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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393화 (393/558)

제393화

시체가 산을 이룬다는 비유가 더는 비유가 아니게 됐을 때, 가하란은 생각하는 걸 멈추고 계속 싸워야 했다.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아니, 예상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죽은 마수의 등 쪽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전기로 달궈진 칼날이 외피를 태우며 동시에 갈라냈다.

마나가 축적된 뼈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형태라면…….

예측한 곳에 단검 끝이 도달했다. 살집을 비틀었다. 모노클에 일렁거리는 마나가 잡혔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뼈를 움켜쥐고 뽑아냈다. 장갑에 묻은 체액을 툭툭 털어내고 마수 뼈는 허리춤에 달아놓은 주머니에 넣었다.

-또 오고 있는데, 어떻게 할 거지?

가하란은 말없이 체임버로 뛰어올라 덮개를 연 채로 거병을 움직였다.

쿵쿵, 지면을 차며 얼마나 이동했을까. 비탈 아래로 땅에 처박혀 있는 하늘석이 보였다. 주변을 기웃거리는 마수가 셋. 질리도록 잡았는데 그새 모여들었다.

썩어가는 사체를 짓밟으며 날뛰는 마수들을 한동안 지켜봤다.

-치우고 복귀할 건가?

로키가 물었다.

“배터리를 다 썼어. 사냥하려면 그래도 할 수는 있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해.”

-내려가면 달려들 텐데.

“어쩔 수 없지. 격납고 입구까지만 끌고 가자.”

-정말 지긋지긋하군.

체임버 덮개를 닫았다.

인지 통합이 이뤄지기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양도받은 거병의 시선으로 전방 상황을 살핀 후 최적의 진로를 그려냈다.

액상 근육이 휘몰아치는 걸 감지하며 거병의 두 다리에 의지를 담았다.

쿵!

비탈을 질주하며 내려갔다.

3m 크기의 마수 세 마리가 금방 반응했다. 하지만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지극히 개별적인 마수들에게 동료애 따위는 없었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쉽사리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하늘석 끝자락을 향해 도약했다. 거병 하부 모듈에 부착해둔 소모형 배터리가 마전기를 방출했다.

거병 발밑에 생성된 마나 파장을 디딤돌 삼아 두 번째 도약.

지면에 짙게 드리워졌던 거병의 그림자가 옅어지는 걸 확인하며 하늘석 끝자락에 안착했다.

쿠웅!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신호가 됐는지, 하늘석 밑에서 얼쩡거리던 마수들이 암벽을 타기 시작했다.

쇠를 긁는 듯한 마수의 울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몇 마리나 있는 걸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잔뜩 몰려오면 좋겠네.”

가하란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병의 목이 돌아가며 뒤쪽 상황이 보였다.

네 발로 뛰는 마수, 뱀처럼 기는 마수, 이족 보행 하는 마수. 각기 다른 형태의 괴물들이 거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제삼자가 보면 애타는 상황이겠지만, 가하란은 한숨부터 나왔다.

위기도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고 나서는 지루한 업무가 된다.

“출력을 1엘론만 올려.”

-무릎에 손상이 생길 거다.

“어차피 손 봐야 해. 금속 피로도 쌓였을 테니 아예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반쯤 열린 착안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체임버 밑으로 정보의 흐름이 보인다. 선으로 해체된 거병의 하부 정보를 빠르게 읽어내고 착안을 닫았다.

“격납고까진 버틸 수 있을 거야.”

-안 그래도 다 왔다.

쿵!

날아오르듯 마지막 걸음을 떼자 하늘석 격납고가 코앞이었다. 양쪽으로 우뚝 선 철골을 지나자마자 외쳤다.

“마운! 닫아!”

-알겠어요!

구그그, 땅 밑에서 격벽이 솟아났다. 가하란은 체임버 덮개를 열고 멀리서 다가오는 마수를 바라봤다.

“좀 포기해라.”

격벽이 올라가고, 잠시 후 벽을 긁는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거병에서 내려 오른쪽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바깥 상황은 어때?”

-문 앞에 있는 세 마리가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어요. 거점 밑에는 열두 마리의 마수가 모여들었는데, 올라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끝이 없네.”

-그러게요.

“올은?”

-여전해요. 응답 없음. 깨워도 깨워도 일어나질 않아요.

눈앞에 생성된 보라색 점, 마운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체임버 안에 있던 루루가 뛰쳐나와 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전송 탑은 어때?”

