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로키.”
-알고 있다.
르 2호에 실린 로키가 빠른 속도로 격납고를 향해 갔다. 오토마타에 연결하기까지 5분 정도 걸릴 것이다.
가하란은 긴장한 채 기울어지는 마수의 육체를 바라봤다.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꼬꾸라지며 다시금 먼지구름을 피워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왼쪽 착안을 연 채 정면을 바라봤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선으로 화한 세계와 현실 세계가 겹치며 다양한 정보가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무언가가 저곳에 있다.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또 다른 형태의 마수일까? 그게 아니면…….
공간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세계를 구성하던 선들이 한순간 뭉개졌다.
위험하다.
솜털이 곤두섰다. 인식과 동시에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배터리에서 흘러나온 마전기가 칼날에 깃들었다.
눈동자를 바삐 움직였다.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휘어지는 선들.
막대한 정보의 변화였다. 보았으나 인지 단계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빠르고, 무자비하다.
날뛰던 선이 한순간 풀어졌을 때 가하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족의 외관을 채택했을 뿐이라는 걸 보는 순간 깨달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이해되질 않는군요.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중후한 목소리였다. 쉰 살은 넘어 보이는 얼굴. 상황이 몹시 불만스럽다는 듯 눈가의 잔주름이 씰룩였다.
가하란은 착안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주변 일대가 선으로 변했으나 남자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늘석과 똑같았다.
착안이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를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남자가 검지를 까닥거렸다.
순간 착안이 닫혔다. 모든 걸 정보로 바꾸는 눈이 타인의 의지에 반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혹감과 동시에 호기심이 들었다.
이 자는 누구인가.
“켈트가 땅에 처박히다니. 살다 보니 이런 걸 다 보게 되는군요. 올은 그렇다 치고 카트시 역시 이 안에 없는 것 같은데…….”
남자가 시선을 던졌다.
가하란은 그제야 깨달았다. 홍채가 없다. 동공도 없다. 탁한 흰자위만 안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인간이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거기에 당신은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군요.”
대응할 수 없다.
수백, 어쩌면 수천의 마수를 잡아 오며 단련한 전투 감각이 점잖게 타이르고 있었다. 오른손에 쥔 단검을 놓고 성심성의껏 남자의 질문에 답변하라고.
죽이려면 마주한 순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려뒀다.
올과 카트시를 알고 있는 남자. 세계의 이면을 알고, 진실이라 불러 마땅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 법한 남자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에 살려둔 건가? 아니, 그렇게 폭력적인 생명체가 아닌 걸까?
삶과 죽음이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 교차하고 있을 때였다.
-가하란!
육중한 소리를 내며 거병이 뛰어올랐다. 쿵쿵 소리를 내며 남자의 등 뒤까지 도착한 거병이 손을 내뻗었다.
“안 돼!”
가하란은 있는 힘껏 소리쳤다.
강철로 이뤄진 거병의 손가락이 남자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끼기긱,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을 마주 보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켈트의 형을 본떠 만든 장난감이군요. 전 마법 공학을 잘 모릅니다. 배울 기회가 있었으나 흥미가 생기지 않았어요.”
남자가 검지를 내밀어 거병의 손가락 끝을 톡 건드렸다. 콰드득, 오른팔 외장갑이 한순간 비틀리더니 우그러졌다.
탈로스와 액상 근육이 오가는 연질 파이프가 노출됐다. 혈관처럼 맥동하는 파이프를 유심히 보던 남자가 다시금 손을 댔다.
파이프가 갈라졌다. 마전기를 한껏 머금은 액상 근육이 대기에 노출됐다.
마나 폭발이 일어난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틀 때였다. 고요했다. 격한 마나 파장도 없었다.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건 당신들이 다듬은 마나인가요? 형태가 재미있네요. 결함 인자를 이런 식으로도 사용하는군요.”
경직돼 다물렸던 입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졌다. 모노클을 끼지 않아도 보이는 가시화된 마나. 극도로 위험한 에너지가 남자의 손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장난감치고는 만듦새가 좋아요. 머리를 식히는 동안 재미난 것들이 많아졌네요.”
남자가 왼손을 위로 뻗었다. 손바닥 위에서 휘몰아치던 마나가 빛무리로 변해 대기로 흩어졌다.
거병이 쿵 소리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로키!”
이름을 불러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회로가 타버린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잠깐 정지한 걸까.
“안에 든 유사 정령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요. 마나를 잠시 거둬들였을 뿐이니까. 재미있어요. 기계인데 적의를 품고 있다니. 인간은 카트시와 닮은 걸 만들어냈군요. 훌륭해요.”
로키의 본체는 마나 포집으로 마나 보충이 끊기지 않는다. 그걸 거둬들였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내가 알던 위상이 아니에요. 기이한 단절감도 있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래요?”
거절할 수 없었다.
질문에 답하기 전, 가하란은 의지를 쥐어짜내 되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포괄적인 질문이군요. 이름을 묻는 거면 여러 개가 있었다고 대답해줄 수 있고, 위상에서의 역할을 묻는 거라면 조금 복잡하고. 설명 못할 것도 없지만 공통어로 전하려면 꽤 오래 걸리겠죠.”
남자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절벽처럼 드리워진 격납고 입구를 빤히 보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중력에 의해 추락해야 할 몸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마나를 사용하기 위한 그 어떤 예비 동작도 없었다.
샬롯처럼 정령을 부리는 걸까?
“내려가죠.”
몸이 들렸다. 아무런 저항감 없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몸이 허공에 떴다.
“누구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군요. 예, 정말 오랜만이에요.”
남자는 투명한 계단을 밟듯 천천히 발을 떼며 아래로 내려갔다. 가하란 역시 공중에 뜬 채 남자를 따라 밑으로 향했다.
