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점심은 샌드위치였다. 윈테가 구해온 호밀로 만든 빵. 식감은 거칠지만 구수한 맛이 좋다.
빵을 우물우물 씹을 때였다. 뒤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후드를 눌러썼다.
먼지바람이 불어닥쳤다. 반쯤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쑤셔 넣었다. 충격파를 동반한 폭음이 세 번 정도 이어졌다.
끝난 건가.
가하란은 머리를 슬쩍 들고 뒤쪽을 바라봤다. 뽀얗게 솟은 먼지구름 위를 윈테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윈테가 크게 손을 휘두를 때마다 먼지구름이 걷히며 폭사한 마수 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습니다.”
윈테가 등 뒤에서 솟아났다. 공간 도약도 수없이 경험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점심이 담긴 바구니를 건네고 단검을 챙겼다. 뼈를 담은 자루도 같이.
하늘석 밑.
죽은 마수들 사이를 오가며 뼈를 채취했다. 외피를 가르고 살을 비틀어 뼈를 수거한다.
금세 자루가 묵직해졌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또 한바탕 오겠네.”
구름 모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얼마 전 내린 눈이 다 녹지도 않았는데.
가하란은 하늘석 동산 위에서 차를 즐기는 윈테를 바라봤다.
윈테가 합류하고 두 달.
기괴한 존재와의 생활이 꽤 익숙해지고 있었다.
* * *
“어때?”
-진전은 없다.
“작업한 거 넘겨줘. 내가 이어서 할 테니까.”
로키에게 연결된 커넥터를 떼어냈다. 로키는 르 3호에 몸을 실은 채 휴게실로 갔다. 하늘석 시스템 복구 작업은 기계조차 지치게 한다.
윈테와 만나고 난 후, 로키에게 숨겨뒀던 것들을 대부분 말했다.
최초의 오토마타인 카트시에 관한 것도.
로키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정도로 놀라기에는 그간 겪은 일이 너무 많은 걸지도 모른다.
“잘 되고 있나요?”
윈테가 통제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왼손에는 망이 들려 있는데, 안에는 살아서 팔딱대는 생선이 들어 있었다.
“여전히 모르겠어요. 잘 되는 건지, 아니면 헛물켜고 있는 건지.”
“그 분야는 제가 도울 수 없으니 지켜만 봐야겠군요. 그보다 저녁에는 생선 요리 어떤가요?”
“좋죠. 근데 어디서 잡아 온 거예요?”
“주변 물가에는 환상체만 둥둥 떠다녀서 바다를 다녀왔어요. 거긴 살아 있는 생선이 있더라고요.”
바다.
올이 보여줬던 풍경이 다시금 떠올랐다.
“가보고 싶네요.”
“언젠가는 갈 수 있겠죠. 아니면 환상체가 되는 연습을 하거나.”
“둘 다 머나먼 얘기군요.”
시그니처로 불러온 회로를 하나하나 점검해 나갔다.
끝을 알 수 없는 회로의 세계.
올을 이루는 회로는 몇 개로 되어 있을까? 오류를 찾아내 수정하는 게 가능할까? 고친다고 해도 재기동이 될까?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으나 손은 흔들리지 않고 회로를 더듬어 나갔다.
고민할 시간에 단자 하나를 더 확인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윈테가 체스판을 펼치고 있었다.
“시간이 됐네요.”
“윈테가 오고 나서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요. 빠듯하게 시간을 쓴다는 게 이런 느낌이군요.”
“저는 한때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찰나를 머물다 가는 인간들이 이상할 정도로 시간을 낭비했으니까.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감각기를 벗고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바닥에서 의자가 솟아났다. 윈테가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했었다는 건…….”
“지금은 그들의 방식을 이해해요. 오히려 유한하기에 낭비하는 맛이 있는 거죠. 인간족들이 유흥거리를 수없이 발견해낸 것도 그러한 이유 아니겠어요? 체스도 마찬가지고.”
의자에 앉아 체스 기물을 정리했다. 흑백의 체크무늬가 눈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영토를 더욱 확장해보죠.”
일반 체스가 아닌 3각 체스.
