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식당 밖에서 에일의 웃음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여전히 타챠에게 매달려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타챠가 싫증 내지 않았다.
“랜더 씨는 지금 안식년을 맞이해 쉬고 있어요.”
“안식년이요?”
밀레나는 잔을 받아 들며 되물었다.
“남들이 강권한 안식년이죠. 그 양반, 쉬는 걸 잘 못 하거든요. 억지로 떠밀지 않는 이상 쉬지도 않아요.”
“본받아야겠네요.”
“흐음, 밀레나 양. 끔찍한 소리 마세요. 그건 본받아야 할 게 아니라 지양해야 할 자세예요.”
“협회장님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시는 분은 총무님뿐일 거예요.”
“설마요. 이 방면에서는 구치 씨가 압도적인 일등입니다.”
칼리고가 창가에 기대섰다.
“그러니 할 얘기가 있다면 나한테 해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별거 아니에요. 그냥 뭐 하나 묻고 싶었거든요.”
“그게 뭐죠?”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제가 존경하는 분의 의견을 듣고 싶었어요.”
“존경이라. 낯간지러운 말이네요.”
“알아요. 하지만 그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걸요.”
시대를 구한 사람.
존경이란 말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것에 거부감은 없어요. 협회 일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힘을 보태는 것에 뿌듯함마저 느껴요. 기사도를 언급하는 게 우스운 현실이 됐지만, 그럼에도 저만의 기사도를 좇고 싶었고요.”
“밀레나 양은 잘하고 있어요.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
“사심이 들어요.”
“사심?”
“협회 쪽 일과 관련 없는 사안이라 그동안 얘기하지 않고 있었는데…….”
물꼬가 트여서 그런 걸까. 아리엘에게 털어놓고 나니 한결 말하기 쉬워졌다.
덴스와 유단, 그리고 가하란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최대한 감정을 덜어낸 상태로.
“큰 그림을 보고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요. 가하란의 죽음에 유단이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런데도 신경이 쓰여요. 이젠 건들면 안 되는, 오히려 지원해줘야 하는 상대임을 알지만…….”
“요컨대 방향을 잃은 개인의 복수심 때문에 혼란스럽다, 이런 건가요?”
“정리하면 그렇게 되나요?”
밀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선에 있을 때는 오히려 머리가 맑아져요. 적은 명확하고 해야 할 일은 더욱 뚜렷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도시로 돌아오고 나면 무기력해져요. 한심하죠?”
“아니요.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요. 감정을 딱딱 끊어내고 대의라는 것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단한 거죠. 아니, 내 시선에서 보면 그들은 광신도예요. 반쯤 미쳐있는 거죠.”
“……협회장님도 광신도인가요?”
그 말에 칼리고가 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나 웃긴 말인가? 한참이나 숨넘어갈 듯 웃던 칼리고가 가슴을 툭툭 쳤다.
“밀레나 양은 남을 웃기는 재주가 뛰어나요. 나중에 희극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제 말이 어디가 웃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웃은 이유는 단 하나예요. 밀레나 양은 지금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고 있어요.”
“네?”
“협회장을, 랜더 씨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그야…… 세상을 구하신 분이죠. 치장하는 게 아닌 액면 그대로.”
“세상을 구한 게 대의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는군요?”
“아닌가요?”
이치에 어긋난 힘을 사용해 그라운드 제로를 불러일으킨 길리우드. 그자를 처단하고 끝내 신에게서 자유의지를 획득해온 허스.
입으로만 이어져 내려오는 영웅담도 이보다 극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모두를 구원한 영웅. 대의란 단어는 이럴 때 쓰이는 게 아닐까?
“랜더 씨가 시간의 쳇바퀴 속에서 우릴 끄집어낸 건 맞아요. 하지만 랜더 씨가 움직인 이유는 세상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같은 대단한 대의명분이 아니에요.”
“예?”
