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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96화 (396/558)

제396화

어떻게, 라는 물음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살펴봤는데 정말 안 들어 있어요. 형태만 남아 있다니. 카트시에게 보여주면 뭐라고 할까요? 빈껍데기가 된 자기 자신을 보면 어떤 감상을 들려줄지, 무척 궁금하네요.”

“……정말 다녀오신 건가요?”

“네. 다녀왔으니 이게 제 손에 들려 있겠죠?”

윈테가 카트시를 넘겨주었다. 손안에 차오르는 무게감. 허상이 아닌 실체였다.

-공간의 제약을 어떻게 해결한 거지?

로키가 물었다.

“갔다가 물건을 들고 돌아왔습니다. 이보다 더 쉬운 설명이 필요한가요?”

-물질의 공간 도약은 불가능할 텐데.

“위상, 층 간에 연결을 봤으면서도 공간 도약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나요? 무엇보다 여러분이 어떻게 하늘석에 왔는지 잊었나요?”

“아…….”

가하란은 실웃음을 지었다. 몇 년 전 일이 돼버린 나머지 하늘석에 처음 올랐던 순간을 잊고 있었다.

“동일 위상 내에서도 이동할 수 있었죠. 맞아요, 저희는 이미 경험했어요.”

카트시를 든 채 윈테에게 바짝 다가갔다. 윈테가 목을 뒤로 살짝 빼며 눈을 깜빡였다.

“저도 할 수 있나요?”

“공간 도약이요?”

“예, 배우고 싶어요.”

“방법이야 있죠. 하지만 가능 여부는 알 수 없어요. 이걸 터득한 인간은 단 한 명도 없거든요. 아. 그 녀석은 터득했다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윈테가 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말했다시피 전 가하란을 도울 겁니다. 공간 도약을 배우고 싶다면 알려주죠.”

해결해야 할 모든 문제가 한순간 잊혔다. 그 정도로 기뻤다. 공간 도약은 이론만 수없이 제창됐을 뿐 누구도 실현하지 못한 미답의 경지니까.

“일단 준비물이 필요해요.”

“말씀만 하세요. 최대한 구해볼게요.”

“구할 필요는 없어요. 재료는 갖춰져 있으니까.”

윈테가 손가락으로 가하란을 가리켰다.

“정신체.”

“예?”

“일단 정신체로 변하세요. 아니면 정신체를 분리해 내던가. 정신체로 변하는 건 어려울 테니 분리를 해보죠. 이건 꽤 간단한 거라 인간들도 곧잘 해냈어요.”

“……어떻게 정신체를 만들어내죠?”

“감각한 마나를 이용하면 돼요. 음, 한 번쯤 경험해보지 않았나요? 제가 아는 인간들은 다들 정신체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데.”

윈테가 잘 보라면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몸을 간지럽히는 마나 파장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보이죠?”

“네?”

“이 흐름이요. 로키는 보고 있나요?”

-보이지만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없다. 힘의 흐름이 너무 난잡해.

가하란은 머쓱하게 웃다가 모노클을 꺼냈다. 외안경을 왼쪽 눈에 얹자마자 윈테가 말했다.

“그 보조 기구는 왜 쓰는 거죠?”

“이게 없으면 안 보여요. 착안은 같은 정보를 여러 번 확인해야 해석할 수 있으니, 지금은 모노클로 보는 게…….”

“그 기구는 제대로 된 현상을 볼 수 없어요. 뭉개져 보이니까. 그러지 말고 육안으로 똑똑히 확인해요. 아주 잘 보이도록 신경 쓰고 있으니까.”

더없이 선량한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펼치는 윈테였다.

“어떤가요?”

“그게…… 안 보여요.”

“보조 기구에 의지해서 그래요. 지금부터라도 육안으로 확인하는 버릇을 기르세요. 자! 마음껏 봐요!”

“윈테 님.”

“님은 필요 없다고 했죠.”

“윈테. 정말 안 보여요. 전 모노클 없이 마나를 볼 수 없어요. 가시화될 정도로 집약된 마나라면 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안 보여요.”

“…….”