아니, 이제는 3각 체스도 아니었다. 두 달 사이 체스보드가 더 넓어졌다. 이제는 층까지 생겨 공간 감각까지 대동해야 한다.
기본 16개의 기물을 정리한 후 한쪽에 추가될 32개의 기물을 일렬로 세웠다.
“자, 이걸 두르시고.”
윈테가 손에 감는 밴드를 던졌다. 거병의 시동키와 유사한 밴드. 손목에 밀착한 밴드를 매만진 후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시작할까요?”
윈테의 검은 폰이 움직였다.
가하란은 우측 끝에 있는 흰색 폰에게 집중했다. 폰이 파르르 떨리면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네요.”
윈테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꿈쩍 않던 때를 떠올리면 많이 좋아지긴 했어요. 하지만 보드가 열리고 신경 써야 할 기물이 많아지면 여전히 머리가 꼬이는 느낌이 들어요.”
“하다 보면 익숙해질 테죠. 가하란은 배우는 게 빠르니까.”
배우는 게 빠르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면서 두 달 전을 떠올랐다.
* * *
“올의 시스템 복구도 중요하지만, 가하란의 몸을 살피는 것도 중요해요.”
몸을 살핀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괜스레 목이 따끔거린다.
“도망치지 않아도 돼요. 그때 말했듯 전 이제 독립적인 상태예요. 가하란에게 문제 생길 일 없어요.”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겠죠. 윈테가 그럴 마음이 생기면, 전 목을 내놓아야 하니까.”
무력감도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아무렇지 않게 다가온다. 걱정해도 별수가 없는 일이라면 뇌는 걱정하는 행위 자체를 그만둬 버린다.
가하란은 통제실에서 빤히 쳐다보는 로키를 뒤로한 채, 윈테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격납고를 벗어나자마자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사냥을 안 했더니 저렇게 됐네요.”
가하란은 하늘석 밑을 보며 말했다.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일정 간격을 둔 채 으르렁대고 있었다.
저러다 한 놈이 발작해 하늘석 위로 뛰어들면, 다른 놈들도 달려들 것이다.
“가하란의 일과가 어떻게 되죠?”
“일과요?”
“하늘석이 낙하하고 근 2년간 이곳에서 보냈다고 했죠?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봐요.”
어려울 것 없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게 살아왔으니까.
설명을 들은 윈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사냥 후 복구 작업. 달에 한 번씩은 멀리 나가서 사냥. 마수를 치우는데 시간을 꽤 썼군요?”
“내버려 두면 걷잡을 수 없게 되니까요.”
“좋아요.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리죠.”
윈테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곧이어 ‘해결’이란 게 눈앞에 펼쳐졌다.
윈테의 손짓 한 번에 마수들이 터져나갔다. 지면이 솟아올라 마수를 삼켰고, 어디선가 내려친 푸른 번개가 마수를 태워버렸다.
수십 마리의 마수가 정리되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다시금 깨닫게 된다.
내 목숨은 용의 손끝에 달려 있구나.
“하늘석에 접근 못 하도록 도울게요. 대신 남는 시간을 저한테 주세요.”
“해부는 안 됩니다.”
“안 해요. 신체에 해가 되는 일은 일절 안 할 테니 염려 놓아요. 오히려 가하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윈테가 손목을 까딱거렸다.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던 마수가 우직, 형태를 잃고 찌부러지며 추락했다.
“가하란의 육체는 아주 특별해요. 마나를 감각하지 못했는데, 마나가 필요한 마법공학품을 사용하죠.”
가하란은 주머니에 꽂아 둔 감각기를 손에 쥐었다.
“한때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 이후 고민하는 걸 그만뒀죠.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그런 걸 연구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윈테를 바라봤다.
“가하란은 마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죠?”
“힘. 정보의 이동 통로.”
“인간이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은요?”
“직접 느껴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로는 많이 들었어요. 주변에 분포한 마나를 몸에 잠시 잡아두는 것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고.”
“그래요. 그게 인간이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죠. 잡아둔 채 신체를 이용해 발현하면 신체술, 잡아두고 심상 세계를 거쳐 발현하면 마법.”
윈테가 하늘에 대고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온갖 색깔의 빛이 대기에 맺혔다.