-2번, 8번, 11번을 제외하고 기능 정지 상태예요.

“4번도 반응 없어?”

-네.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인 고장은 아닌 것 같아요. 가하란이 몇 번이고 손봤는데 변화가 없는 걸 보면요.

“역시 올이 깨어나야 정상 작동하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루루와 놀아주던 마운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루루도 가하란 품에 안겨 몸을 말았다.

“시스템 접근은 성과가 있어?”

-아니요. 가하란이 도와준 영역까지는 파고들었는데, 핵심 보안은 뚫지 못했어요.

오른손에 감각기를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마운의 도움을 받아 하늘석 메인 시스템의 마나 회로를 생성했다.

“레이어 몇까지 했었지?”

-3B322F 2층. 19283번 단자부터 시작해야 해요.

착안을 연 채 회로를 살폈다. 기괴하게 꼬인 회로들.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알 수 없어 임의의 시작점을 잡고 탐사를 시작한 지도 반년이 흐른 것 같았다. 아니, 1년인가. 어쩌면 2년일지도.

시간이란 개념이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통제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계속 회로를 살폈다. 복합 반응과 다중 연산은 이용할 수 없었다. 동시에 점검하는 레이어의 개수가 네 개 이상이 되는 순간, 경우의 수가 측정 불가 영역으로 진입해 버린다.

그러니 기계어 말단, ‘있음’과 ‘없음’의 단순한 반응 영역을 집요하게, 하나하나 건드리며 체크해야 한다.

통제실 의자에 앉았다. 눈앞을 지나가는 희미한 주황색 선, 비트를 살짝 건드렸다.

1번 휴게실 쪽에서 소리가 났다.

가하란은 회로에 집중하다가 오른쪽을 힐긋 봤다. 기계인형이 들고 온 음식이 보였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할 때 회로에 이상 부분이 보였다. 잠깐 손보고 테스트한 후 다시 오른쪽을 봤다.

음식을 얼른 가져가라는 듯 양팔을 치켜든 기계인형이 좌우로 몸을 틀었다.

“미안.”

그릇을 들어 탁자에 올려뒀다. 기계인형은 통통거리며 휴게실로 돌아갔다.

-그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응?”

회로에 집중하며 음식을 입에 넣기 전, 마운이 한 말이었다.

손에 든 음식을 바라봤다. 수분기가 적은 빵이었는데, 표면에 푸릇한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내가 이걸 언제 만들었더라.”

-열흘은 지났죠.

“냉장 보관함에 넣어뒀을 텐데.”

-냉장 보관함이 만능은 아니에요.

“대충 떼어내고 먹으면…….”

-장담하는데 그러면 배탈 날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악마들이 이미 빵 속 깊숙하게 침투했을 테니까.

작은 악마란 말에 입맛이 싹 사라졌다. 빵을 내려두고 주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1번 휴게실로 갔다.

벽면에 기댄 채 정지 상태에 있던 기계인형이 슬그머니 움직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처럼. 앞뒤가 똑같고 얼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재미난 일이다.

“쉬고 있어.”

기계인형이 다시 벽에 붙었다.

안쪽 창고를 살폈다. 다행히 재료에 곰팡이가 피진 않았다.

-간만에 제대로 챙겨 먹으려고?

로키가 물었다. 기계인형이 번쩍 치켜든 상태였다.

“빵에 곰팡이가 폈더라고.”

-냉장 보관함에 있었잖아.

“내 말이.”

-역시 빵은 보관식으로 좋지 않아. 건식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군.

“너는 안 먹어도 되지만, 나는 먹어야 해. 똑같은 것만 1년 내내 먹으면 난 미치고 말 거야.”

가하란은 로키를 떠받들고 있는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오늘은 르 2호네.”

-사족 보행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어서. 다음에는 궤도형으로 바꿔줬으면 한다.

“생각해보고.”

간단히 먹을거리를 만들어 통제실로 돌아왔다.

엉덩이를 붙이고 침침한 눈으로 회로를 들여다보며 몇 시간이나 있었을까.

루루가 뒷덜미를 툭툭 때리기 시작했다. 목을 뒤로 꺾자 으득,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몇 시지?”

-오후 7시요.

“루루가 난리 칠 만하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챙겨 격납고 입구에 섰다.

“바깥 상황은?”

-전부 내려갔어요.

“나무 덕을 톡톡히 보네.”

하늘석에서 자생하는 나무에서는 독특한 향이 났는데, 대부분의 마수들이 이 향을 기피했다.

