버틸지도 모르죠.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겹침 세계가 사라진다.
하나의 온전한 위상이라 여겼던 공간이 붕괴 조짐을 보였다.
“시작은 환상체일 테고, 그다음은…….”
윈테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물질도 해체되겠죠. 이곳에 종속된 모든 것이 사라질 겁니다. 가하란, 당신만 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