“그 양반은 그저 화가 났을 뿐이에요. 세상을 구한 거창한 영웅담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건 단 하나를 잃은 소박한 남자의 복수담이에요.”
단 하나를 잃은 소박한 남자의 복수담?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깜빡일 때였다.
“나중에 만나게 되면 직접 들어요. 아마 담담하게 말해줄 거예요. 내가 설명해줄 수도 있지만, 이 얘긴 너무 개인적인 거라.”
칼리고가 손목을 주물렀다.
“한 번뿐인 인생, 원하는 대로 해요. 뒷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위험한 조언 아닌가요?”
“난 그렇게 살아왔는걸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대의, 정의. 추구하면 좋죠. 하지만 목맬 필요는 없어요.”
“유단을 몰아붙여도 될까요?”
“뒷감당할 수 있어요?”
“아니요.”
“그러면 참아요.”
“매정하시네요.”
“원래 세상 돌아가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바깥 정리를 해야겠다며 문으로 걸어가는 칼리고였다. 밀레나는 칼리고의 등을 향해 물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지만, 만약 협회장님이 제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형태가 살짝 다르긴 하지만, 만약 누군가에 의해 랜더 씨가 아끼는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랜더 씨는 검을 뽑아 들었겠죠.”
“상대가 거대도시의 수뇌부이고, 그 사람이 죽으면 큰일이 난다는 걸 알면서도요?”
“말했잖아요. 랜더 씨는 대의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랜더 씨를 따라다녔는지 알아요?”
밀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인간 검 끝이 향하는 곳이 제국이었다면 제국이 없어졌을 테니까요. 연합왕국이었다면 연합왕국이 사라졌을 테고.”
“…….”
농담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복수심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머리 그만 쓰고 나와서 정리나 도와요.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최고니까.”
“그래야겠네요.”
식탁에 손은 얹고 일어설 때였다.
가게에 설치된 등이 깜빡거렸다. 배터리가 다 된 걸까? 점멸하는 등을 유심히 바라볼 때였다.
“뭔가 문제가 있나 보네요.”
칼리고가 말했다.
밀레나는 밖으로 나와 건너편 건물을 바라봤다. 다른 곳도 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팔을 움직이며 광고판을 흔들던 기계인형도 잠깐이지만 삐걱거렸다.
그렇게 몇 초간 거리 전체의 마법공학품이 장애를 일으키다 복구됐다.
“뭐였을까요.”
“균열 근처다 보니 별별 문제가 다 생기긴 하는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요.”
칼리고의 시선은 10m 정도 떨어져 있는 거대한 균열에 닿아 있었다.
“일시적인 현상일까요?”
“알아는 보겠지만, 저 바닥 밑은 미지의 영역이라.”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피던 사람들도 이내 별일 아니었다는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네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밝혀내 대비하는 게 우리 일이죠. 하지만 지금은!”
칼리고가 솥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 인간이 계속 눈치 주고 있으니 정리부터 하자고요.”
저 인간, 밀리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칼리고였다.
“할 수 있는 것부터.”
밀레나도 냄비 고리를 손에 쥐고 뒤를 따라갔다.
* * *
탄드라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극심한 방전을 일으키며 어둠 속에 잠겼던 방 안에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공한 걸까?
아니면 실패?
이토록 긴장한 게 얼마 만인지.
탄드라는 실험대 위에 누워있는 디온 사령관을 바라봤다.
미약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노인.
디온은 지난 1년간 죽음의 문턱 앞을 넘나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텐데, 그는 삶에 대한 지독한 집착으로 지금까지 버텨낸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에 달했다.
오늘 실험에 실패하면 디온은 죽는다.
한 줌뿐인 생명이 연장되느냐, 아니면 끝나느냐는 전부 유단 손에 달려 있었다.
“성공한 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탄드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인간을 정신체로 만들어 유사정령에 옮기는 행위.
