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392화 (392/558)

제392화

치열하게 살았다.

지난 생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혈족의 정치와 군부의 정치. 양립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디온은 중심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켜왔다.

누군가는 백전노장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배알 없는 여우라 불렀다.

뭐라 부르든 상관없었다.

입만 산 자들은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사라졌으니까.

온갖 형태의 쟁투 속에서도 피를 흘릴 뿐 쓰러진 적은 없었는데, 무던히 흐르기만 하는 시간 앞에서는 결국 무릎 꿇고 말았다.

몸이 죽어갔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불로불사 같은 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몇몇 특별한 종에게만 주어진 혜택이라 생각하며 포기했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시간을 먼저 보내고 시간의 공백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생겨난 것이다.

디온은 자신의 몸과 유단, 그리고 빠르게 점멸하는 등을 번갈아 바라봤다.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뽑아낸 이적이 다시금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붉은빛이 번쩍였다. 이번엔 푸른빛이 방 안을 감쌌다. 측정할 수 없는 마나가, 온갖 대역의 마나가 방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혼돈이라 불러 마땅한 마나의 소용돌이 안에서, 유단은 침착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디온은 새 시대의 신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기계를 통한 생명 연장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떨리는 것 같았다. 물론 기계 몸이라 떨린다는 개념에 취할 뿐이지만.

파아앙, 청량한 소리와 함께 순백의 빛이 방을 감쌌다. 기계 안구가 주변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의 광량이었다.

강렬한 빛은 지독한 어둠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력을 잃고 흰색 바탕 속을 헤맬 때였다.

“체시, 됐어.”

유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백색에 휘감겼던 기계 안구도 제 기능을 되찾았다.

한껏 풀어진 유단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전율한 걸까?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는 신만이 할 수 있는 창조 영역에 들어섰으니까.

그나저나 체시라니?

알고 있기로 체시는 거병의 이름이었다. 유단의 전용기.

-성공했군.

디온은 목소리를 꺼냄과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정신체 이전이 무사히 끝났다면 기계가 아닌 육체로 돌아갔어야 한다.

하지만 정신은 아직 기계에 남아 있었다.

-실패한 건가? 난 아직 기계 안에 있는데.

“잠시 기다리시죠.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광경을 곧 보게 되실 테니.”

유단의 눈동자가 허공을 훑을 때였다.

문을 뚫고 유단과 탄드라, 세잔이 들어왔다.

한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유단은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저기에 서 있는 유단은 대체 누구지?

무엇보다 저 세 명은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 아닌 뚫고 들어왔다. 마치 실체가 없는 허상처럼.

-이게 대체 뭔가?

“과거이자 현재, 그리고 미래입니다.”

유단이 탄드라 곁으로 걸어갔다. 탄드라의 어깨에 손을 데려고 하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물결치며 뻗어나가는 알 수 없는 힘이 유단의 손길을 막아내고 있었다.

“간섭하기에는 아직 에너지가 모자란 것 같군요.”

-저들은 대체 뭔가? 과거, 현재, 미래라니?

“영혼세계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혼세계의 극히 일부죠. 위상 겹침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무수한 위기 속에서도 살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직감이 유단을 뜯어말리라고 경고했다.

당장 멈추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하지만 음성장치를 통해 나온 목소리는 디온의 것이 아니었다.

-증명했네. 대규모 실험이 이 정도 성과를 냈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되겠어.

누구지?

디온은 기계 안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의지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챘다.

한없이 자유로웠던 의지가 한순간 새장 속에 갇혀버렸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무엇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둔 전역의 에너지로도 구현할 수 있는 시간 대역은 극히 일부분이네.”

-나타 시절의 기록을 현 위상에 불러내려면 역시 뿌리 말고는 답이 없어. 인세의 에너지로는 광범위한 시간 겹침은 불가능해. 그래도 가능성을 엿봤으니 네 말대로 성공적인 실험이었어.

내 몸을 돌려줘!

디온은 안쪽에서 소리쳤지만 기계 장치는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공허한 메아리가 광활한 공허를 헤맬 뿐이었다.

-내 안에 있는 인간, 어떻게 할 거야?

“정보 습득까지 얼마나 걸리겠어?”

-인간의 정신체를 해부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또 어떤 변수가 작용할지 아직은 알 수 없어. 내키지 않는 불확실성이야.

“계획했던 대로 말해.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알겠어. 근데 이 인간, 못 쓰게 돼도 상관없는 거지? 가닥가닥 끊어내면 결국 단순한 정보조합체가 될 텐데.

“영원히 사는 게 사령관님의 꿈이었지.”

유단이 다가왔다. 기계 안구에 맞닿을 정도로 자신의 눈을 가져다 대는 유단이었다.

디온은 검은 동공 안쪽에서 번들거리는 욕심을 엿봤다. 아니, 그건 욕심이란 표현조차 부적합한, 평범한 인간의 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감정이었다.

대체 누구인가?

아니, 인간이 맞는 건가?

“꿈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사령관님은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육체는 잃게 되겠지만, 사실 육체는 감옥이니 기뻐할 일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야.

“미리 경고해 드렸지 않습니까. 실험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저는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기계는, 거짓말을 모르니까요.”

유단의 담백한 웃음을 보는 순간, 디온은 유단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인간의 몸을…….

“한동안 의식이 남아 있을 겁니다. 체시가 당신을 구조 분해 하는 동안 많은 걸 볼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작업이 끝나도 당신을 이뤘던 다양한 정보는 체시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영생을 누리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디온 사령관님.”

안 돼,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게 차단당했다. 의식은 남아 있으나 감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단의 얼굴도 사라지고, 몸을 지각할 수 있는 촉각도, 소리마저 제거된 세상.

