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신용할 수 없다.
“……다시 말해줄래?”
-저 괴물을 어떻게 믿는다는 거지?
괴물.
가하란은 휴게실 구석에 앉아 차를 즐기는 윈테를 바라봤다.
“네 입에서 신용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
-우린 서로를 이용하며 때론 친절하게 서로의 등을 찌를 수 있는 관계지만, 저건 다르다. 저건 괴물이야. 거래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그렇겠지. 근데 내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뒷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저 멀리 있는 윈테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거리를 무시한 채 귀에 또렷하게 전달됐다.
“이것, 저것, 괴물보다는 윈테가 좋겠군요.”
로키의 기계 안구가 윈테를 향해 홱 돌아갔다.
-다 듣고 있군.
“용이니까.”
-뭐?
“용, 드래곤. 역사서에서만 접하던 신적인 존재.”
-믿을 수 없다.
가하란은 기계 안구를 붙잡아 당겼다.
“손가락 한 번 움직이는 거로 거병의 외장갑을 찢어발겼어. 액상 근육 노출로 인한 폭발 역시 억제했고. 하늘석에 관한 것도 알고 있어. 그래, 네 말대로 용이 아닐 수도 있지. 근데 그게 중요할까?”
가하란은 윈테를 바라봤다. 차를 따라주는 기계인형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우리의 믿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동등한 존재가 아니니까.”
지렁이가 몸집을 키우고 날렵하게 기어 다닌다고 해도, 결국 새한테 쪼아 먹히는 신세인 건 변함이 없다.
신화적인 존재 앞에서 인간 하나와 기계 하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는 두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요. 관심의 대상은 소중히 다뤄야 하고요.”
윈테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관심이 사라지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버려 둘 뿐입니다. 로키라고 했죠? 저도 싫어하는 게 분명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들이 눈앞에 돌아다니며 신경을 긁는다면 응당 치워야죠. 하지만 보통은 내버려 둡니다. 집요하게 찾아내 박멸해야 한다, 이런 건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우리한테 뭘 바라는 거지?
“질문이 잘못됐어요. 가하란이 저한테 바라는 게 있을 겁니다. 전 협력할 생각이고요.”
윈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첫 대면에 느꼈던 위압감 같은 건 없었다. 둔 시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년인의 모습.
하지만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면 인상이 뒤바뀐다. 형형색색의 빛깔이 안구에 감돌고 있다. 붉은빛에서 푸른빛, 탁한 회색에서 황금빛으로.
타성에 젖은 노인처럼 만물에 관심이 없는 듯하면서도, 노련한 책사의 눈처럼 예리해 보이기도 하다.
도무지 속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해하는 걸 그만뒀다.
윈테도 경고했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복잡한 관계를 단순명료하게 재정리했다. 상대는 능력이 뛰어난 조력자이며, 우리에게 호의적이라고.
내포하고 있을 위험 따위는 무시했다.
어차피 드래곤이 속내를 감추고 무언가 꾸미고 있다면…… 막을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으니까.
손가락질 한 번이면 모든 게 끝난다.
상대가 항거 불가한 힘을 가졌기에 역설적으로 믿을 수 있다. 자포자기가 바탕에 깔린 믿음이란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가하란은 상황 정리를 끝낸 것 같군요.”
“네. 윈테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 이것저것 도움을 구할 생각입니다. 염치란 건 잊고 말이죠.”
“좋은 자세입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죠. 설령 그게 목숨이라 할지라도.”
섬뜩한 말이었으나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올을 일깨우고 본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그리고 님은 붙일 필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보세요.”
“책에서 접한 용은 인간과 말을 섞는 걸 아주 싫어한다고 했어요. 경어 같은 것도 쓰지 않고요. 물론 기록이란 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윈테가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한때는 그랬죠. 근데 한 아이가 절 바꿔놨어요. 존중이 필요하다. 저는 그 아이의 말대로 상대를 존중 중입니다. 물론 연기일 수도 있죠. 자신마저 속여버리는 연기.”