“이 모든 친구들을 통틀어 ‘마나’라 칭하지만 사실은 각기 다른 애들이죠. 인간들은 마나 대역이라고 부르고 있죠?”
“네. 특정 대역을 제대로 이용하는 게 모든 공학도의 꿈이죠.”
“인간이 마나를 몸에 받아들이면 대역 구분 없이, 가까이 있는 마나가 몸으로 이전되죠.”
다채로운 빛들이 가하란의 몸 주변으로 밀려들었다. 가시화된 마나.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봤다.
“제어된 상태라 문제없어요. 자, 한 번 만져봐요.”
망설임 없이 빛무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빛 사이로 손이 파고들었다.
출렁거리던 마나가 금방 잠잠해졌다. 손을 둘러싼 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머물러 있었다.
“바로 이거예요. 보통 인간이라면 마나가 침투했을 거예요. 감각 여부와 상관없이, 마나는 옮겨가는 성질이 있으니까요.”
윈테가 손을 천천히 움직여 보라고 했다. 개울가에 손을 찔러 넣고 움직이듯, 손가락을 살짝 벌려 빛무리를 훑었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마나들이 피부를 훑으며 지나갔다.
“마나는 힘, 정보의 통로, 삶이자 죽음. 신이 만들어낸 모든 창조물은 마나에서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가하란의 몸은 마나와 동화되지 않아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마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마나를 멀거니 지켜볼 때였다.
“이거였군요.”
윈테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경각심을 일깨우는 색. 광기 어린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하니 식은땀이 났다.
“방금 마나를 잡으려고 했죠?”
“네.”
“의식의 발현. 그 결과물이 가하란 손끝에 있어요.”
손끝?
손바닥을 앞뒤로 돌리며 손을 살필 때였다. 지문이 보일 정도로 집중하고 나니, 손가락 끝에 묻어 있는 작은 알갱이들이 보였다.
“이게 뭐죠?”
“좀 더 자세히 보세요. 착안이라면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
숨을 고르며 왼쪽 착안을 일깨웠다. 하얀 먼지 같던 알갱이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서 살폈다.
그러자 소리가 들려왔다.
-붙잡아, 붙잡아, 붙잡아.
하얀 개미였다.
그 옛날, 타챠의 제구에서 봤던 정령들과 닮아 있었다.
“정령?”
“아니요. 그건 정령이 아니에요. 마나죠.”
“예?”
“형태는 각기 다를 테지만, 가하란에게 익숙한 모양으로 보일 겁니다. 힘의 말단. 신의 의사를 전달하던 작은 거인들. 마나는 힘이죠. 힘은 머물러 있는 상태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아요. 힘에는 방향이 필요하죠. 그리고 방향의 정보를 닮고 있는 건…….”
-붙잡아, 붙잡아, 붙잡아.
가하란은 손끝의 개미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직 대기에 머물러 있는 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리고 강하게 염원했다.
노란빛을 띤 마나가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손을 눈앞으로 끌어당겨 다시 확인했다.
손끝에 노란빛이 머물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 광량이었지만.
“가하란은 체내로 마나를 끌어당기지 못해요. 하지만, 외부 상태의 마나에 간섭이 가능하죠.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가하란은 아직 잘 모르겠죠. 하지만 전 알아요.”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이 해맑게 웃는 윈테였다.
“자! 연습을 시작하죠. 그놈과 마찬가지로, 가하란도 ‘외력’을 다룰 수 있게 될 겁니다. 물론 형태는 다르겠지만.”
* * *
“체크.”
윈테는 손을 뗐다. 게슴츠레하게 보드를 보던 가하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얼른 쉬세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가하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윈테는 통제실에 홀로 남아 영토 확장을 끝마친 체스보드를 바라봤다.
“이 정도일 줄은…….”
순수한 감탄이었다.
윈테는 구석에 쌓아둔 기물을 바라봤다.
경이롭다는 말이 오랜만에 떠오른다. 습득력이 대단했다. 힘의 총량은 ‘그놈’보다 떨어질지언정, 사용하는 방식은 그놈보다 다양했다.
미소 지으며 기물을 정리했다.
가르치는 맛.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