다양한 색으로 빛나던 윈테의 눈동자가 한순간 탁한 회색으로 변했다. 길을 잃은 애처럼 눈동자가 좌우로 번잡하게 움직였다.

“안 보인다고요?”

“네.”

“절 놀리는 거라면, 그것도 좋죠. 언제 인간에게 놀림당해 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배워야 할 단계이니 농담은 잠시 접어두고…….”

“전 농담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가하란은 카트시를 든 두 팔을 내려다봤다.

“애초에 마나를 감각한 적이 없어요.”

“마나를 감각한 적이 없다고요? 그럴 리가.”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붙잡았다.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어?

앞에도 윈테가 있고, 뒤에도 윈테가 있었다.

“착안을 이어받고 올이 시스템 접근을 용인했다는 건 기본적인 마나가…….”

어깨를 붙잡은 채 말하던 윈테가 눈을 크게 떴다. 탁한 회색이던 눈동자가 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놀라워요. 정말로 마나를 감각하지 못한 상태군요.”

윈테의 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감쌌다. 두개골 형태를 점검하듯 세심하게 더듬는 손이었다.

“저기.”

“쉿. 조용히 있어봐요.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 있죠? 이게 신이 말한 반걸음 벗어난 상태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벗어난 자?”

문득 툴이 떠올랐다. 싫다고 바둥거리는 툴을 껴안고 마구 쓰다듬었는데, 그때 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나를 감각하지 못했으나 이용하는 데 문제는 없군요. 의지에 따르고 있어요. 알지 못하는데 알고 있어요. 이건 대체 뭘까요?”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눈동자가 다시 여러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둘로 나뉘었던 윈테가 하나로 합쳐졌다.

“착안의 정보를 탈 없이 수용한 영혼. 마나를 감각하지 못하는 육체. 흥미로워요, 너무나도 흥미로워요. 가하란! 이게 바로 운명이라는 겁니다. 그림자뿐인 제가 이렇게 눈을 뜬 건 가하란을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발까지 동동 구르는 윈테였다. 중년의 얼굴로 방방 뛰는 게 묘하게 어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용’이 이토록 흥미를 보이다니.

새삼스레 몸을 내려다볼 때였다.

-멈춰!

로키가 소리쳤다. 긴박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손이 있었다. 진한 붉은색으로 덧씌워진 손.

가시화된 마나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상황을 이해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뒤로 나자빠지듯 몸을 뺐다. 무너진 중심을 다잡고 정면을 바라봤다.

다시금 황금빛으로 변한 눈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윈테는 아쉽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은 상태였다.

“그렇게 소리칠 필요 없어요. 잠깐이면 돼요.”

-너, 가하란을 죽일 생각인가?

“죽이다니요. 아주 잠깐 해부해볼 뿐이에요. 과정에서 실수가 생겨 죽을 수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존해드릴 테니까.”

실수? 보존?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오판이었다. 이해하면 안 되는 대상이란 걸 인지했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놓고 있었다.

악의? 선의? 그런 건 없을 것이다. 윈테는 그저 궁금할 뿐이리라.

궁금한 건 풀어야 하고.

-가하…….

로키의 기계 안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키가 흥분한 것 같아 잠깐 쉬게 했어요.”

“윈테도 흥분한 것 같은데요. 잠깐 쉬는 게 어때요?”

“아니요. 전 흥분이란 걸 몰라요. 그런 감정에 노출된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말과 눈동자가 따로 놀고 있어요.”

뒤로 물러섰다. 재미없는 농담이었으면 좋겠지만, 용의 손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따끔할 뿐이에요. 의식도 붙어 있고요. 살아 있는 채 자신의 장기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귀한 경험을 가하란에게 선물해 줄게요.”

“그것참 고맙네요. 근데 해부 도중에 실수로 죽을 확률이 얼마나 되죠?”

“절 믿어요. 그리 높지 않아요. 저는 베테랑이니까요. 수없이 해부해왔죠. 몇몇은 해부 도중에 저와 수다를 떨며 음식을 먹기도 했어요.”

“……대체 몇 명이나 해부해본 건가요.”