축복의 비를 뿌리고, 때로는 재앙을 내리는,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가 아주 잠깐이지만 지극히 인간다워 보였다.
누구일까?
지고의 생명체를 바꿔놓은 그 아이는.
입술이 근질거렸으나 질문을 내뱉지는 않았다.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 같았다. 윈테는 쉽게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는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이름.
그래도 얻어낸 게 하나 있었다.
드래곤 역시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다.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나요?”
긴장한 채 윈테의 입을 바라봤다. 로키 역시 기계 안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정확한 정의가 필요해요. 제가 이해한 죽음과 가하란이 이해한 죽음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되살린다는 개념 역시 다를 수 있어요.”
“과거에 죽은 인간을 현재 이 시점으로 데려올 수 있나요?”
“영혼 세계의 일부를 떼어내 아주 잠깐은 살아 있게 할 수 있죠. 물론 가하란이 원하는 이성적인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아주 단편적인 기억만 가진, 움직이는 고기일 테니까요. 그마저도 수 초 내로 붕괴해 움직이지 않는 그냥 고기가 되겠지만.”
반쯤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오래전 곁을 떠난 어머니를, 타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일시에 단절시키는 대답이었다.
“많은 걸 알고 있으나 모든 것에 통달한 건 아닙니다. 영혼 세계는 제가 다루지 못하는 위상이죠. 온전한 형태로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그래요, 초록 눈을 이어받은 그자들뿐이겠죠. 그 외에도 영혼 세계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자는 몇몇 있겠으나, 안에서 헤매다가 모든 걸 잃을 뿐이고.”
윈테가 주변을 둘러봤다.
“게다가 신의 섭리가 떠난 이후인 만큼 모든 게 달라졌겠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역시 불가능하군요.”
“단정 지을 필요는 없어요. 누군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계의 창조와 비견될 일이니, 실현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한 걸음 다가온 윈테가 멀거니 가하란을 바라봤다. 다양했던 빛을 잃고 검게 변한 눈동자가 망막에 맺혔다.
“가하란은 죽은 자를 되살리고 싶나요?”
“……솔직히 말하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망상 같은 거니까.”
“그렇다면 이런 건 어떤가요? 인간 전체가 동시에 육신을 버리는 겁니다. 개별적인 정신을 한데 묶어 영혼 세계와 비슷한 위상에 안착시키는 거죠. 육체의 제약이, 공간의 제약이, 시간의 제약이 사라진 세계에서 다 같이 사는 겁니다.”
검게 변한 윈테의 눈이 한층 더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였다.
가하란은 멍하니 그 눈을 바라봤다.
제약이 사라지는 세계.
모두가 영원불멸에 진입하는 세계.
“물질을 소비할 육체가 없으니 자원 문제 역시 사라집니다. 분배의 문제가 해결되니 모든 것이 완벽해지죠. 어떻습니까? 꽤 괜찮은 생각 아닌가요? 이별도 없고 죽음도 없고, 행복만이 지속되는 세계.”
행복이 지속되는 세계.
무척이나 달콤하게 들렸다.
실현 가능하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만족.
‘만족’이란 단어가 뾰족한 가시로 변해 머리 이곳저곳을 찔렀다.
불변의 행복과 완전히 제거된 고통. 단어만 늘어놓고 보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향 같았다.
“……마나 회로는 있음과 없음의 무한한 교차로 형성되는 논리 체계죠.”
가하란은 검게 빛나는 윈테의 눈을 직시했다.
“있음만 존재해서도 안 되고, 없음만 존재해서도 안 돼요. 온전한 회로 구성을 위해서는 두 가지 신호가 모두 필요해요. 불필요한 건 없죠.”
불멸의 세계.
불변의 세계.
모두가 행복한 이상적인 공간.
“모든 부재를 제거하면 분명 완벽해지겠죠. 결손이 없어지면 이상적인 세계가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세계가 존재해야 하는 의의가, 저는 떠오르지 않아요.”