마법과 마법공학을 아우르는 고차원적인 기술은 유단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공학에 일생을 바친 탄드라조차 유단의 손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그저 기적처럼 보일 뿐이었다.
세잔의 눈동자가 자연스럽게 유단에게 향했다. 탄드라 역시 유단의 입만 바라봤다.
“사령관님?”
유단은 실험대 위의 디온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목소리가 향한 곳은 탁자 위 유사정령이었다.
거병에 사용되는 유사정령보다 부피가 더 작은, 어린아이도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소형 유사정령에 빛이 감돌았다.
커넥터를 통해 연결된 기계 안구가 서서히 들렸다.
탄드라는 두 손을 맞잡고 눈앞에서 벌어진 경이에 전율했다.
-나는 살아 있는 건가?
음성 장치를 통해 나온 목소리는 디온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탄드라는 확신했다.
실험이 성공했다.
인간의 의식이 기계로 옮겨졌다.
-어색하군. 평생 들어온 목소리가 아니라서.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아아, 감각이 없다는 건 기묘한 일이야. 아니, 지금은 오히려 좋군. 아픔이 사라졌어.
기계 안구가 실험대로 향했다.
-내 몰골을 보게. 이 얼마나 추하고 끔찍한가.
세잔이 웃으며 말했다.
“몸이 들으면 섭섭해하겠어요.”
-그렇군. 우리 학회장님. 저 몸은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유단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의식이 분리됐다고는 하나 육체의 기능은 살아 있습니다. 말을 듣고 뇌 어딘가에 정보를 저장해 두고 있겠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저것도 나고 이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나야. 기이해, 정말 기이해.
자신의 껍데기를 유심히 살피던 디온이 유단을 바라봤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겠군.
“말씀드린 대로 정신체 이전을 다시 시행할 겁니다. 육신으로 옮겨 정상적으로 안착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정신체 이전에 실패해도 죽는 건 몸뚱이뿐, 정신은 기계 안에 온전히 보관되는 게 맞겠지?
“그렇습니다. 이제 사령관님께서는 그 안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이거 참, 학회장님께서 큰일을 해주셨군.
탄드라는 유단 곁으로 다가가 손을 살며시 쥐었다.
마법공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기술이었다.
정신체 이전.
안전성만 확보하면 영원한 삶도 실현 가능할 것이다.
만국의 왕들이 꿈꿔왔던 불로불사가 손안에 들어왔다. 이 순간을 기점으론 ‘생명’의 정의가 뒤바뀔 터였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연구원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나 유도장치 준비가 끝났습니다.”
“준비해둬요.”
마나 유도 장치, ‘레테’.
이전이 시작되면 둔 전역에 펼쳐진 일정 대역의 마나와 마전기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올 것이다.
“두 분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죠.”
유단이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니?”
“육신에서 정신체를 빼 오는 것보다 역으로 돌려놓을 때가 더 위험합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안으로 삼켰다. 정신체 이전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유단뿐이었다. 그가 위험하다고 하면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가 있죠.”
세잔과 함께 방을 나섰다. 열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허무맹랑하다고 치부했던 것들이 현실이 돼 눈앞에 나타났다.
“많은 게 바뀌겠군요.”
세잔이 말했다.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인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죠. 우리는 기계를 만들었고요. 그 기계를 통해, 우린 신의 업적에 손을 대고 있어요.”
“전 마법이니 공학이니, 어려운 건 질색입니다. 중요한 건 내 삶이 연장됐다는 거니까요.”
간만에 보는 장사꾼의 눈빛이었다. 세잔이 그리고 있을 미래가 무엇일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시작됐어요.”
지하 복도에 설치된 전등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신인류의 무차별적인 마법 사용을 방지하고자 고안해낸 마나 유도장치, 레테가 가동한 것이다.
막대한 에너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노출되는 순간 녹아 사라질 양이었다. 극도로 위험한 자원을, 유단은 능숙하게 다루며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린 새로운 신을 영접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세잔이 문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