“글쎄요. 기념적인 첫 번째 이후로는 기억하고 있지 않아요.”

가하란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머리가 분주해졌다. 도주로는? 일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막은 다음에는?

그러다 단검을 든 손에 힘이 탁 풀렸다.

대치는 불가능하다. 힘을 거스르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괜찮아요. 제대로 돌려놓을 테니.”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목이 잘린다.

가하란은 목을 틀며 외쳤다.

“그 아이에게 배운 존중이란 게 이런 건가요!”

목뒤가 따끔거렸다. 가하란은 멈춰 선 윈테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러섰다.

손을 들어 따끔거리던 부위를 쓸어내렸다. 피가 묻어났다. 혈흔을 보자 실감이 난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의 단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확인했을 것이다.

가하란은 황금빛에서 서서히 회백색으로 변하는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래요, 그랬었죠.”

고개를 주억이던 윈테가 손을 툭툭 털었다.

“아무래도 덜 깨어난 것 같아요.”

“덜 깨어나다니요?”

윈테가 웃으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제 몸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휴식 상태죠. 하지만 이상하군요.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것도 위상 변화의 문제일까요?”

몸이라니?

“지금 일어나 계시잖아요.”

“이건 정신체죠. 제 몸은 아직 호수 밑에서 쉬고 있고요. 음, 잠깐만요.”

눈앞에서 윈테가 사라졌다. 속을 뒤집는 마나 파장이 몸을 덮쳐왔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벽에 기댈 때였다.

-란!

깨어난 로키가 뒤늦게 외쳤다.

-가하란!

“괜찮아. 멀쩡해.”

-그놈은?

“모르겠어. 잠깐 어딜 간 거 같은데.”

윈테가 다시 돌아왔다.

“그래요, 왜 이런지 이제 알게 됐어요. 저는 그림자조차 아니었어요. 내려가 보니 몸이 없더군요. 아니, 반복되는 위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를테면 전…… 그림자의 그림자인 거죠? 하하하! 흥미로워요.”

바짝 다가온 윈테가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방금 저 손에 목이 날아갈 뻔했다.

“이젠 정말 괜찮아요. 독립 상태가 됐으니까요. 제약이 생기지만 가하란을 해부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꺼림칙하게 손을 바라보고 있자, 윈테가 손을 내밀어 강하게 붙잡았다.

“자! 친분을 나누죠. 살짝 망가진 우정도 금방 복구 가능한 게 인간의 장점 아닐까요?”

-미친놈.

“우리 기계 친구도 섭섭해하지 마요. 이젠 정말 괜찮으니까.”

윈테가 생긋 웃으며 땅에 떨어진 카트시를 주웠다.

“일단 이 친구부터 상태를 알아보죠. 자자, 서둘러요. 저한테는 시간이 많지만, 여러분은 아닐 테니까.”

콧노래까지 부르며 통제실로 향하는 윈테였다. 가하란은 윈테의 등을 보며 말했다.

“윈테. 아까 한 말, 정말인가요?”

“뭐가요?”

“사람을 해부했다는 거.”

“아, 그거요. 네. 해부했죠. 전 영혼 세계가 궁금했거든요. 제가 다루지 못하는 위상으로 전해지는 영혼들의 실체가. 겸사겸사 신체 해부도도 얻어볼 겸 인간을 비롯해 다양한 종을 해부해봤죠.”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거죠?”

“말했잖아요. 기념적인 첫 번째만 기억한다고. 혹시라도 인간의 도덕관을 나에게 설명하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아이도 그것만큼은 포기했으니까요.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가하란, 당신도 알잖아요? 인간과 가축의 관계를.”

알고 있다.

대화하면서 깨달아 버렸다.

나는 그를 욕할 수 없다. 보다 강한 종이 그렇지 못한 종을 사육해 잡아먹는다.

인간과 가축의 관계.

그리고, 용과 인간의 관계.

“자! 얼른 와요.”

멀어져 가는 윈테를 보며 로키가 말했다.

-빌어먹을 드래곤.

“하지만 우리한테 필요해.”

-해부당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래야지.”

싸늘하게 식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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