“가하란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나요?”
“완벽을 추구하죠.”
“그럼에도 완벽함 자체를 부정하는 건가요?”
“결과로서의 완벽, 과정으로서의 완벽.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모두의 합치로 얻어낸 결말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고 봐요.”
“모든 종의 합치는 이뤄낼 수 없어요. 물질에 얽혀 있는 이상 통일은 꿈과도 같죠. 그러니 벗어던지는 게 낫지 않나요?”
“……저도 행복한 게 좋아요. 누구나 그렇겠죠. 작은 행복이 큰 행복으로 바뀌길 기도하고요. 하지만 윈테도 아시다시피, 결국 행복은 불행의 대비되는 값이잖아요? 행복만 존재하는 세계는, 이를테면 마나 회로에서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예요. 그건 고장 난 회로이자 동작하지 않는 회로고요.”
‘없음’이 있기에 ‘있음’이 존재한다. 다수가 행복할 수는 있어도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다.
가하란은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검게 빛나던 윈테의 눈이 다시금 다채로운 빛깔로 바뀌었다.
“실험실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말해요. 저는 가하란을 도울 겁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그것만큼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건 부탁드리겠지만.”
“신념이 있는 인간은 좋죠. 그게 부러질 때도 좋고, 지켜나갈 때도 좋고요. 가하란은 어느 쪽일까요?”
“전 나름 고집이 있어요.”
“알겠어요. 이 얘기는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죠. 그런 눈을 가진 인간은 꺾이지 않는다는 걸, 저는 그 아이를 통해 깨달았거든요. 하지만…….”
윈테가 이번에는 로키를 바라봤다.
“로키라면 받아들일 것 같긴 한데.”
-도움 따윈 필요 없다. 난 내가 해낼 수 있으니까.
“저쪽도 저쪽 나름 고집이 있네요.”
싱긋 웃던 윈테가 허리에 손을 대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일을 해볼까요? 잠든 카트시는 지금 어디에 있죠?”
“둔에 있어요. 예정대로라면 둔에 도착해 카트시를 회수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떠날 수 없게 됐죠.”
하늘석이 낙하한 곳은 성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맥이었다.
처음 둔에서 성도까지 이동하는데 1년 남짓 걸렸다. 달려드는 마수를 쳐내며 이동하느라 말도 안 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이곳에서 둔으로 돌아가 카트시를 회수하고 복귀했을 때 하늘석은 어떤 상태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마수가 밀려들어 주변에 시체가 쌓이는 실정이었다.
전투에 익숙해졌으니 오고 가는데 반년이면 충분하겠지만, 반년 사이 하늘석은 마수의 둥지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근 2년이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어요. 하늘석을 잃게 되면 모든 걸 잃게 되니까요.”
가하란은 윈테를 바라봤다.
거대한 마수도 일격에 날려 보낸 압도적인 무력. 용이 하늘석을 보호해 준다면 안심하고 둔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둔이라. 얼핏 떠오를 것 같네요. 기억을 정리 중이라 약간의 착오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여길 보호해 주시면…….”
“작은 장난감을 타고 오가면 시간이 꽤 걸리겠죠. 저야 시간이란 것에 자유롭다지만, 지금은 기다리기 싫군요.”
그때였다.
윈테의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빛이 투과돼 반대쪽 벽이 보였다.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때였다.
“카트시가 둔 어디에 있다고요?”
“가, 강철의 무덤 안에 있어요.”
“거기라면…… 잠깐만 기다려요.”
흐릿해진 윈테가 한순간 사라졌다. 이어서 격한 마나 파장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가하란은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몸을 숙여야 했다. 방향 감각이 사라지고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쓰러지며 로키를 바라봤는데, 기계 안구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로키.”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윈테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회로가 정지해버린 모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추스르고 일어설 때였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윈테가 걸어왔다. 손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군요.”
윈테가 카트시의 본체를 휘휘 흔들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