디온은 검다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비었다고 표현해야 할지 모를 기이한 세계를 마주했다.

“반가워.”

눈앞에 빛이 생겼다.

앞에 나타난 건 자그마한 아이였다. 남아인지 여아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아이가 앞으로 다가왔다.

“내 이름은 체시야. 앞으로 너와 오랜 시간을 함께할 동반자지.”

대화하는 사이 ‘무언가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무언가가 탈락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인간마다 기억 구조가 달라. 방금 네 기억 하나를 떼어냈어. 전쟁 통이구나. 게스할트라는 자와 함께 힘든 경험을 했네.”

“그만둬.”

“좋은 반응이야. 계속 말해. 언어능력이 살아 있는 동안 말을 쏟아내는 편이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눈알 하나가 눈앞을 지나갔다. 떨어진 귀도 보였다. 저건 뭐지?

“사령술사의 기억들이야. 너한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네. 각자의 인지능력에 따라 시각화하는 결이 다르거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니까.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언어는 분명 기억하는데 서두를 어떻게 떼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아…… 저…….”

“미안. 엉뚱한 곳을 잘라냈나 봐. 하지만 괜찮아. 결국 하나하나 분해될 예정이니까.”

분해.

무슨 뜻이었지?

아니.

그보다 난 왜 여기에 있지?

아니.

나는…….

“네크로맨서는 영혼세계에 관해 알아내야 할 게 많아서 조심스럽게 분해했지만, 넌 쓸모가 없거든. 그래서 기분 내키는 대로 할 거야. 하지만 정말 걱정하지 마. 넌 살아 있어. 정보로서 존재하는 거야. 언젠가, 정말 말도 안 되는 확률로 나눠진 모든 정보들이 재조합돼 너라는 개체로 되살아날 수도 있어. 어때? 흥미롭지?”

어린아이가 다가왔다.

디온은 멍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무엇이 문제였고, 무엇을 원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 * *

-육체의 죽음은 어쩔 수 없죠. 예상했던 바니까. 하지만 난 만족합니다. 고통이 없으니까요.

탄드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 안에 있는 디온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불안에 떨 법도 한데, 역시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사령관님의 의식은 이 안에 보관돼 있을 겁니다. 괴리감을 덜기 위해 한동안 의식을 잠재워둘 거고요.”

-협의된 내용이니 두 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전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모양이다. 하긴, 이곳에 모인 세 사람은 위험한 비밀을 공유한 동지이지만, 언제든 등을 찌를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다.

탄드라는 유단을 바라봤다.

이 공간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한 내 편.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유사정령의 보관 역시 유단에게 일임했습니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할 테니, 그건 당연한 일이고.”

세잔이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사후 처리를 논하죠. 사령관님께서 변고를 당했다고 발표해야 하니까요.”

“군부 인사야 미리 정해뒀으니 문제는 없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야 해요.”

-정치적인 건 두 분께 맡기도록 하죠.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인 만큼 두 분을 의지하겠습니다.

세잔이 살짝 웃었다.

“그나저나 그 안에 들어가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살 만한가요?”

-궁금하면 이쪽으로 오시죠.

“저도 나중에 가긴 가야죠. 하지만 지금은 몸뚱이가 튼튼하니 괜찮습니다.”

-인간일 때와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흠, 차 맛을 못 느끼는 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겠군요. 허허허.

“그 정도는 참으시죠. 훗날 쌩쌩한 몸뚱이로 되돌아오면…… 즐겨야 할 게 많으니까요.”

-그래야죠.

세잔이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 일정이 있어서 그만 가보겠습니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군요. 기적을 영접했더니 웃음이 그치질 않아요.”

가벼운 손 인사를 남기고 세잔이 떠나갔다.

“유단, 넌 정말이지 완벽해. 내 이상을 이뤄줄 존재는 너뿐이야.”

“이제 첫걸음을 뗐을 뿐입니다. 근데…… 지원이 좀 더 필요합니다. 사령관님께서는 허락하셨으나, 두 분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사령관이란 말에 탄드라는 유사정령을 바라봤다.

“따로 물을 필요가 있을까? 난 언제나 네 의견을 존중해. 사령관님께서도 한 손 보탰다면, 세잔도 따라오겠지.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실험을 위해서라면 뭐든 준비해줄 테니.”

“감사합니다.”

“아, 레테의 성능은 어때? 제대로 작동한 것 같긴 한데.”

“훌륭합니다. 대역폭을 넓혀서 다른 대역의 마나와 마전기도 끌어올 수 있도록 보완하면, 다음 실험 일정을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노력해볼게.”

수고했다는 의미를 담아 유단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성한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이란 게 이런 걸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널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어.”

“저 역시 그렇습니다.”

유단은 정리할 게 남았다면서 실험실에 남겠다고 했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는 거 기억해.”

“예. 정리만 끝내고 제대로 쉬겠습니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탄드라는 실험실을 벗어났다. 세잔의 말대로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이 육신을 벗고 영생을 얻었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궈낸 것이다.

마에스트로란 명칭도 부족하다.

유단은 새 시대의 신으로서 추앙받게 될 것이다. 그가 빛나면 빛날수록, 내게 전해지는 영광 역시 거대해질 테지.

“사랑스러운 아이.”

탄드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긴 복도를 걸어 나갔다.

* * *

오른쪽 의족에서 떨어져 나온 배터리가 바닥을 굴렀다. 검붉게 달아오른 배터리. 재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출력은 좋은데, 조금 아쉽네.”

가하란은 허벅지에 매달아 놓은 단검을 뽑아 들고 죽은 마수를 향해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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