격납고 입구에 도착하자 발이 땅에 닿았다. 얼떨떨한 기분에 몸을 매만졌다.
예전에 샬롯이 다루는 바람에게 붙들려 하늘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그때와 현상은 비슷하나 몸이 받아들인 감각은 전혀 달랐다.
당시에는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몸으로 전달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힘은 그렇지 않았다. 감싼다는 감각조차 없었다.
당연한 것들이 일시에 비틀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곁에서는 비가 하늘로 치솟고, 나무는 거꾸로 자라며, 물고기는 하늘을 헤엄칠 것 같았다.
“추리고 추려서 그나마 설명하기 쉬운 형태로 말하자면, 그래요.”
남자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당신들의 말에 빗대어 제 소개를 하자면…….”
간단하게 ‘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흰자위만 가득했던 눈에 붉고 푸르면서 때로는 검고 황금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생겨났다.
* * *
“고마워요. 오랜만에 즐기는 커피라 기분이 좋네요. 필요하지는 않지만 즐길 수 있을 땐 즐겨야죠.”
가하란은 물끄러미 남자를, 자신을 용이라 소개한 남자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대뜸 나타나 “난 드래곤입니다.”라고 하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연극배우거나, 미쳤거나.
하지만 남자는 둘 다 아니었다.
이해를 넘어선 힘.
파괴적인 힘만큼 진실성을 갖춘 게 있을까? 가하란은 단번에 납득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용’이라고.
“그러니까 세계가 반복됐고, 갈라졌으며, 신은 사라졌다. 그렇군요. 그 친구의 뜻대로 됐군요.”
신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의아해하지 마세요. 친구라고 해서 동급은 아니니까. 저 역시 그 친구 손에 탄생했으니 어찌 보면 부모나 다름없죠. 켈트 역시 마찬가지고.”
이 계에 발붙이고 사는 모든 존재는 신의 아이들이다.
부동의 진리를 다시금 되새김질했다. 이것만큼은 세계가 격변해도 변하지 않으리라.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그림자에 불과하군요.”
“제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죠.”
남자가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봤다. 가하란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가 담긴 병을 가져왔다.
“버릇이 됐어요. 한때 제 커피를 챙겨주던 아이가 있었거든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를 바라봤다.
공포가 흩어지고 난 빈자리를 채운 건 막대한 호기심이었다.
언젠가 용을 만나게 된다면, 드래곤을 보게 된다면 세상 모든 질문을 던져봐야지.
어릴 때부터 막연히 품어왔던 꿈이 현실이 됐다.
입이 근질거렸으나 일단은 참았다. 아직 상대를 파악하지 못했다.
점잖아 보이나 한순간 돌변해 모든 걸 재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눈앞의 상대는 그러고도 남을 힘을 지녔으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부수는 건 신물이 나요. 이해한 상태이기에 더는 부술 필요가 없어요.”
생각을 읽혔다. 추론이 아닌 직접 들여다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위상 갈림이라.”
남자가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 순간 반짝이는 경계면이 눈앞에 나타났다. 세계를 잇는 기적을 아무렇지 않게 펼치고 있었다.
“과연.”
남자는 주억거리며 팔짱을 꼈다. 제스처가 인간 같다고 생각하며 경계면 너머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건너편에 깊은 어둠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경계면을 가로질러야 할 주황색 선, 비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말한 대로 저 역시 이곳에 종속된 모양입니다. 본류에 있을 나와 대면하고 싶었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경계면이 닫혔다.
“계가 당신들 손에 쥐어졌다는 걸 확인했어요. 그 친구는 지금쯤 당신들 사이에 녹아들어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겠군요.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겠죠.”
“신께서는 변화를 예측하고 모든 걸 안배하셨는데, 현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남겨두셨을까요?”
어렵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말한 길리우드, 그리고 그라운드 제로. 거기까지가 신의 시대였을 테고 그 뒤에 펼쳐진 일은 신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니 현 사태의 해결 방안 역시 신이 아닌 당신이 찾아내야 하죠.”
“……역시 그렇군요.”
쉽게 해결되는 건 아닌가.
남자가 다시금 찻잔을 바라봤다. 그새 커피를 다 마셨다.
“맛이 좋네요.”
싱긋 웃으면서 잔을 내밀었다. 부랴부랴 커피를 따랐다.
“켈트가 침몰한 이유는 알지 못한다고 했죠?”
“네. 고도를 낮추는 도중에 갑자기 올이 잠들었어요.”
“위상을 연결할 때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하네요. 고칠 수 없는 건가요?”
“이것저것 손대고 있지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입니다.”
“카트시도 부재중이니 곤란하군요.”
남자가 왼손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가하란은 눈을 향해 다가오는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다.
“착안. 현상을 올바르게 보는 눈. 하지만 이 눈으로도 볼 수 없는 게 많겠죠.”
“하늘석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지만, 착안으로 봐도 정보로 변하지 않아요.”
“신의 손길이 직접 닿아 있으니까요. 아직은 구조를 분해할 능력이 안 된다는 거겠죠.”
남자에 의해 닫혔던 착안이 다시금 열렸다.
양쪽 눈 모두.
인두로 동공을 꿰뚫는 듯한 고통에 이를 꽉 물었다.
“눈도 눈이지만, 그 안에 있는 뇌가, 심상 세계가 대단하네요. 눈은 창구 역할만 할 뿐이죠. 그걸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건 당신의 영혼이고요.”
남자가 왼손을 움켜쥐었다.
착안이 닫혔다.
가하란은 허리를 숙이며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도움을 주고 싶지만, 그건 제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네요.”
“……저기.”
“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아! 이름. 이름이 중요하긴 하죠.”
남자가 찻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윈테. 일단은 그렇게 불러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