몇 마리를 잡아다 실험도 해봤다. 궁지에 몰리면 향이고 뭐고 달려들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나무 향이 맴도는 곳에 접근하지 않았다.

하늘석 주변으로 마수들이 몰려들어도 저녁이 되면 조용해지는 이유였다.

격납고를 벗어나 동산을 올랐다.

떠나보냈던 겨울이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인가. 아니 세 번째인가?

작은 과일을 루루에게 던져줬다. 몇 년을 같이 보냈는데, 루루는 여전히 작았다.

크든 작든,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곁에 남아줬으면 좋겠는데.

-눈이군.

로키의 기계 안구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칙칙한 구름이 눈을 토해내고 있었다.

말린 생선을 입에 넣고 씹었다. 눈 한 송이가 손등에 톡 떨어졌는데, 알갱이가 튼실한 게 쌓일 눈 같았다.

마수의 울음소리가 절벽을 타고 올라왔다. 영역 다툼이 시작된 모양이다.

“새끼도 배지 않는 놈들이 어디서 저렇게 쏟아지는 건지.”

-또 모르지. 번식하는 놈들이 있을지도.

물을 마시며 동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침묵 중인 전송 탑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석이 추락하고 정확히 며칠째지?”

-587일이다.

“……괜히 물었네.”

-정확히 83일 전에 네가 같은 질문을 했었고, 같은 표정을 지었지.

“인간은 잊고 사는 동물이잖아.”

-진전은 있나?

“어느 정도는. 하지만 역시 올이 깨어나야 방도가 생길 거 같아. 장치를 복구한다고 해도 기동시킬 시스템이 잠들어 있으면 손쓸 도리가 없지.”

되새김질하고 싶지도 않은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상으로 내려가 카트시를 가져오기로 한 날, 지면을 향해 고도를 내리던 하늘석에 문제가 생겼다.

전송 탑에 심대한 오류가 발생했다며 부유 장치에 이상을 경고하던 올이 한순간 사라진 것이다.

고도 30m 정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막대한 질량이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가하란은 통제실 안을 몇 바퀴나 굴렀다. 배터리를 이용한 마나 파장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낙하 충격으로 죽었을 것이다.

추락 후 올의 복구와 전송 탑 정상화를 위해 온갖 작업을 했다.

일주일간은 별문제가 없었다.

작업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그다음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마수들이 하늘석 주변을 기웃거렸다.

처음에는 다섯 마리 남짓이었다.

주변 일대에 굉음이 퍼졌으니 몰려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 후, 가하란이 본 것은 수백 마리의 마수들이 서로 물어뜯는 현장이었다.

난투전에서 살아남은 마수들이 하늘석을 기어올랐다.

그것들을 처리하느라 밤낮을 지새웠다.

전투, 전투, 전투.

하늘석 내부에 허공 용로와 제작 툴이 없었다면 고철 직전의 거병을 끌고 나가 싸우다가 전사했을 것이다.

전투와 수리, 전투와 수리.

주변 정리가 끝난 건 두 달이 지나고 나서였다.

물론 마수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곳곳에서 한두 마리씩 하늘석을 찾아왔다.

내버려 두면 군집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전 일과를 하늘석 주변 청소로 바꿨다.

반경 3km 내에 마수를 직접 찾아가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겹침 세계의 마수들이 무엇에 이끌리는지 잊고 있었다.

막대한 질량의 돌덩이를 하늘에 띄웠던 전송 탑. 대부분 작동을 멈췄지만 몇몇 개는 정상적으로 기능했다.

휘몰아치는 마나.

마수들이 발작하며 찾아올 만했다.

마수들의 눈에는 하늘석이 거대한 케이크처럼 보였을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사라지지 않을 달콤한 만찬.

-저건 좀 큰데.

상념에 젖어있던 가하란을 로키의 목소리가 현실로 잡아끌었다. 기계 안구가 향한 방향에서 거대한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쪽 눈을 감고 엄지손톱을 내밀어 거대한 마수 옆에 대봤다.

“17m 정도인가.”

-16.8m다.

“내버려 두면 주변 청소를 해주겠네.”

산양처럼 생긴 마수가 두 발로 걸으며 하늘석으로 접근할 때였다.

마수가 우뚝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바라볼 때였다.

마수의 머리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더니 몸과 분리돼 바닥에 떨어졌다.

쾅!

저 멀리서 흙먼지가 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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